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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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3리 몽탄면 용뫼마을 작성
  • 용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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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茶山里는 본래는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연징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산에 차나무가 많이 있어 다산이라 하였다. 용뫼라는 마을 이름은 뒷산인 용산에서 유래하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신 분은 김규(자-사암, 호-동강. 1633-1700. 김적의 후손)이다. 공은 사창 마을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 원래 이 마을은 이천서씨(함평 엄다 거주)들 터였으나 동강공이 들어오면서 나주김씨들 터가 되었다. 후에 김종해(자-정언, 호-죽헌. 1794-1841. 김원의 후손)가 들어왔다. 주민들은 마을을 못자리 터라 말한다. 이 마을에서 많은 나주김씨들이 분가해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옆 마을인 차뫼 마을도 이 마을에서 분가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나주 김씨는 청천리에 자리잡았고 그곳에서 원사창으로 넘어왔다고 하신다. 본디 이천 서씨 분들이 계셨으나 나주 김씨들이 들어오면서 양보하고 나갔다고 한다. 마을의 나주 김씨 분들은 국동파와 동각파로 나뉘어 진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우뚝 솟은 옥녀봉의 맥을 이어받은 용산을 뒤로 하고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갈마음수(渴馬飮水-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의 앞산을 갖고 있다. 용산은 무안의 제2봉인 연징산을 거쳐 옥녀봉의 맥을 잇고 있다. 대체로 와우형의 소쿠리 형국이다. 이 지형은 밥은 먹고 살 수는 있어도 큰 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형국이다. 왜냐하면 차면 넘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잘 되었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나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현재는 타성 귀촌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龍山리 茶山리 上茶山리 仁坪리 新坪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茶山동 龍山리 局동 仁坪동이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다산리 인평 다산 용뫼 등이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인평동 용산리의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32년 박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구한말 중요한 통로였다. 주민의 말대로 경술국치 이전의 국도1호선이 차뫼 용뫼 비선대 국동 성암 무안으로 연결되어 지나갔기 때문이다. 즉 나주 동강사람이나 일로 삼향등지의 사람이 무안을 거쳐 한양을 갈 때 지나갔던 길이다. 해서 구한말 시기에는 일본군 부대가 이 마을에 주둔하기도 했다. 현경면에서 쌀밥을 먹기 위해 용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예전 명산에 뻘이 넓었을 때는 조개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쌀이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 바닥에 구멍을 파서 쌀 숨기는 독을 묻기도 했다. 무재봉 정상에서 정월 대보름에 나무를 베어다 불을 태우기도 했다. 근처를 가보면 여전히 숯이 남아 있다고 한다.
주요시설
당시 이 마을을 포함한 사창 마을은 영산강변에 주둔하는 일본군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현재 사창교회가 있는 자리는 유치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이 김용희(김공형 조부)씨 집을 포함한 주변에 거주하였는데 김용희 공이 일본군과의 통역과정에서 당시 무안 주변에서 활약하던 의병들을 상당수 구제했다고 한다. 그때 대표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김용길 의병장이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 앞 동각 근처에는 말의 먹이통에 해당되는 줄샘이라는 큰 방죽이 있었으나 오래 전 경지정리를 하면서 메워졌다.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와 있으나 수질검사를 통과한 깨끗한 마을물을 이용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는 800번 버스의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길 건너에는 간척으로 인한 널따란 농지가 조성되어 있다. 연징산 무재봉에 차밭이 많았다. 우명산 인근에서 86년 산사태가 발생했고 그 속에서 조개총이 나왔다. 지금도 조개껍데기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인근 논을 깊게 파보면 간척지 뻘이 나오기도 한다.
동/식물
마을 앞 동각은 나그네의 쉼터로 유명하다. 주민들보다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팽나무 2그루 주염나무 1그루 등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원래는 구수나무 1그루가 더 있어 사방의 균형이 맞았으나 몇 년 전에 고사되어 지금은 없다. 예전에 주민 중 한 사람이 구수나무를 잘라 쟁기 용구로 사용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앞산은 말 형국으로 안장등이란 지명이 있으며 말방울에 해당하는 두 개의 커다란 고인돌이 현재 이천서씨 제각 주변에 있었으나 도로가 나면서 묻혀버렸다. 또한 이 마을 나주김씨의 宗家에 3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1개만 남아있다. 고인돌의 일부는 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발파시켜 매립하였다. 고인돌 밑의 유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해 갔다. 마을에 나주정씨열부각을 비롯하여 성전김기린기행비와 용전김순형숭모비가 있다. 1947년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된 열부각은 마을 앞 길 가에 서 있다. 관리가 되지 않아 여각 안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으며 흙담이나 문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왜 이렇게 관리가 되자 않고 있나?’라고 묻자 ‘후손이 이곳에 살지 않아 그렇다’고 대답한다. 정려 안에는 ‘열부나주김용건처나주정씨지려’라는 명정과 오상열이 1947년에 찬한 ‘열부정씨건려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을 옆에 있는 제각은 이천서씨 제각으로 1940년에 건축한 3칸 팔작지붕의 영사재이다. 비선재에 면과정이 있으며 인근 마을인 원사창에 우산사가 있다. 두 곳 모두 나주 김씨 제각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잘 모아두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집집마다 공무원들이 많아 돈을 빌리러 용뫼로 사람들이 오기도 했다. 마을이 교통이 좋아 빈집이 귀농, 귀촌인 들로 금방 채워진다. 귀농, 귀촌한 사람들이 마을 분들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회관이 없는 유일한 마을이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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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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