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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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1리 몽탄면 남천마을 작성
  • 남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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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內里는 건지봉 안쪽에 해당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천이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건지봉에서 마을로 흐르고 있는 내[川]가 세 개가 있고 마을의 위치가 호동을 바라보는 남향이어서 남천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 마을의 입향조가 이천 서씨의 원적지인 남천을 그리워 해 이름을 그대로 지었다는 설이다. 경기도 이천은 고구려 때는 남천으로 불렸으며 고려 태조 때 이천으로 바뀌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이천서씨 서덕양 또는 서덕인 형제라 할 수 있다. 무안에 이천서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호조판서를 지낸 서숭로(1422-1481. 자-대수, 호-정암)가 들어왔을 때인 세조 때이다. 서숭로는 연징산 下 이른바 쥐꼬리명당이라 부르는 곳에서 터를 잡아 후학을 육성하며 일생을 보냈다. 후손들은 서의신 - 서윤좌 - 서덕양으로 이어지는데 서숭로의 손자인 윤좌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에서 덕양(1529-1582. 자-사익, 호-신암)은 한재 마을로 가고, 덕인(1532-1593. 자-인중, 호-포암)은 이곳 남천 마을에 들어와 거처를 잡았다. 하지만 두 마을에 덕양 덕인의 후손들이 섞여 있어 딱히 누가 이 마을의 입향조라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도 남천이라 나온다. 이후 1600년대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광산김씨 김향락이란 사람이 1600년대 초에 광산군 평창동에서 마을 뒤에 있는 이곳 탑골에 이주하여 정착한 것이다. 지금은 탑골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근에서는 기와조각이나 벽돌 뿐 아니라 생활도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마을 앞 대치천 건너에 있는 조박동은 조씨와 박씨가 살았던 터로 상당히 드세었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남천은 내리1리에 속하는 마을로 서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석진면 화산리 연화촌 남천리 마산리 탑동리 양동리 등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화산동 남천리 마산리 연화촌 양동 등이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내리 양동 화산동 남천리 마산리 연화촌으로 표기되었다. 이후 1987년에는 무안군 몽탄면 내리 남천 화산 마산 양동으로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대치천에는 농사를 짓기 위한 보(堡)가 많았다. 새앙보와 삼전보 구래보 누룩댕잇보 그리고 오매깃보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오매깃보가 가장 컸었는데 그 보의 물로 농사를 짓는 들을 오매깃들이라 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 뒤에 구남샘이 있다. 구남매를 낳은 샘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지로 샘 아래에 구남매를 낳은 집이 있었다. 해서 아들을 낳고 싶거나 출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부러 이 마을 구남샘을 찾아오기도 했다. 마을에 남광교회가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호국사가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대치천을 건너서 화산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연징산을 마주 보고 있다. 마을 뒤 남천저수지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골짜기가 있다. 살펴보면 탑골을 지나 중살골, 절골, 큰골, 문안골 등이 있다. 탑골은 탑이 있었던 자리이며 중살골은 중이 죽으면 화장을 했던 곳이라 한다. 또한 절골은 절이 있었던 터이다. 몇 년 전에 절골에서는 밭을 경작하던 사람이 경운기로 밭을 파다가 범종을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문안골은 골짜기 입구에 바위가 문처럼 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어 바위 안 골짜기라 해서 부른 이름이다. 또한 호랑이 바위 상여바위 용바위, 농바위 등도 있다. 특히 도적골이 있는데 그곳에다 묘를 쓰기만 하면 시신을 도둑맞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호국사가 있는 골짜기를 홍역골이라 부른다. 예전 마을에 홍역이 들어서 아이들이 죽으면 그 골짜기에다 초분을 쓰거나 항아리에 넣어 버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곳에는 귀신이 많이 떠돌고 있다고 믿고 있다. 호국사 뒤에 부처님 입상을 모셨는데 그 산을 벼락산이라 부른다. 홍역골의 서쪽에는 다리안골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년의 당산제는 온 마을 주민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정월 보름이면 처음 뒷매의 단에서 시작하여 마을 앞에 있는 도주입석 주변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회의에서 祭主를 뽑아 제를 모시게 하는데 제주로 뽑히면 제를 지내는 일정한 기간 동안 부정한 것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말아야 하며 비린 것도 먹지 않아야 했다. 특히 일주일 전부터는 금식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음식물을 섭취하면 변소에 가야했기 때문에 이마저도 부정 탄다고 억제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샘굿 거리굿 등을 함께 한다. 이 마을에서도 당산제를 지내면서 ‘물타러 간다’는 행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탑골 옆에 있는 절골에는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상당부분 있었다고 한다. 커다란 연지방아 밑독이라든가 샘이나 지명 등은 큰절이 있었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 마을 앞에 도주할매석이 남아 있다. 마을에서 모시는 당산입석으로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 그리고 전염병 등 재앙의 방지를 기원하는 제사를 매년 정월 보름에 지냈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 개가 늘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두 개만 들 가운데 서 있다. 그중 한 개는 마을 앞 동각 옆에 있는데 조그만 크기다. 하지만 마을 오른쪽에 있는 할매석은 길이가 1미터 30센티에 달하는 크기이나 현재는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 앞 해정이라 부르는 곳에 고인돌 동산이 있었다. 서기채씨의 묘 위에 있는데 인위적으로 꾸민 동산이 아니라 6기의 고인돌이 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왼쪽 청룡등엔 이천서씨 재각인 4칸 팔작지붕의 友恭齋가 있다. 언제 짓고 중수했는지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는 1991년 신미년에 세운 열부무안박씨기행비가 있다. 시집온지 얼마만에 홀로 되어 시부모를 모시고 유복자를 훌륭하게 키운 열녀행을 기록하고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의하면 마을 남쪽의 저수지와 마을 사이의 구릉상에 남천유물산포지가 있었다. 현재는 민묘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옹관편 등이다.
설화
탑골엔 약수가 나오는데 그 물맛이 좋아 예전부터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주민 중 한사람이 약수터 부근에서 개를 잡은 후부터는 예전의 신비로운 기운을 잃어버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석회공장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데 마을에 돌이 많아서 세워졌던 공장이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