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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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산2리 몽탄면 원구산마을 작성
  • 원구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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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호동, 원구산, 벽류동, 화쟁이
지명유래
九山 마을은 뒷산의 지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다. 뒷산이 구좌본(狗座本)의 형세로 개가 움크리고 있는 지형이다. ※ 마을에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산이라고 알고 계신 분도 있다. 虎洞은 마을 뒷산에 신선봉과 그 기슭에 범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어 부르게 된 지명이다. 화쟁이라는 지명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火井으로 쓰여진 지명이고 다른 하나는 貨停으로 쓰여진 것이다. 火井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貨停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 이 마을이 포구여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소금배는 물론이고 각종 생선을 실은 배들이 들락거렸으며 기와공장이 번성할 때는 기와들을 싣고 제주도까지 갔던 곳이다. ※개발위원장님은 마을 이름이 정확히 ‘화장포’라고 기억하고 계셨다. 마을 이름이 화쟁이라고 잘못 불리워지고 있다고 하신다.
마을형성(입향조)
호동의 입향조는 장흥고씨 고광수인데 족보를 볼 수 없어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공은 담양 창평에서 세거하였는데 임란 때 옆 마을 이산리 당촌으로 피난하여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입향조가 3형제를 두었는데 3형제가 전부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세 그루의 정자나무를 호동과 원구산 벽류동에 각각 심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호동에 두 그루, 구산에 다섯 그루, 벽류동에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현재는 호동에 한그루 구산에 세 그루 벽류동에 두 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구산마을은 처음엔 방씨가 거주하였지만 그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고 장씨들의 입향조 묘가 있는 벽류동 위 시래동에서 방씨의 유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최씨 고씨 윤씨가 살았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현재는 인동 장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장씨들의 입향조는 張文周(자-斗佑, 호-湖巖, 1659-1748, 또 다른 장씨 관련 족보에는 張學魯(1674-1766. 初名-斗佑, 호-湖巖)로 나온다)이다. 공은 문곡 김수항에게서 공부를 하였으며 생원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이 사헌부장령(정4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흥 종가에 은거하였다. 그 후 조정에 의해 재 등용되었으나 노쇄를 이유로 사양하고 이 마을 벽류동 뒤 죽전 서당골에 정자를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하였다. 현재 그곳에 鏡湖齋라는 재각이 있다. 碧流洞은 물 때문에 형성된 지명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거대한 강이 있어 늘 푸른 물이 넘실거렸다고 한다. 이 강물은 대치리 한재 마을 앞까지 올라갔던 물인데 영산강이 막히면서 대치천이 대신하고 있다. 마을 뒤 산은 매봉산이다. ※ 현재 이장님은 벽류동이 하천을 따라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신다. ※ 화쟁이(화장포)는 이종순(경주 이씨, 1843년생) 150~160여년전 화장포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구좌본의 형국으로 마을 건너 건지봉 호랑이가 뒷산의 개를 노려보는 형국이다.
마을성씨
호동에는 장흥 고씨 분들이 많이 살았고, 화장포에는 경주 이씨 분들이 많이 살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현재 호동, 구산, 백유동, 화쟁이로 되어 있다. ※ 백유동은 벽류동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화쟁이는 화장포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마을 분들은 말씀하신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에는 현재 구산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석진면 벽류동리와 호암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柳谷리 石峴리 碧流동 九山동 虎동 등이 나온다. 이어 근래의 자료인 198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유곡 벽류동 호동이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현리 유곡 벽류동을 합하여 구산리라 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을 막기 전 어업을 하던 마을 분들이 많았다. 또한 화장포 등 포구가 활성화 되어 있었기에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한 보부장사들이 많이 오가던 마을이었다. 배가 많이 들었다고 한다. 화장포는 몽탄 기와의 수송로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몽탄 기와가 유명하여 6개가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은 몽탄과선교 넘어 축사 인근(사천리)이라고 한다. 이 근방은 목포에서 영산포로 가는 뱃길의 중간 기착점이었다. 2번의 밀물을 받아야 영산포에 들어가는데 첫 번째 밀물이 끝날 무렵이면 몽탄에 당도했다. 배들이 쉬어가야만 하는 장소였다. 철도가 생긴 이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어 인물이 많이 나왔다.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배와 비포장 산길이 전부였다. 점촌의 옹기쟁이들을 차별했던 다른 마을들과 달리 기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부유했기에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우러졌다.
주요시설
화장포는 소금배는 물론이고 각종 생선을 실은 배들이 들락거렸으며 기와공장이 번성할 때는 기와들을 싣고 제주도까지 갔던 곳이어서 화물이 배송되는 곳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호동은 통샘 구산은 윗샘과 아랫샘 그리고 벽류동에도 샘이 있다. 그중에서 호동의 통샘 물은 맛이 뛰어나고 수량이 많아 예전에는 ‘물타러 간다’는 놀이가 성행했던 샘이다.
전통식품/특산품
일제 강점기 때부터 생산했던 몽탄기와는 널리 알려진 몽탄의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의 옹기와 더불어 영산강의 수송로와 몽탄지역에서 나오는 질 좋은 점토를 이용한 향토 산업이었다. 기와공장은 이 마을에 6곳 유곡 마을에 3곳이 있었는데 현재는 한 곳도 없다. 이 기와는 경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유통되었다. 주민들은 주변에 나무가 없어 뱃길을 이용해 진도에서 나무를 실어다 화쟁이에 내려놓고 그곳에서 나무를 가져다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몽탄 기와는 사찰과 한옥에 대한 수요는 지속되었지만 슬레이트와 양철지붕이 나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70년대 후반–이장님 중학교시절) 영산강 숭어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개산이라 불렀던 신선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건너에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이 자리하고 있다.
동/식물
입향조가 3형제의 건강을 기원하며 심은 당산나무(호동, 구산, 벽류동)가 있다. 마을 전체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들을 구산들이라 하며 유곡마을로 가는 곳에 독다리가 있다. 몽탄중학교 옆을 불무동이라 하며 호동에서 학산으로 넘어가는 곳에 개동이라는 곳이 있었고 그 주변에 개바위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다. 또한 대치천에 있는 구산보가 있으며 석현리의 똘고개가 있다. 밤나뭇골[栗谷]과 북재 북잿등 그리고 밤나뭇골 옆에 불당이 있었다는 불당골과 벽류동에서 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비선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호동마을은 착한 당산할머니가 마을에 벌을 주지 않기로 하여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물타러 간다’는 놀이가 있었다는 것만 알고 계시다. 2023년 현재 이장님께서 새로운 마을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유물, 유적
구산 마을에 1909년(융희3년)에 세워진 장병옥 효자각과 벽류동에 장씨 문중의 제각인 경호재가 있다. 효자각은 두 개 공간으로 이루어졌는데 효자각과 1939년에 세워진 장경회효행비가 각각 있다. 효자각 안에는 효자 명정과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마을에 후손이 없어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우거지고 문이 떨어져 뒹굴고 있다. 호동 마을에는 1971년에 개교한 몽탄중학교와 구산 마을회관 앞에는 1980년에 세운 장정기선생 송덕비가 있다. ※ 최근의 도로 공사 도중 파손되었다고 한다.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1997년 호남선 복선화 공사 때 호동 마을 뒤 신선봉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사면부에서 고분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삼국시대 옹관묘 6기와 6-8세기 석곽묘와 석실묘1기씩 발굴하였다. 또한 철제대도와 철모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지배계층의 무덤이라고 추정하였다. (호동마을 고분군이라 부르심)
설화
어떤 주민은 구산 사람들이 잘 되려면 호랑이의 시야를 가려야 한다고 말한다. 실지로 구산들에 9개의 기와 공장이 들어섰을 때는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로 호랑이의 시야를 가려 주민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마을이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와공장이 없어지면서 연기가 사라지자 마을 남자들이 우환을 겪게 되고 마을의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장석진(1911 - ?)은 이 마을 출신으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19세로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사람이다. 무안읍에 그에 대한 공적비가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장종엽 이장님(장석진 면장의 조카)이 자신의 밭자리에 학교를 짓는 것을 허락하여 1971년 몽탄중학교가 생겼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도 피해를 봤는데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23명이 한꺼번에 처형 당하기도 했다. 인민군을 포함한 빨치산 세력들이 후퇴하면서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두 처형한 것이다. 당시 마을 주민인 장석진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처형시키려 하자 목포까지 가서 관련자들을 데려와 인민재판을 자청했다. 이 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구산2리 4개 마을 중 구산은 인물을 벽류동은 부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주민들이 적극적이고 협조적이어서 화합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호남선 복선화 공사가 마을 앞으로 진행되었다. 2023년 현재 만남의 길 4구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 뒷산에 영산강이 보이는 산책로를 연차적으로 조성 중이다.
주민요구사항
벽류동, 화장포(꽃화, 치장할 장)라는 이름을 정확한 이름이다. 이를 올바로 복원해서 사용해야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영산강을 막은 이후 당호리에는 1400평 정도씩 불하가 이루어졌었다.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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