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倉里는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른다. 마을 이름인 社倉 역시도 조선 중종 때 설치된 곡물대여기관인 곳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창1리에 속한다. 사창제도는 조선시대 초기 각 지방 군현의 촌락공동체에 설치된 빈민 구제 시설로 의창, 상평창과는 달리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민간 자치 시설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사창은 몽탄면에서 사천리 사내마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마을로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은 최씨들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고 나주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나주김씨 입향조는 김적으로 아버지인 金粹南과 함께 무안읍 성동리 대사동에서 살았으나 광주목사를 지낸 후 1560년 이곳 사창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입향조의 아버지인 김수남은 성종 연간에 나주에서 무안 대사동으로 이거하여 아들 다섯을 두었다.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부귀를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한때는 무안읍 대사동에서 몽탄 사창까지 김씨 땅만을 밟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김적(1507-1579. 호-鷲巖)은 진사시와 문과시에 급제하여 홍문전한(弘文典翰)으로 김제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곳 무안으로 낙향하여 오로지 자녀교육과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이후 1555년(명종10년)에 왜적이 죽도 달량진에 침입하여 영암에 이르자 공은 순찰사의 중군이 되어 奮戰 끝에 적을 대파하였다. 후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입향조는 마을을 형성하면서 풍수적으로 비보를 많이 했다. 우선 마을의 입구에 해당하는 선돌등의 당산하네와 초당산 마을 입구 초르뫼에 당산할멈을 세워 액막이를 하였다. 또한 마주 보이는 월출산의 화기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앞에 저수지(사창제)를 파고 당산나무를 세웠다.
마을의 주산인 牛鳴山은 처음엔 취암산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사창 삼거리 쪽으로 뻗어있는 맥이 소의 꼬리 부분이고 옥반동 쪽으로 나있는 부분이 소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가 영산강 쪽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는 산이다. 이 산은 풍수적으로 귀한 형상이어서 숱한 인물을 배출해낸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다시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사동과 하나의 마을이었으나 분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이 반촌이다 보니 평민들이 마을 앞을 지나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특히 마을 앞길은 일로 삼향 목포 등지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큰 길이어서 젊은 사람들은 더욱 조심하였다고 한다.
7시 통학열차를 이용하여 일로, 목포장에 다녔다. 포구를 통해 나주 사람들이 넘어와 기차를 이용하기도 해서 사창역 근처에 가게가 많았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1944년에 개교하여 2009년에 폐교가 된 몽탄북초등학교와 우주항공전시장 몽탄보건지소 무안역 사창교회 등의 기관이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현재 진료소 앞이 원래 사창역자리이다.
전통식품/특산품
이 마을은 짚불고기의 원조 마을이다. 마을에 세 개의 짚불구이 식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두 개만 운영되고 있다. 짚불구이는 1967년 68년 대한해(大旱害)가 들었을 때, 마을 앞들에서 물푸기 등 농사 일을 하면서 새참으로 돼지고기를 잘라와 짚에다 구어 먹던 것이 시초가 되었다. 짚불구이는 말 그대로 짚불로 구운 고기를 말한다. 삼겹살을 얇게 썰어 석쇠에 얹은 뒤 활활 타오르는 짚불에 몇 번 넣었다 뺐다 뒤집었다 하다 보면 기름은 쭉 빠지고 고기가 알맞게 익는다. 직접 불에 닿았기 때문에 약간 그을린 부분도 있어서 혹시 탄내는 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고소하고 감칠맛을 내주는 역할을 한다. 짚의 향이 배어들어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도 전혀 나지 않는 독특한 맛을 풍기는 구이이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아랫 마을인 저두에 송아지 골짜기라는 독골[犢谷]이 있으며 마을 앞에 臥牛정이라는 지명이 있다. 덕암 마을에는 ‘와우’라는 송아지를 지칭하는 산도 있다. 또한 지금은 황정골로 부르지만 소의 핑경에 해당되는 골짜기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4년 전까지 당산제를 지냈었다.
베틀짜는 할머니의 노래가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 말 무덤과 물 무덤이 있다. 말 무덤은 몰 무덤이라고도 부르는데 북초등학교 옆에 있으며 시대를 알 수 없는 무덤이다. 무덤이 있는 밭의 주인이 경작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무덤을 없앴으나 안 좋은 일이 자주 일어나자 다시 말무덤을 복원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묻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마을 앞에는 두 개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묻은 물 무덤이 있다. 지형적으로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월출산이 불의 기운을 갖고 있는 火山이라서 裨補의 성격을 띠며 화기를 식힐 수 있는 물 무덤을 마련한 것이다.
마을 유적으로는 두암식당 앞 3기 우산사 앞 2기 사동마을과 경계 능선에 5기 등 10기의 고인돌과 2개의 열부각 그리고 8기의 비가 있다.
마을의 중앙에 우명산의 이름을 딴 우산사가 있다. 1683년(숙종9년) 나주김씨 문중에서 원래 취암사로 창건하여 입향조인 김적을 배향해 오다가 바뀐 이름으로 1828년(순조 28년)에 귀암 김충수(1538 - 1598), 支巖 김약화를 추배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1882년에 설단하였으며 1945년에 祠宇를 중건하면서 월당 김대경을 주향으로 하였고, 그 후 김원, 김덕수, 김예수, 김경삼, 김지수 등이 추배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확장 개축한 것이다.
사우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좌우측에는 귀암선생순충비와 취암김선생사우유허비가 있다. 이 두 개의 비석은 서원 훼철 때 땅속에 묻혀 있다가 해방 이후 중건 때 파서 세운 것이다. 취암유허비는 김적의 행적과 우산사 사적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귀암순충비는 입향조의 장자인 김충수의 비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에는 지역의 의병들과 집안의 식솔들을 데리고 함평 사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대곡산(大曲山)에서 순절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실인 충의재는 1982년에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외삼문은 2010년에 중건했다.
우산사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도로 옆에 금성나씨열부각과 나주임씨열부각이 있다. 금성나씨열부각은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귀암 김충수의 부인인 금성 나씨를 기리는 비다. 임진왜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둘러싸여 죽음 직전에 처함을 보고 나씨부인이 양 어깨로 남편을 가로막고 왜적을 꾸짖다가 남편과 함께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1799년(정조23년) 정려를 내리고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그 후 이 지방 부녀자들은 나씨 부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베틀노래를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탐방에서는 이런 노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나주임씨열부각은 금성나씨열부각 옆에 있는데 김병택의 처이다. 임씨 부인은 19세의 나이에 홀로 되어 시조모와 시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딸자식과 양자로 들인 조카를 번듯하게 키워 가문을 빛냈다. 문중에서는 이러한 나주 임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병자년에 건립하였다. 내부에는 ‘열부나주김병택처나주임씨지려’라 쓰여진 편액 등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마을 회관 앞에도 나주나씨기행비와 이천서씨절효비가 있다.
설화
이 마을은 돌과 관련이 많다. 입향조의 호가 독수리 바위를 나타내는 취암이다. 지금도 우명산 정상에 가면 마치 독수리가 금방 비상할 것 같은 모습의 바위가 있다. 그의 아들인 김충수의 호가 귀암이다. 우산사 앞에 고인돌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후손 중에 支巖의 호를 쓰는 김약화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을 중심으로 사동-우산사-몽탄북초등학교-사창삼거리-용뫼-차뫼 마을로 이어지는 지석묘의 띠가 형성되어 있다. 1984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 조사로 우명산 동쪽에서 2기의 고분을 발견하기도 했다.
철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새벽에 자주 깨어나 자녀를 많이 낳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옥만호 장군의 태생지이다. 김철주 전 무안군수도 이 지역 출신이다.
이 마을은 무안 동학을 대표할만한 접주의 출신지이다. 김창구 부자와 영구 덕구 등 4명의 접주를 배출하였다. 네 명의 접주가 사형을 당할 때 덕암마을의 함양박씨들이 관군 몰래 시신의 목을 보관했다가 김씨 집안에 돌려 줘 박씨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 주민인 김재성(71)의 작은할아버지(김용봉, 자-문일. 족보에는 1868년생으로 갑오년 12월 12일 죽었다고 나옴)는 접주 밑에서 수성대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관헌에게 잡혀 무안 불무제 아래에서 죽었다. 직계 손자인 우범은 현재 충청도 진천에서 거주하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철길 근처에서 사고가 많았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사창역 공원을 개발하고 이어서 철길바이크를 조성하려했으나 실패하였다.
사창역은 단선구간이었기에 함평, 몽탄에서 교행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세 개의 포구가 있다. 하나는 북적포(北赤浦) 나루로 두암 마을을 지나 남동쪽 영산강변 소래산 아래에 있으며 현재 수문이 남아 있다.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 연화촌을 왕래하는 나루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山野의 소유인 큰 창고가 있었다. 또 하나는 덕보포(德甫浦)로 덕암 마을 동쪽 앞 덕암천 하구에 있다. 뿐만 아니라 윗마을인 봉산리에는 新設浦가 있다. 이러한 포구들은 사람과 곡물을 실어 나르는 역할도 했지만 입향조의 아들인 귀암 김충수가 임진왜란 때 의병과 향군을 데리고 싸움을 이끌었던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