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江里는 후삼국 시대 새로운 왕조 탄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왕건과 견훤의 영산강 싸움에서 꿈 속의 선몽으로 왕건이 승리를 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彦洞은 원래는 따뜻한 곳을 나타내는 於溫洞이었다. 조선시대에는 於溫洞이라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彦洞이라 했는데, 어온동이 음운변화를 일으키면서 발음의 편의를 위해 오늘날의 언동이 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언동은 수성최씨 崔面守(자-정직, 호-장곡. 1503 - ?)가 1500년 중반에 경기도 화성군에 살다가 을사사화를 맞게 되자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淸水洞은 나주오씨 오윤석(자-중연. 효종조)이 나주 도림에서 세거하다가 동서분당이 일어나 조정이 시끄럽자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을 일구어 정착하였다. 구전으로는 오윤석 공이 목포로 내려가다가 갈증을 느껴 우물을 찾아 헤매던 중 이곳에 물이 맑고 푸른 샘이 있어 문화유씨 부인과 함께 정착하였으며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이 마을은 오씨와 황씨 서씨 등이 살았으나 현재 오씨는 한 가구도 없고 복합성씨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마을 입구에 동암 마을이 있다. 하지만 동암의 유래는 알지 못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사실 철도는 이 마을 주민들에게 富를 안겨주었다. 마을의 지형이 치(곡물을 까부르는 농기구의 하나. 키[箕]라고도 한다 )형국이어서 곡물이 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가 필요했는데 마을 앞에 철도 둑이 생기면서 방어벽 구실을 해 자연스레 재물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마을 주택들의 좌향은 영산강과 병렬 구조를 이루는 남향이다. 왜냐하면 영산강을 바로 보면 풍수상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성씨
언동은 수성 최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복합성씨 마을이 되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조선시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박곡면 지역으로 於溫洞리 海山리 淸水洞과 夢灘리로 이루어졌었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海山村 東岩리 彦동 上夢灘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몽강리 해산촌 상몽탄 언동으로 표기된다. 정확히 어느 지역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1912년의 자료에 新店리와 店村이 나온다. 1987년에는 몽탄면 몽강리 상몽탄 점촌 언동 청수동으로 나오며 현재는 몽탄면 몽강리 상몽탄과 언동 2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행정구역 변경
※ 청수동은 3구로 따로 있다가 2구로 합쳐졌다. (이장님 태어나기 전의 일)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포구가 성행할 당시 첫굴 주변에는 5-6 개의 주막이 들어설 정도로 성시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바다에서 나는 생선이 많았다. 집집마다 생선을 보관하는 소금항아리가 있었다. 어업과 관련된 수입이 매우 높았으나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을의 수성 최씨는 세 개의 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5집의 지주집들이 가장 위에 살았고 계층에 따라 3개 층으로 분리되어 살았다. 계층으로 인해 발생되었던 갈등의 기억은 아직도 마을분들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
주요시설
영산강과 접해있는 마을 옆은 세 개의 포구가 있었다. 석정포와 윗구지 아랫구지이다. 석정포(돌코쟁이)는 점촌 사람들이 옹기를 실어 나르던 포구였으며 윗구지와 아랫구지는 쌀 등 일반 잡화를 실어 나르던 이름 없는 포구였다.
목포 상수도 사업소와 취수장이 마을 뒤 산에 조성되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언동 마을엔 건넷샘이 청수동 마을엔 들샘이 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해 주었다.
언동의 건넷샘은 모든 샘물이 말라도 그곳은 물이 차는 곳이었으나 묻어서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청수동 들샘은 지하수를 개발하면서 샘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다양한 어족 자원이 풍부해 지역의 특산물이 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영산강을 막기 전 지금의 청계 앞바다와 같은 넓은 갯벌이 있었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에는 원래부터 당산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청수동 앞에 불당골이 있는데 아마 장곡이라 부르는 지역이라 추정된다. 이 골짜기에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불당골 앞에는 범바위라 부르던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여우가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바위 주변에 숲이 우거져 주민들은 바위를 볼 수가 없다.
언동 마을에서 점촌으로 가는 잔등을 점잔등이라 하며 그 밑에는 돌무지라는 지명이 있다. 돌아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언동에서 청수동으로 가는 모퉁이에 다 쓰러져 가는 정자가 있다. 언동 마을의 입향조인 장곡 최면수의 정자이다. 최공은 1537년 38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 정언과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등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을사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유유자적하며 살며 지었던 정자이다. 이후 1927년 후손들이 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시 지은 정자이나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아 기와는 벗겨지고 기둥은 썩어 들어가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에 현판이 있으나 언제 쓰러질지 우려가 된다.
마을에는 육각형의 온풍정이라 이름 한 모정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 효자어은최공기실비가 들어있는 효자각이 있다. 어은공은 최명희를 말하는데 공은 1785년에 이 마을에 태어나 7세 때 부모를 여의고 눈이 먼 일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양모가 병들고 거동이 불편하자 갖은 정성으로 모셨는데 이러한 선행이 조정까지 알려져 홍릉참봉에 제수되고 통정대부의 가자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언동에는 현 이장님의 할아버님 삼형제가 땅과 비용을 지불하여 세우셨다는 삼일정이 있다고 하나 풀숲에 가려 확인하지 못했다.
청수동에는 비가 많이 있다. 입구에 1986년에 세워진 효열부나주나씨기적비와 1929년에 세워진 효자서상술 효부여양진씨기적비가 있다. 서상술 부부는 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부친이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였다. 이름난 의원이 산꿩을 잡아 고아드리면 부친의 병이 쾌차하실 것이란 말에 꿩을 잡으러 돌아다녔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부부가 목욕재계하고 산신령께 지성으로 빌자 날아가던 산꿩이 땅에 떨어져 부친의 병을 구완할 수가 있었다. 이런 효행이 널리 알려져 향당의 추천을 받아 효자 효부로 알려지자 후손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청수동 마을 위에도 효열각 안에 열부김해김씨표창비가 있다. 효열각 옆에는 1930년에 세워진 만호처사서공유허비가 서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서 건설된 호남선 철도는 마을 앞으로 세 개의 굴을 뚫어 놨다. 이 굴들은 당시에 주민들의 교통로이기도 하였는데 첫굴을 언동굴이라 하며 가운뎃굴은 망녕굴 그리고 마지막 굴은 백낙굴이라 불렀다. 가운뎃굴인 망녕굴은 한국전쟁 당시 1개 대대 정도의 인민군들이 주둔하여 업무를 봤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주민들의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생계에 변화가 생겼지만 홍수에 발생하는 수해를 막아주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찼었다.
철로 폐선 되면서 2m 높이의 철도 둑을 해체하였다. 풍수지리 상 긍정적이 역할을 하던 둑이지만 마을 앞을 가리는 문제가 있었다. 현재는 마을 앞이 훤하고 밝아졌다. 폐선 부지 땅은 개인들이 임대 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
영산강 도로의 개통은 언동 주민들에게 매우 편리한 교통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다만 자전거가 너무 많고 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러운 단점은 있다고 한다. 그런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장점이 있다고 한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전기가 늦게 들어와 건강한 생활을 지속했다는 기존의 기록이 있으나 조금 맞지 않아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 그 당시 시골지역에 대부분 그 즈음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특별히 이 마을이 늦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