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湖라는 지명의 유래는 마을을 이룬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 와서 붙여진 지명이란 것과 주변에 호수가 있어서 唐湖라 했다는 설이 있다.
葛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풍수지리에서 비롯된다. 이 마을의 형국을 보면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반도형으로 마치 길다란 통나무가 물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옛날 이름 있는 지관들이 조상을 모시는 명당을 찾기 위해 승달산을 타고 내려 와 터를 잡은 葛花浮水의 칡꽃명당이라 하여 葛山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는 갈산이란 지명이 좋지 않다하여 옥산으로 바꿨다가 다시 현재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龍山은 갈산 마을 아래에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는 땅골로 불렀다. 땅골은 땅 끝의 골짜기라는 의미로 용산에는 작은 땅골과 큰 땅골이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도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고작산의 한 맥이 영산강을 향해 뻗어있어 마치 龍의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잘못 알려졌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충주박씨 박창진이 나주 동강면에 살다가 처가인 이곳 갈산으로 이거 정착하였다’고 하나 이번 탐방에서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충주박씨 朴宗發(1735 - ?, 자-원보)은 입향조로 알려진 박창진의 아버지로서 나주 동강에서 살았다. 공은 가난이 극심하여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처가의 배려로 이 마을에 들어와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지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김해김씨다. 마을 곳곳에 김씨들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당시의 김해김씨가 아닌 다른 유파의 김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에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성씨는 충주박씨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청주한씨다. 청주한씨 입향조는 韓光伍(1744 - 1805, 자-문주)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 중기에 이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현재는 충주박씨나 청주한씨 두 성씨 모두 두 가구씩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지역의 지관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마을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마을의 주산인 고작산에서 보면 여러군데 좋은 터가 있어 보이는데 아직도 칡꽃명당의 혈처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성씨
박씨, 한씨, 김씨, 정씨, 임씨의 오합지졸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마을 주변에 널따란 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풍요로움과 광활함을 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부유하게 살았으나 영산강 둑이 막히면서 예전보다 훨씬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앞에 기본 전답이 있고 영산강에서 잡아들이는 수산물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어업으로 살았다. 개인 소규모로 뻘에서 조개도 잡고 하여 집하장에서 팔고는 했다. 함평장, 무안장 또는 행상으로 판매했다. 간척했을 때 1500평씩 배당받아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래서 윤택해졌다.
현재는 벼농사와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다.
버스는 하루에 2차례 오고 실제 생활권은 일로이다. 택시도 일로택시를 이용한다.
마을 사람들은 몽탄 남교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명산역을 이용해 도시로 학교를 다녔다.
주요시설
마을 뒤에는 당호저수지에서 일로읍 영화농장으로 연결되는 수로인 굴이 뚫려 있다. 공수굴은 당호저수지와 함께 소화 7년(1932년)에 만들었는데 그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唐湖’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지명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저수지를 중국 사람이 와서 막았다는 내용은 예견지명을 보는 것과 같다.
마을변화
예전에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일로의 산정동과 몽탄의 명산을 잇는 다산로가 지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고랑에 상샘이 있었는데 영산강을 막은 이후 없앴다.
버스정류장에도 샘물이 있었는데 사용하지 않게 되어 막았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은 영산강 간척으로 인한 널따란 들판이 있고 오른쪽엔 일로읍 복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우산과 개꿀재 주변의 고작산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사장재란 지명이 있다. 황우산을 마주 보고 있는 고작산의 한 부분인데 예전에 김해김씨들이 활을 쏘았던 곳이다. 당시 김씨들은 상당한 여유를 갖고 살았는데 황우산 정상에 유산각을 짓고 고작산에 표적판을 놓고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황우산 끝자락에 독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명산간척지와 마을 앞 간척지를 조성할 때 폭파를 시켜 독을 운반하여 사용했다. 독산에서부터 마을을 거쳐 명산까지 궤도를 설치하여 독을 날라다 쌓았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개꿀이 있다. 개꿀이라고도 부르는 이 굴은 일로 복용리와 몽탄 당호리를 잇는 길로써 일제강점기 때 철도가 나가는 도중에 재가 있어 굴을 팠는데 굴이 금방 꺼져버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진짜 굴이 아니라 거짓굴이라 해서 개꿀이라 한 것이다.
(이장님은 개꿀이 들어누워있는 개젖의 형상이라고 하심.)
마을 뒤를 메착골, 마을 오른쪽을 공수골이라 했으며 공수골 옆을 사장등 또는 사장재라 불렀다. 용산 마을회관 앞을 노루머리라 했는데 현재 수문이 있는 곳을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문화유적분포도를 보면 갈산동유물산포지가 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하는 구릉일대로 유적에서 동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영산강이 곡류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민묘와 밭으로 개간되고 있으며 발견된 유물은 구석기시대 몸돌이다.
설화
이 마을은 맞은편에 있는 일로읍 복용4리 양도 마을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 마을의 뒷산에 칡이 많이 있다 해서 갈산이라 했는데, 맞은 편 마을에는 칡넝쿨을 즐겨 먹는 염소 형국의 양도(羊島)라는 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이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관계여서 한 곳이 흥하면 다른 곳은 약해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지로 그렇게 느끼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웃기만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용산 마을은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의 고향이다. 나주임씨로 국회의원을 지낸 임종기씨와 보해양조를 세운 임광행씨이다.
임종기의 할아버지는 큰 부자여서 중선배가 있어 고기를 많이 잡고는 했다.
마을분들은 두 사람 모두 마을에 공헌한 것이 없이 일가가 모두 떠난 사람들이라고 하신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지는 않은데 적십자회비등 공용비용은 인원수대로 지불해야하니 불편함이 많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명산리 도산 마을에 곤재 정개청 선생의 묘가 있다. 왜 이곳에 곤재선생의 묘가 있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성 정씨 문중에 물었더니 곤재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실 때 ‘자기가 죽거들랑 묘 자리를 칡넝쿨이 세 발 이상 나 있는 곳에 써라’고 해서 이곳에 썼다는 것이다. 도산 마을에서 보면 마을 앞 당호리에 葛花浮水의 명당인 葛山이란 마을이 있어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이 여겨지나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