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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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창4리 몽탄면 초당산마을 작성
  • 초당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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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社倉里는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지명을 갖고 있다. 초당산과 두암이라는 두 개의 마을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풍수와 지형에 관계가 있다. 먼저 斗岩은 풍수지리에 영향을 받은 이름으로, 마을의 주산인 牛鳴山의 맥을 이어 받은 뒷동산에 몇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면서 두암이라 했다는 것이다. 주민의 이야기로는 원래 7개의 바위가 있었으며 놓인 위치가 북두칠성의 형국을 하고 있어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확인한 결과 고인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 세 개가 각각 떨어져 있었으며 나머지 바위는 마을 한 주민이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말바위와 연결된 집안들은 모두 잘 되었다고 한다. 초당산이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이 뒷동산인데 멀리서 보면 마치 초당의 모습을 띄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草堂의 의미가 학문과 관련된 이미지가 강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의견도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우명산 연징산이 병풍처럼 둘러처진 가운데 마을에 草地가 조성되어 있어서 초당산이라 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사하신 분들의 아버님 세대에는 초당산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두암이라고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 대회를 출전할때도 두암이라고 적혀진 모자를 쓰고 나갔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확실치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성씨들을 중심으로 봤을 때 사창에서 나주김씨가 먼저 들어오고 덕암에서 함양박씨가 그리고 인평에서 수성최씨가 들어오지 않았나 여겨진다. 참고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서 나온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조그만 산을 여러 개 안고 있다. 마을 우측으로 병풍 역할을 하며 내리 뻗은 산줄기가 마치 돼지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돝머리[猪頭]라 부르고 있으며, 인평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우뚝 서있는 산은 주민들이 액운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흙을 쌓아 만든 산[造山]이다. 뿐만 아니라 東山, 그 옆에 영산강을 향해 뻗어 있는 마을 앞산이 닭머리를 닮았다 해서 닭머리산[鷄山]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 뒤로는 뒷물래 각시둠벙 노리봉 작은샛골 공동뫼 독골로 이어진다.
마을성씨
예전부터 대성이 모여산 마을이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다시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는 논 스무마지기(한섬지기)면 부자였다. 기차를 이용하여 90%정도 학생은 목포로 통학했고 10%정도는 광주로 통학을 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웃침 아랫침이라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 그중 아랫침은 메워졌고 웃침이 남아 있는데 그 샘 벽에 석진면 두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마을에 공동우물이 4개 있었다. 현재 마을회관이 우물터이자 빨래터였다.
전통식품/특산품
사창 고추가 인기가 많아 시장에 내려놓기 무섭게 모두 팔렸다고 한다. 송정리에서도 와서 고추를 따가기도 했다. 풋고추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논, 밭에 자연 용천수가 많다. 여전히 땅 속에 수량이 매우 많다.
동/식물
보호수였던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해사를 쌓아두어서 죽었다. 93년에 다시 최용주 님이 심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공동뫼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토질이 마사토여서 일제강점기 때 공동묘지로 활용하였다. 공동뫼와 독골 사이에 있는 흙들은 1970년대 사창저수지를 막는데 활용되었다. 마을 뒤는 원래 냇가였다. 성암에서 발원한 석진천의 물줄기가 흘렀던 곳인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흐르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냇가 너머에 모래산이 있었으나 이 또한 경지정리를 하면서 논을 만들어 버렸다. 뒷동산은 여러 성씨의 묘지가 있다. 노리봉 밑에서는 지금도 대량의 토기와가 발경되고 있어 이 마을 예전의 역사를 궁금케 하고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사창에서 들어오는 모퉁이를 통실모퉁이라 하고 마을 앞 길 선돌이 있었던 자리를 독바위라 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입구에 있는 동각과 등나무에서 매년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다. 동각은 초당 김기운 씨가 3600만원을 희사하여 만들어졌다.
유물, 유적
초당산 주변의 밭에서는 옹관묘의 파편들로 보이는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고대 사회의 주거지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했다. 실지로 대학의 연구 기관에서 발굴한 결과 옹관묘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려내 한때 학계에 관심을 끌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그 자리에 묘지가 들어서 있어 고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 입구에 두 기의 표지석이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침이 되는 표지석으로 1986년에 세운 ‘근면 협동 효도’를 기치로 내건 비이다. 또 하나는 이 마을 출신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기업인인 초당 김기운 선생을 기리는 공적비인데 1996년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비다. 안쪽으로는 1990년에 세운 효부금성나씨 기행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 정자 주변에는 정리가 잘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마을 길 또한 넓게 자리하고 있어 짜임새 있는 마을의 규모를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정자 옆에는 연자방아의 한쪽 틀이 놓여 있어 마을 주민들간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하는 기구의 하나인 연자방아는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牛馬]의 힘을 이용하던 방아이다. 특히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독이 마을 앞 공터에 있어서 농사철에 서로 품앗이를 할 때는 들독을 들어보고서야 결정했다고 한다. 들독 놀이는 일명 한국식 역도로써 농경사회에 쓰였던 중요한 민속자료로써 일할 수 있는 힘을 평가하고 머슴의 품삯이 되는 새경(임금)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 능력을 평가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 장난삼아 즐기는 놀이 또는 힘겨루기 등으로 이용 되었다. 하지만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들독을 묻어버려 선조들의 생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흔적이 사라져 아쉬움을 갖게 하기도 했다. 두암문화방송이 있었다. 삐삐선을 이용해 학산, 봉산 등 13개 마을에 방송이 되었다. 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다 라디오와 함께 사라졌다. 현재 마을회관은 노인회장님께서 이장하시던 시절 향우회에서 모금하여 지었다. 농번기 당번제에 마을 공동급식을 하고 있다. 마을은 단합이 잘되고, 울력도 잘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30여년 전에 마을 뒤 작은 샛골에 있는 밭과 논의 지층을 조사한다하여 도자기 제작 전문 업체인 행남사에서 채굴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지층에서 백토가 채취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조리 형국이기 때문에 안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고 밖으로 나가야 성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밖에 나가서 성공한 기업인과 관료들이 많다. 한 성씨가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이 아닌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서로 협동과 양보를 통해 서로 얼굴 붉힘이 없이 어느 마을보다도 화목하고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상부상조의 전통인 ‘품앗이’를 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김기운 선생의 공적비를 설치하면 좋겠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덕암은 참외가 유명했다. 백제약국은 일본인이 하다가 45년부터 이어받아서 했다.
기타사항
오래 전에 마을 뒤에서 묘를 발굴한 적이 있었다. 묘를 파보니 장수황씨 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이 터가 장수황씨들 터여서 황씨들이 알면 터를 가져가 버릴까봐 쉬쉬하고 시신을 소문내지 않고 공동뫼에다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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