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谷 마을은 달산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로 쇳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마을 주민 중 한사람이 지명 때문에 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980년대 하천정비 사업 때 별도로 금맥을 찾는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사기죄로 구속당한 일도 있었다.
사기점은 한때 100여 호가 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기를 구웠다 해서 사기점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사기 조각들이 마을 주변에 많이 보이며 마을 뒤 대밭엔 당시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4기의 고인돌이 죽 늘어서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또한 송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 앞에 수령 300년이 넘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불려진 이름이나 현재 소나무는 없다. 30여년 전에 마을 뒤에서 석산개발이 이뤄졌으나 도중에 주민들의 반대가 워낙 거세 개발이 중단되기도 했다.
月迎亭은 달맞이를 하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달산2리의 주된 마을이다. 골짜기가 깊어 해가 일찍 지고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달빛이 머무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산은 무안의 4대명산 중 하나인 봉정산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18호가 살았었다.
迎春洞은 봄맞이 하는 마을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永春洞으로도 쓰여졌다. 永春洞은 봄이 길고 여름이 짧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뱅이’라고도 부르나 지명의 유래는 모르고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사기점 마을 북쪽에 위치하며 마을 뒤로 승달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고 봉정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로 법천사의 연자담 고승이 迎春洞이라 이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밀양손씨와 전주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전주이씨의 입향조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이 서(자-사성, 호-월은. 1629-1705)공이다. 공은 1689년 기사환국을 피하여 형인 이 백(자-여장, 호-석촌. 1625-1703)공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자리를 잡았다. 이 백공은 귀학리 적동 마을에 터를 잡았고 공은 달산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손씨의 입향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 손씨의 고총들이 많아 이씨들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유래지에는 ‘충남에서 거주하던 밀양박씨 박종일이 모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약초를 구하던 중 이곳까지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 300년 전 이 땅에 정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지로 달산1리의 화정마을과 이 마을을 포함하여 산 너머 청계면 월선리에도 같은 선조의 밀양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52호에 26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에 본가가 없이 여러 사정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이로면에 속해있다 1950년경 석곡면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빈촌이었다. 마을 앞에는 있는 농경지는 대부분 죽산 마을 한양조씨들의 소유였다. 오죽하면 이 마을 출신 여자들이 “쌀 서 말을 먹고 시집을 가면 잘 사는 집안의 여자였다‘고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해서 딸을 낳으면 ’애기담살이‘를 보냈고 아들을 낳으면 ’머슴‘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무안군에서 가장 많은 소를 키우는 마을이 되었고 축산을 하는 주민도 20명이나 되어 무안군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앞길은 목포 해남 등 남부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해서 마을 아래인 화정에서 구릿재까지 주막만 해도 10여개가 넘게 있었다. 구릿재는 고개의 길이가 옛날 집에서 베틀로 명주를 짤 때 씨실이 되는 명주실의 꾸리를 풀어놓은 길이만큼이나 아주 긴 고개여서 ‘꾸릿재’라 부르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이 고개를 꾸릿재라 부르지 공식 지명처럼 구릿재라 말하는 이는 없다. 구릿재는 험하기도 해서 마을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이곳에서 사람 괴롭히지 말고 꾸릿재에 가서 칼 들고 서 있어라’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 한양조씨(죽전)와 이천서씨(노송정)들이 영춘동 사람들을 하대하며 ”웃고랑 놈들하고 어울리지말라“고 말하고는 했다.
마을은 빈촌이었다. 숯을 캐서 팔기도 하였다. 어머니들은 일로로 새벽별이 뜨면 나섰고, 아버지들은 목포 이로시장까지 가서 나무장사를 했다. 형편이 어려워 교육도 못시키고 고등학교 보내기도 어려웠다. 인근 양반촌에서는 남자를 낳으면 머슴이 태어났다고 했었다. 쌀이 없어 서숙(조)을 많이 먹었다.
40여년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축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그 성공을 따라 많은 이들이 축산업을 하고 있고 몽탄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 길은 한양으로 가는 큰 길이 었다.
12년전 무안군에서 처음으로 기계식 양파재배를 시작하였다.
주요시설
1930년경 수원지가 조성되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현재 축산업이 발달했다. 현재 소 1400두가 넘는 규모이다.어린시절 집집마다 손두부를 했었다.
한때 느타리 버섯을 6농가가 운영하기도 하였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승달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남창천이 흐르고 있다. 승달산은 무안 제일의 산으로 유구한 역사의 법천사와 목우암을 안고 있으며 풍수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남창천은 구릿재에서 발원하여 일로 감돈리를 지나 자방포를 거쳐서 영산강으로 흘러가는데 무안에서 제일 긴 하천이다. 처음에는 화정천이라고도 불렸는데 얼마 전에 현재의 지명인 남창천으로 바뀌어졌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금곡 마을 위에 왓등이라는 지명이 있다. 왓등은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법천사를 세울 때 그곳에서 기와를 구워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그때 왓등에서 깃대봉을 지나 법천사까지 스님들이 일렬로 서서 기와를 날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천사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사기점에는 잿등이라는 지명이 있다. 가마에 불을 때고 남은 재를 이곳에 버렸다는 곳이다.
전해지는 지명으로 사기점 앞에 구수둠벙 뒤에는 불당골 옆에는 애갯재가 있다. 불당골 너머에는 약곡리가 있으며 애갯재 너머에는 귀학리가 있다. 송가골(늦은해) 동막동 구릿골 청수동 하룻재 호봉 깃대봉 큰홍골 작은홍골 매봉 여치둠벙 와우동 외갓골 솟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500년 넘는 팽나무에서 정월 대보름 제사를 지냈다. 농악도 활발했는데 다시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유물, 유적
꾸릿제에 무안현감 송덕비가 있었다.
사기점 인근 반경 1Km의 땅을 1m정도 파면 민요 도자기가 나온다.
설화
마을 뒤 깃대봉은 무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굴이 하나 있다. 주민들이 ‘도승굴’이라 부르는 데 그곳에는 사람들의 욕심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굴은 돌로 만들어져 마치 석곽묘처럼 보이는데 굴 천장의 조그만 구멍에서 하루에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굴에서 수행하는 처사가 욕심이 나 쌀을 더 나오게 하려고 그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많이 나올 줄 알았던 쌀은 나오지 않고 조금씩 나왔던 쌀마저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버려져 있는 굴인데 쌀이 나왔던 구멍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다. 주민들의 머리 속에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었다. 굴 옆에는 석축을 쌓아 만든 집터가 있다.
도선국사, 초의선사 등이 명당을 찾기 위해 왔으나 찾지 못했다.
금으로 된 바둑판으로 법천사 스님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꽹과리 박자를 배울 때 7박을 맞추는 노래로
“땅도 땅도 조선땅, 조선땅도 일본땅”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어린시절 의미도 모르고 불렀든 그 노래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슬픈 이야기라고 하신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짚으로 서까래(용마루)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다. 타지에 작업을 해주러 많이 다녔다.
목수들도 많았고, 풍로를 제작해 판매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성북구, 광명 등에서 구의원 도의원을 하신 분들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승달산의 맥을 이은 이 마을 주변에는 무덤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많은 무덤들이 있다. 유명인사들의 묘만 보더라도 문태고등학교 설립자의 묘, 전에 치안본부장을 했던 손달영씨묘, 강운태장관의 모친 묘, 김용무전대법관 부친의 묘, 김정길 전 법무장관의 묘 등이 있다. 또한 같은 묘자리에 몰래 쓴 묘도 많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깊숙한 골짜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온 피난지였다. 전쟁으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으나 목포형무소 사건으로 탈옥한 탈주범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많은 탈주자들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인들이 법천사 석장승을 훔쳐 배에 실으려는 것을 잡아서 다시 가져왔다.
마을에 지주는 없고 못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인민군에 휩쓸렸고 국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80년대 하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남창천을 정비하였는데 당시 밭으로 이용했던 마을 앞 농지가 대부분 논으로 변했다. 또한 그때 하천 바닥에서 양질의 점토를 발견하기도 해 사기점의 지명을 뒷받침 해주기도 했다. 기와를 구웠던 왓등 주변에서도 점토가 나왔다.
1937년 일제에 의해서 목포시민의 상수원으로 개발된 달산수원지는 신적동 동막동 마을을 없애고 건설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금곡 월영정 등 주변 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중 일부는 산 너머 청계면 청수동으로 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