艮己谷의 간기는 풍수지리에서 북동쪽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영산강에서 바라보았을 때 간기곡은 북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강거실 또는 간거실이라고도 부른다.
鳳棲洞(봉서동)은 봉황이 깃들어 있다는 마을이다.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이 마을의 뒷산이다. 이 산의 맥이 마을을 감싸고 영산강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내리는데 닭의 형국이다. 이를 봉황으로 본 것이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인 죽실을 먹으며 오동나무에 앉아 단샘물을 마신다는 상상의 새로 풍수비보에 많이 인용되는 새이다. 마을에는 대나무밭도 있다.
鷄棲(계서)등은 닭이 살고 있는 형국의 마을을 말한다. 마을 옆의 몽탄초등학교가 닭의 형상으로 운동장에서 길을 향해 튀어나온 부분은 예전에 높이가 있는 언덕이었다. 해서 이 언덕 주변을 계서등이라 한다. 옆에는 계룡동으로 부른다.
梧桐(오동)뫼는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을 말하는데 봉서동과 풍수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무안요가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며 대나무와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지금은 무안요 한가구만 있으나 한국전쟁 전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복합성씨의 마을로 이중 정착연대가 오래된 성씨를 보면 나주정씨 나주김씨 김해김씨 이천서씨 등이 있다. 이 성씨 중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오동뫼는 산위의 마당 바위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독배기, 병대산 또는 오동뫼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을 둘러싼 지명 중에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초등학교는 닭 파출소는 꾀꼬리 면사무소는 두꺼비 그리고 오동뫼는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박곡면 간기곡리 신기리 사천리 죽림리 묵방리 우적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사천리 죽림동 간기곡 매곡리 월천리 우적동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사천리 만복동 사천 봉서동 우적동 등으로 나온다.
문헌으로 살펴 본 이 마을 관련 지명의 유래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박곡면 간기곡만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박곡면 봉서동 간기곡리 등이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엔 박곡면 사천리 간기곡만 나오다 1987년의 자료엔 몽탄면 사천리 봉서동 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斜川里는 몽탄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만복동과 봉서동 앞으로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림동, 간기곡리, 매곡리, 월천, 우적동 등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만복동, 사내, 봉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봉서동과 만복동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농업인 위주의 봉서동과 상업인 위주의 만복동 간의 주민 구성원 차이로 인해 분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위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고속도로에 서 나는 소음이 심해 예전의 고요하고 아늑했던 마을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를 해 결하기 위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요시설
지금은 없어진 조그마한 시장이었지만 마을 앞이 장터인 적이 있었다. 1970년대 이전에 없어진 몽탄 시장은 두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 장이 들어선 것은 이 마을 앞이다. 예전에 마을 앞으로 냇가가 있었는데 그 냇가 주변으로 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후 철도 아래로 옮겼다가 없어진 것이다.
무안분청자기명장전시관이 무안요 옆으로 자리 잡고 있고 몽탄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은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곤바대와 오동뫼로 불리는 들이 있다. 곤바대는 방향을 나타내는 용어로 간기곡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이 들[野]은 만호(萬戶)가 살 수 있다는 들로 원래 구산리에 있는 몽탄중학교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정지의 땅 주인이 동의를 하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7월 7일이면 웃동네 제각에서 마을축제가 있어 왔다.
1월 20일에는 마을 총계가 있다.
유물, 유적
사천리 일대는 가마터가 많다. 윗 마을인 사내 마을에 확인된 것만 3기의 가마터가 있고 이 마을에도 두 기의 가마터가 있다. 무안요가 있는 오동뫼와 간기곡 뒤 골짜기에 흔적이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김옥수 분청사기 명장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행시출신의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이었던 서태종씨가 있다.
교육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대령 예편자도 있다.
거처/생가/묘소
이 마을에는 일본식 집이 한 채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30여 년 동안 몽탄면장을 역임 했던 정대현씨의 집이다. 해방 전에 건축을 시작하여 해방 후에 완성된 전형적인 일본식 집으로 기둥과 벽장이 모과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식 주택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근대문화 유산이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이었으며 지하실은 많은 사람들이 몸을 숨겼던 피난처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지하실이 메꾸어져 있다. 또한 집 앞에는 물이 잘 나오는 두레박 샘이 있었다. 주변 마을 주민들이 모두 사용했던 샘인데 현재는 없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간기곡 마을 입구는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때 탈출했던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던 자리이다.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은 1949년 9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죄수들 중 상당 부분이 제주 4·3 항쟁과 여순 항쟁에 관련된 사상범 들이었다. 당시 탈옥자 들은 일로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숲이 많은 이곳 사천리 일대에 숨어 있다가 잡힌 것이다. 당시의 경찰들은 현장에서 탈옥자들을 사살하고 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묻게 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인근 밭을 경작할 때 조금만 깊이 파면 많은 탈골한 사람의 뼈들이 나왔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정이 넘치는 향기로운 마을이다.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될 뿐 아니라 협조도 잘 이루어져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 중심에 동네며느리인 고안자회장이 있다. 새해에는 온 주민이 마을회관에 모여 75세 이상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대접하며 건강을 기원하기도 한다. 그날은 세배 돈을 받기도 하는데 그 돈을 모아서 마을 경비나 경로잔치에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마을에 비해 회관이 늘 깨끗하다. 주민들이 스스로 순번을 정해 청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고안자 여사가 2년전 돌아가시면서 이후 그 일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