大峙라는 지명은 몽탄에서 무안읍으로 가려면 내리를 거쳐 마을 옆으로 해서 넘어 가는 큰 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총지는 대치3리에 속하는 마을로 총지와 장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 마을 모두 총지사와 관련된 마을로 장동은 총지사가 폐찰되기 전 1700년대 후반에 형성된 마을이고 총지는 총지사가 폐찰 된 후에 세워진 마을이다.
壯洞은 1700년대 후반 이천 서씨 덕눌의 후손인 종익(자-은경, 1737-1783)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摠持는 총지사가 1810년을 전후해서 폐찰 된 후에 형성된 마을로 처음엔 송정 마을로 불려졌지만 후에 총지사의 절 이름을 따서 총지로 불렀다. 송정 마을로 불렸던 이유는 울창한 소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형성(입향조)
壯洞은 1700년대 후반 이천 서씨 덕눌의 후손인 종익(자-은경, 1737-1783)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원래 이천 서씨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타성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대치리, 탑동리 화표정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로,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에도 대치리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대치리 한재 봉암 장동으로 표기되었다.
자료를 통해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현재의 대치리 구역으로 추정되는 지명으로 탑동리 화표정리가 기록되어 있다. 1912년의 자료엔 文岩里 松亭리 赤峙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엔 석진면 대치리에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이 나온다. 1987년엔 대치리에 한재 봉암 장동이 나온다. 주민들은 현재의 마을 외에는 모른다고 하지만 탑동리가 있었다는 기록은 예전부터 총지사와 관련된 마을이 있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행정구역 변경
대치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리를 합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 봉암과 원래 한 개의 합구였으나 봉암에서 분구를 요청하여 분리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의 학생들은 몽탄중앙초로 걸어 다녔다.
또한, 몽탄중학교를 만드는데 마을주민들이 울력으로 참여했다.
무안을 가기 위해서 청천리(백운산 고개), 도대‧청계(군도 16호선)로 넘어 다녔다. 산을 끼고 교류했던 태봉, 동암, 청천 분들과 혼인이 많았다.
무안장, 몽탄장 뿐 아니라 일로소장터, 함평장까지 걸어서 다녔다.
마을 근처에서 칡 등을 캐다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주민들은 잘 모르니 고물상들이 다 가져가 버리기도 하였다. 또한 총지사 주변에서 금속탐지기로 유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마을은 물이 깨끗해 아직도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100여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대치제일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예전에 청계면 동암 마을 사람들이 동암치를 넘어 다녔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치제일교회는 대치리 첫 번째 교회라 제일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대치제일교회 밑에 방앗간이 있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은 백운산(마협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한다.
마을은 산이 깊어 짐승들의 천국이다. 해서 마을 위로는 밭농사는 물론 논농사도 지을 수가 없다. 멧돼지를 포함한 노루 고라니 토끼 등 각종 짐승들이 몰려다니며 농작물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다.
동/식물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 개천에 민물장어가 처리 곤란할 정도로 많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서 청계 태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각커리재라 부른다. 산너머 우적동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각커리재는 가거리재에서 비롯된 말로 가히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재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역신이었던 김자점의 후손이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았다는 것이다. 김자점이 인조반정 이후 공신에서 역신으로 몰리자 3족이 멸할 위기에 처했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어와 살면서 후대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 재에는 예전에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중들샘’이 있다. 이 샘은 스님들이 먹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총지 마을에서 장동 마을로 가는 중간에 있다. 소살터가 있다. 총지 마을에서 청계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에 있는데 중들이 죽으면 불에 태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火)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다. ‘소산태’라고도 한다.
사깃등이 있다. 총지 마을 맞은편 언덕에 있는데 절에서 쓰는 그릇을 구웠던 곳으로 지금도 그 터에는 많은 사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탑밭이 있다. 또는 탑톳밭이라고도 한다. 총지사 본당의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의 앞에 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밭이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묏등(쇠산소라고도 함)이 있다. 총지사 소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임면수의 부친인 임관진의 묘가 있는 곳이며 그곳엔 관진의 묘와 3기의 부인 묘가 있다. 쇠묏등이라고 한 이유는 이곳에 묘를 쓰자 중들이 쇠말뚝을 박아 버린 데서 연유한다. 먹굴이 있다 낡은 절터 아래에 있는 터를 말한다. 청룡등이 있다. 먹굴 위에 있는 등성이인데 쇠묏등을 기준으로 해서 좌청룡에 해당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등잔걸이가 있다. 원통암이 있었던 자리를 말하며 멀리서 보면 마치 등잔걸이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외 지명으로 물방아 터, 촌전야지, 중들청기와터, 불당골중샘 등이 주민들의 기억 속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마구답, 마장터(총지와 장동마을 사이의 들판
으로 말을 기른 곳), 상앳등과 같은 지명들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정월대보름이면 석장승 앞에서 매년 행사가 있었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두 기의 석장승이 있다. 총지사는 725년에 승달산 법천사와 함께 당나라에서 건너 온 정명이라는 스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총지사가 처음 세워진 곳은 백운산 기슭이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로 사찰이 불에 타자 현재의 터인 백운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총지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기록에도 호남제일의 사찰이라고 표기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던 총지사였다.
총지사는 봉암까지 영향을 주었고 99개의 암자터가 있다. 주춧돌이나 다리 등도 남아 있었다. 포크레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흔적이 사라졌다.
총지사가 폐찰이 된 건 명당 때문이었다. 지금도 낡은절 터 뒤에 ‘대군왕지’라 쓰여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 주변에 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존폐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총지사 주변에 명당이 있음을 알고 있는 지역의 토호 세력인 나주 임씨 문중에서는 묘를 쓸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喪을 맞아 총지사 경내에 묘를 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총지사의 폐찰 원인은 명당 자리였지만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 만덕사라는 암자가 있었다. 사깃등 옆에 있었던 조그만 암자인데 神氣가 있는 보살이 운영하였던 것이다. 후일 대치리 입구에 있는 현재의 호국사로 이주해 절세를 확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주민인 이 봉씨가 안골에서 밭을 갈다가 금부처 3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처음엔 시커먼 철제 장난감이 녹슨 것으로만 알고 대수롭지 여겨 마당에 놔두었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일본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금부처임을 알게 되었다. 후일 일본인들이 달라 하자 아무 소리 못하고 뺏겼다고 한다. 다행히도 일본인들은 금부처를 가져가면서 소한마리 값을 주고 갔다고 한다. 안골은 총지사 대웅전이 있었다는 곳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불타면서 값비싼 유물들을 건져내지 못해 지금도 금부채[金扇], 금바둑판, 금동자상, 금불상, 금마(金馬), 청기와 등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으며 외지 사람들이 묻혀진 유물을 찾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이다. 총지사 대웅전에 세 개의 청기와가 있었는데 폐찰이 되면서 남천 마을의 서씨들이 가져다 문중 제각에 얹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마을에는 총지사가 큰절이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는 기와를 구웠던 곳이 두 군데나 있다. 왓등으로 부르는 사깃등 옆과 동암으로 넘어가는 동암치에 있는 굴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말을 길렀다는 마구답이 있다. 주민들은 마구답 또는 마장터라고도 부르는데 총지와 장동 마을 사이에 있는 들판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석장승이다. 원래는 봉암 마을 입구에 있었던 것인데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석장승 넘어 고인돌 군락지가 있었다. 그러나 경지정리하면서 많이 묻혔다. 마을회관 앞 고인돌이 한 기 남아있다.
노승들이 와서 수행하는 낡은 절이 있었고 제각은 없다.
설화
각커리재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역신이었던 김자점의 후손이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았다는 것이다. 김자점이 인조반정 이후 공신에서 역신으로 몰리자 3족이 멸할 위기에 처했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어와 살면서 후대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 재에는 예전에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석장승 안쪽은 총지사의 기운이 있는 곳으로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인물이 많이 나와 공직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산이 깊고 공기가 맑아 장수하시는 어르신들이 많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만남의 길 덕분에 편리해졌다. 오토바이 자전거 등이 시끄럽고 불편하지만 무안이나 목포가 가까워져 생활이 편리해졌다.
주민요구사항
총지사의 복원시도가 있었으면 한다. 또한 주변에 고인돌이 많이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고인돌 공원을 조성하면 좋겠다.
만남의 도로가 완성되었으니 정상에서 법천사 등으로 가는 등산로를 만들면 좋겠다.
그리고 차량 통행이 늘어남에 따라 안전을 위해 도로 앞 방지턱이 필요하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태봉사람들이 길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다 오히려 골프장을 떠 앉게 되었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 화산까지 물이 들었었다.
기타사항
이장들에게 내려오는 출납부가 있었고 젊은 시절 이장할 때 다음 사람에게 건네주었는데 다시 이장이 되니 없어져서 받지 못했다.
32만평에 이르는 나주 임씨들 땅이 총지사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