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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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1리 몽탄면 인평마을 작성
  • 인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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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茶山里는 본래는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연징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산에 차나무가 많이 있어 다산이라 하였다. 仁坪이란 마을이름의 유래는 입향조인 최인흘(崔仁屹. 1591-1649. 자-士立)의 仁자와 마을 앞의 넓은 들을 나타내는 坪을 따서 仁坪이라 부른데서 비롯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인 최인흘(崔仁屹. 1591-1649. 자-士立)이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 때로 나주 다시에서 일로의 감돈리로 갔다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홀로 된 공은 당숙을 따라 다니다 이 마을에 정착하여 아버지인 최진(1560-1593. 자-문중)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겼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뒷뫼[後山]를 주산으로 하고 잉어산을 안산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도마뱀 형국으로 일제강점기 때 마을 앞으로 철도가 지나가자 어른들은 좋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마뱀은 꼬리를 잘라주면 더욱 많은 성장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지방도로가 마을의 뒤를, 앞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어 풍수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형태가 아니지만 길이 나기 전의 마을의 모습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한국적 마을 구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몽탄면이 석진면과 박곡면으로 분리되었을 당시에는 이 마을 주변에 석진면사무소, 주재소, 간이학교인 유신학원이 있었을 정도로 지리적으로 길지였다. 주민들은 지금도 면사무소가 있었던 자리를 사무실터라고 한다.
마을성씨
수성 최씨의 집성촌이다. 2~3분 정도만 타성이고 여전히 수성 최씨 집성촌이 유지되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龍山리 茶山리 上茶山리 仁坪리 新坪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茶山동 龍山리 局동 仁坪동이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다산리 인평 다산 용뫼 등이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인평동 용산리의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32년 박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자녀들을 가르치느라 논, 밭을 팔아가며 지원하여 많은 자녀들이 성공하였다. 하지만 자녀들을 지원하느라 마을 분들의 부는 누적되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몽탄장을 이용하거나 무안장을 다녔는데 비선재와 철소재길을 넘어 다녔다. 무안장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소 구루마를 운영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주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짐을 운송비를 받고 실어주었다. 마을 바로 앞으로 철길이 있어 사고가 많았다.
주요시설
마을에 조선시대 5일장인 공수장이 있었다. 잉어산 끝 부분으로 현재 철도하고 맞닿은 곳에 장이 섰었는데 이 장이 공수장이다. 그곳은 일로 삼향 목포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주민들은 그 주변을 장너머 장등재라 불렀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농사짓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만든 농계(農契)가 있어 주민 소득 향상과 마을의 화목을 위해 노력하였다. 농계는 마을의 남자 어르신들이 돌아가면서 집에서 준비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회포를 푸는 모임이었다. 지금은 하지 않는다.
공동이용시설
장터에서 한양 가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큰샘이 있다. 한양 가는 길손들도 먹고 전 주민들이 먹었던 샘이다.마을 위쪽에 있는 샘은 4도 정도여서 농업수로 사용하고 아래는 1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여 식수로 사용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닭삯골과 마을에서 학산으로 넘어가는 재를 말하는 공수골재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뱀 형국의 빈사등, 골짜기인 웃골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작년까지 설날이 되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합동세배를 하는 특이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민의 숫자가 줄어들고 역귀성이 늘다보니 자연스레 풍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유물, 유적
수성 최씨의 사당인 永思齋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양각된 8개의 주련(柱聯 - 사찰이나 사당, 전통 가옥에서 법문이나 좋은 글귀를 나무판에 새겨 기둥에 붙이는 것인데, 시구를 연(連)하여 건다는 뜻에서 주련(柱聯)이라 부른다.)이 걸려 있으며 안에는 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영사재로 가는 입구에 세 개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1946년에 세운 ‘효자최공기실비’이며 나머지 두 개는 1979년에 세운 ‘열부이천서씨기적비’와 ‘눌당최병재박사추모비’이다. 마을 앞에는 잉어를 닮았다 하여 ‘잉어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으며 그 줄기인 공수동(옹기를 구워서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부르는 곳에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1991년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굴한 인평고분군인데, 여기에서는 청동기시대 수혈주거지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토광묘, 옹관묘, 석곽묘, 석실묘 등 총 19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민묘 1기가 확인되어 고분군 일대가 선사시대 이래로 생활유구와 분묘들이 혼재된 채 지속적으로 이용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지표조사 당시에도 능선 전체가 고분군으로 추정되던 분묘 밀집 지역이었다. 잉어산에는 독[石]들이 많이 있다. 주민들은 이 독이 잉어비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여 귀히 여겼다고 한다. 인평 마을은 영산강 주변 마을로서 인근 차뫼 마을의 지석묘군과 이 마을의 고분군들과 합쳐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주거지 중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뒷산인 서당뫼 줄기가 길과 면해 있는 경사진 곳에는 석곽분묘로 추정되는 석실이 있다 하여 확인하려고 했으나 잡초가 우거져 있어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쪽의 지점이 ‘굴등’이라 부른다는 것과 석곽으로 생각되는 큰 돌이 마을회관 앞과 큰샘으로 부르는 석간수의 샘 틀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회관 앞의 큰 돌은 길이가 170 × 130㎝의 크기이며 두께는 25㎝이다. 특이한 것은 표면에 사각형으로 돌출이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석실의 문이나 석곽을 닫는데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으로 보인다. 자칫 고인돌로 여길 수 있으나 주민들은 ‘미영시독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독 위에 십여 개의 홈이 파였는데 목화 기름을 짤 때 씨를 넣고 압착하여 기름을 내서 불을 켜는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 돌 위에서 돼지를 잡는 등 마을 행사 때 요긴하게 쓰는 돌이라고 한다.
설화
주민들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기 전 마을 뒷산인 서당뫼 너머 연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사람이 빨리 달려가거나 자리에서 뛰면 텅텅 소리가 난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고속도로가 나면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효자최공기실비’의 주인공인 최윤삼과 그의 아버지 최찬모의 행적은 이 지역이 동학 농민 봉기 때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아버지인 최찬모가 동학혁명 때 동학운동을 하다가 관군에게 잡혀 잉어산에서 화형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아들인 최윤삼이 불 속으로 뛰어 들어 아버지 대신 죽으러 한 일이 있었다. 최윤삼은 이때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관군은 아들의 효성에 감복하여 아버지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비는 지역의 유림들이 의견을 모아 아들 최윤삼의 효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원래는 효자각으로 세웠으나 관리의 부실로 현재는 비각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 있다. 동학에 관련된 사항을 더 알고 싶어 마을 노인을 찾았으나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또한 추모비에 나오는 최병재 박사는 당대 최고의 내과 전문의로서 국내에서 제일 가는 의사로 이름이 높았다. 같은 집안 형제인 마취과 전문의 최병조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의료계에 큰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명성을 쌓아 집안의 자랑 뿐 아니라 지역의 자랑이 된 사람들이다. 이는 주민의 자랑대로 마을 뒷산인 서당산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여겨지며 다른 마을보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최병조 박사의 사모님 역시 마을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쳐 마을 분들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60년대 70년대 4H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잘 살아 보세’라는 운동이 본격화 되었을 때 이 마을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그 운동을 받아들여 전 주민이 호응 속에 주민 소득을 올리고 마을을 가꾸어 나갔다. 해서 1960년대 어느 해인가 4H 품평회에서 전국적으로 상위권에 입상하여 마을의 위상을 한껏 높인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4H 문패가 걸려 있으며 마을 노래도 남아 있다. 소 막[牛舍]에서 만난 할머니가 부르는 당시의 마을노래는 그때의 열정을 말해주고 있다. 한 할머니 뱃속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끈끈한 관계로 모두가 한 식구 같이 살고 있다. 따라서 분위기가 너무 좋고 모든 마을일을 내 일처럼 하고 있다. 또한 이주해 오신 분들도 인평에 온 것이 너무 다행이라며 자랑하기도 한다. 마을 주민들 모두 복 받은 마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여름이면 매주 음식나눔을 한다. 회관 냉장고는 항상 자녀들이 보내주는 음식들로 가득차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25~6년전 마을 앞 도로가 직선화 되면서 인평공원도 생기고 마을 앞길로 차들이 다니지 않아 안전해졌다. 2021년부터 진행된 취약지구 구조개선사업을 통해 골목이 확장되고 마을 담장이 개선되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학산 마을에 거주하는 최씨들은 인평에서 퍼져나간 분들이다. 현경지역이 예전에는 개간이 안된 야산지역이었다. 그래서 그 쪽의 박씨들이 많이 결혼해서 왔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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