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 해창 하동창(하주교)
전체 마을로 보면 80호 이상이 되었다. 현재 마을은 젊은 사람들이 없고 어르신들이 주로 살고 계신다. 객지에 나간 자녀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적어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
기동은 한때 50호가 넘기도 했다.
지명유래
鳳山이란 지명은 기동 마을에 啼鳳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시대 세종 때 조세법이 확정되고 전국에 걸쳐 조세창을 건립할 때 왕조에서는 운송 여건이 좋은 이 마을에 창고를 세웠다. 무안현에서 봤을 때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 동창이라고도 불리는 이 창고는 나주군과 함평군 무안군 일부의 조곡을 수납해서 영산강을 거쳐 제물포까지 납속하였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이런 연유로 마을 이름도 해창 또는 동창으로 불려졌다.
기동이란 지명은 텃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창고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이 지역의 첫 번째 마을로 여겨진다. 하주교는 하동창으로도 불렸는데 語感이 좋지 않다하여 배다리라 부르다 현재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문헌에는 상주촌으로 나왔는데 언제 바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강씨와 채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있지 않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임씨 林漹(자-장원, 호-동호. 1608-1646)이다. 공은 귀래정 林鵬의 5세손으로 나주 회진에서 세거하다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이 마을에 이주해 정착하였다. 공은 학문이 높았으나 호란으로 인한 남한산성의 치욕을 부끄러워 해 출사를 하지 않고 이 마을에 은둔하여 후세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마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나주오씨 입향조는 오창환(자-경대, 호-해은. 1761-1824)이다. 공은 文行이 탁월하고 鄕儒가 출중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공은 원래 광산군 평동에서 살았으나 주변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가문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자 가족을 이끌고 1700년대 후반 이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후일 공은 내부참서를 증직 받았다.
풍수지리(마을형국)
鳳山里는 1939년에 무안군 몽탄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낚시명당의 어옹수조 형국의 기동, 옥녀봉과 청룡이 감싸고 있는 금반옥호의 터인 옥반동, 그리고 말 안장의 지형으로 용처럼 승천하는 형국인 용마승천의 기룡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봉산리는 마을마다 명당 터를 갖고 있는 무안에서 몇 안 되는 마을이다.
마을성씨
해창 마을은 나주 임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전체로 보자면 집성촌이 아닌 오합지졸이지만 화합은 매우 잘 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봉산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창, 기룡동, 기동, 반암리, 사동, 상주촌 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 강엔 물반 고기반의 황금어장이었다. 숭어는 물론이고 대과이 잉어 농어를 포함하여 황복 검복(검은 복어) 등이 지천으로 잡혔다. 특히 중선배(강이나 바다에 닻을 고정시킨 다음, 그물을 설치하여 물때를 이용 방향을 전환하면서 어로작업을 하는 배. 10여톤 급의 범선으로 소형 안강망 어선이다) 세 척을 세워서 고기를 잡을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여름에는 빈지락 겨울에는 모찌를 많이 잡았는데 무안 함평 등지에 내다 팔아 가용으로 쓰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중선배가 없어졌는데 중선에 걸쳐진 그물과 그물에 낀 이끼의 모습이 마치 적의 엄폐물로 여겨져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식량이 부족해 가래밥(보리를 멧돌에 갈아서 만듦)을 먹기도 했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지금 개들이 먹는 사료보다 못한 것을 먹고 살았다.
예전 영산강이 살아 있을 때는 어선들이 숭어, 장어 등 고기도 많이 잡았다.
주요시설
마을 아래 영산강 변에 신설포가 있다.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로 건너가는 나루로 현재 몽탄 양수장(1984년 8월 30일 완공) 일대이다. 예전 함평 우시장이 컸을 때는 위쪽의 사포 나루가 컸었는데 영산포 다리가 연결되면서 사포 나루는 작아지고 신설포구가 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운행하던 돛단배는 60년대까지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기동교회(심창선 목사 시무)가 자리하고 있다. 이 교회는 1954년 옥반동 너머 함평 소재의 교회에 다니고 있는 홍을림 신도가 이 마을의 오경례 주부와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믿음이 점차 확산되어 교회당 건물을 지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교회 터는 나주 오씨 문중에서 기증했다.
마을회관 근처에 우물이 있는데 68년 대한해 때 텃밭을 팠더니 물이 나와서 만들어졌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함평군 엄다면 그리고 나주시 동강면을 포함한 3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의 주산은 啼鳳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가 겹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을의 지리적인 특징이다.
동/식물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있다. 둘레가 2미터 80이 넘는 우람한 나무로 수령이 300년이 됐음직한 나무이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해창에 큰 나무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대포리동 삼학동 민동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라 모양의 돌이 있다 해서 자리바웃등(자라바웃등)이 있으며 기동에서 해창으로 넘어가는 재를 동창재라 한다. 강골 또는 갱골이라 하여 강씨들이 살았던 터를 말하는 지명도 있는데 기동 교회 주변을 말한다. 또한 예전 해창 마을의 창고 터 뒤에 고적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곡물과 관련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두워 두었던 곳이다. 고적골 밑에는 창샘이 있다. 지금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한때는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던 샘이다.
영모재 위 조세창이 있었던 곳에서 무안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는데 주민들은 원님길이라 불렀다. 무안현의 원님이 창고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다녔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깃대바위도 있다. 원님이 올 때 깃대를 꽂아 원님의 내왕을 알렸던 바위이다. 원님길 위에는 배바위와 노적봉 바위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해창 마을에 나주임씨 재각인 영모재가 있다. 삼문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형태로 1949년에 이 마을의 나주임시 입향조인 임언을 모시는 재각으로 세웠다. 이 재각 위가 조세창이 있었던 터이다.
느티나무 옆에는 마을 입구 철로변에서 옮겨온 큰 바위를 단을 쌓듯이 놓았는데 그 앞에 ‘心止’라 음각된 표석이 놓여있다. 이 표석은 마을 뒤 오씨들이 살았던 서당터에 버려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옮긴 것이다. ‘心止’는 “莊子” 內篇 人間世篇에 있는 구절로 반드시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음을 한데 모아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깨닫지 말고 고요하고 텅 빈 경지로 감응하자는 의미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예전에 이 마을에는 흥이 있었다. 해방 이후 깡쇠를 맡았던 박계윤씨가 있어 이 마을의 농악이 몽탄면에서 최고의 명성을 갖게 했다. 특히 농악패는 주변 마을의 각종 행사 참여는 물론 몽탄 북초등학교 건립 때 설립자금을 모금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시들해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주민들 사이에서 큰 소리가 담장을 넘어간 적이 없고 그래서 법원에 간 사람도 없다. 해서 일찌기 검찰청에 의해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대나 한국전쟁 등 나라의 격변기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아 피난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옥반동이나 기룡동과 함께 五洞之間 避難地로 유명하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 강변도로가 개설되었다.
영산강 도로의 개설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주민요구사항
후손들이 마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정책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은 3개 군(무안, 함평, 나주)의 경계에 조성되어 있다.
기동마을까지는 버스가 들어오지만 동창에는 버스가 들어오지 못해 군에서 지원하는 택시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