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倉里는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른다. 사동이라는 이름도 조선시대 곡물 저장 창고인 사창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의령 옥씨 옥세진(자-사빈, 호-미로, 1722-1800)이다. 그는 역도 토벌의 공로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은 옥문곤(자-화백, 호-미운, 1705-1777)의 아들로 안동 길성에서 세거하였다. 세진은 30여권의 문집이 있을 정도로 영남학파의 뛰어난 학자였으며 주변의 기대와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영조임금이 아드님인 사도세자를 폐위하자 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려 왕의 미움을 사 유배를 당하였다.
처음 유배지는 아랫 마을인 초당산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내던 세진은 후일 이 마을로 옮겨 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생전에 유배가 풀리지 않아 갑신년(1764년)에 그의 아버지인 옥문곤과 자손이 옮겨 와 이곳에 살게 되었다. 후에 세진은 유배가 풀려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몽탄의 명산인 우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형이 소쿠리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뒤에는 우명산 칼바위와 돼지바위산이 있으며 옆에는 나부산이 자리하고 있다.
승달산의 맥을 이은 牛鳴山은 사창 삼거리 쪽으로 뻗어있는 맥이 소의 꼬리 부분이고 이 마을 쪽으로 나있는 부분이 소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가 영산강 쪽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는 산이다. 이 산은 풍수적으로 귀한 형상이어서 숱한 인물을 배출해낸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마을성씨
여러 성씨가 어우러져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다시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기룡동, 덕암까지 물이 들었었다. 그 당시에는 실장어를 많이 잡아 팔았다.
목포로 기차를 타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가마니에 지고 풋고추, 고구마 순 등을 팔았다. 기차로 광주에 가거나 목포 동부시장에 가서 팔았다.
옥반동 근처의 기차 경적소리가 들리면 사창역으로 뛰어나가서 기차를 타고는 했다. 사창역은 현재의 보건소 근처자리였다.
엄다, 함평장, 몽탄장 등을 이용했고 무안을 나갈때는 마을 뒷산을 통해 성암으로 나갔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앞에는 구보건소 자리가 있다. 현재는 사창마을로 이전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보건소 자리였던 회관 옆에 마을 샘이 있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200여년 된 감나무가 있다.
구슬나무는 벼락을 맞아 사라졌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입구에 가장골이 있다. 초분골로도 불려지는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가짜로 묘를 쓰고 후일 매장을 하는 곳이라 한다. 또한 이곳은 한국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봉산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장골잔등이라 하며 너머에 돼지 바위가 있다. 지금은 잡초가 우거져서 그 크기를 확인할 수 없는데 예전에는 넓기도 하고 높기도 해서 웬만한 심장으로는 오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소풍장소로도 쓰였으며 주변 마을의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마을 앞 제장대에는 몰뫼똥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의령옥씨 종족의 노래 - 옥치숙 지음
1. 아득한 세월 속에 역사는 흘러
선조의 발자취는 멀기만 한데
한핏줄로 얽힌 종족 의춘군 자손
면면히 이어받아 여기 이르니
우리씨족 정기는 무한하리라
2. 조상대대 물려받은 곧은 마음씨
티없는 구슬인양 맑고 고운데
여섯줄기 뻗은종파 의춘군 자손
서로도와 슬기롭게 꿈을 가꾸니
세세만년 이땅위에 영원하리라
사동마을회관 기념비
산자수명하여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렸던 곳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고려태조의 꿈여울 전설이
귓전에 쟁쟁하네
오랜 나날 바라고 바라던 쉼집을
우명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세웠으며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을 나누는 곳
옛 친구여 여기와서 쉬어가게
정처없는 나그네도 마음껏껏 쉬어가소
이세상 모든 사람들
여기와서 쉬어가소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오! 사직골 작은 마을
사동이여 영원하라
2006년 옥양호
유물, 유적
마을 입구 가장골에는 참판옥공신도비와 미로옥선생유허비 등 두기의 비석과 옥씨종족노래를 기록한 표지석이 있다. 신도비는 남원부사와 병조참판을 지낸 옥경련(자-덕후, 호-청강, 1829-1898)의 비이다, 1894년 갑오년에는 병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일로 진사동에서 거주하였다. 그의 호를 딴 문집 청강집이 남아있다. 미로선생유허비는 이 마을의 입향조인 옥세진의 비다.
마을에서 원사창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5기의 고인돌이 놓여있다. 세 기는 원래의 형태를 잘 유지한 채 밭에 놓여있고 두 기는 옆의 잡풀이 우거진 곳에 묻혀 있다. 또한 가장골에서 옥반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선돌이 놓여있다. 길이 195센티미터 폭 110센티미터의 크기인데 주민들의 말로는 초당산 마을입구 초르뫼에 있는 할매선돌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선돌은 영감선돌이라 한다. 마을 뒤에 의령옥씨 제각인 楊村齋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입구에 표지석과 세장비가 서 있으며 1990년에 세웠다.
마을분들은 양촌재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계셨다.
가장골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에 1985년에 세운 해은거사김우복숭모비가 서있다.
설화
마을에 동각할매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동각할매는 이름이 김대낭으로 1826년에 태어났는데 사창 마을로 개가를 왔다. 그런데 사창의 신랑댁에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그래도 참고 작은 부인으로 들어가 살아갔으나 갈수록 큰부인의 시기와 질투가 도를 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할매는 마을 아이들을 전부 아들과 딸로 생각해 용돈을 주기도 하고 학자금을 대주기도 하였다.
죽을 때는 후손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마을에 희사하면서 자기가 죽은날 제사 지내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동각 할매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동각이 있는 자리도 그 할매 소유의 땅이어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주민들은 고인의 뜻을 살려 해마다 칠월칠석 날이면 전 주민이 모여 동각 할매의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주민 단합대회를 연다고 한다.
서추자 할머님의 시아버지를 아들삼아 키워주셨기에 제사를 계속 지내고 있다. 현재 동각할매의 땅은 쓰레기장 인근 토지 하나 남았다고 한다.
동각할매 제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옥현진 대주교(옥만호장군이 당숙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홍역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어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그 곳이 초분골이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또한 장애자가 한명도 태어나지 않았고 범죄가 없는 마을이다. 주민들이 모두 근면하고 심성이 착해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의 지형도 소쿠리 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이 마을은 장수마을이다. 주민들은 장수의 요인을 마을 샘에서 찾았다. 물이 얼마나 좋았던지 예전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몰래 물을 떠가기도 해 물타러 가는 민속놀이가 전래 되기도 하였다. 해서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마을 샘은 마을회관 옆에 있는데 예전에는 그 주변에 구기자 나무가 많았다. 구기자는 하수오, 인삼과 함께 3대 명약으로 알려진 면역증강식품이다. 마을이 성할 때는 3대가 함께 사는 세대가 많았는데 그 집 며느리들이 저녁이면 몰래 구기자 나무를 파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왜냐하면 층층시하 노인들을 모시고 살면서 고통을 받아 노인들이 어서 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노인들이 장수하는 이유를 구기자 나무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탐방 자리에 함께 한 노인들은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하며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 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지만 아쉽게도 할아버지들은 그렇지 않다. 주민들 말대로 ‘깨 팔러 가신 분’들이 많다.
마을이 편리하게 조성되어 있다. 또한 빈집이 없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앞으로는 호남선 철도가 놓여 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이 마을 후손들은 대대로 학계와 문단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사창리 입구에 있는 호담우주항공전시관은 옆 마을 출신 전 공군참모총장 의령옥씨 옥만호 장군이 고향 사랑의 실천과 우리 공군의 발전과정을 소개하고, 후세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하여 2003년 무안군에 기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