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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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산2리 일로읍 산두 작성
  • 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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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54세대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두수동(작은마을), 산두(큰마을)
지명유래
山頭는 의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인의산 들머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의 이름은 山後였다. 인의산을 중심으로 해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 의산1리인 인의산 마을이었다. 산두는 인의산 마을 뒤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실지로 이 마을의 입향조도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따르면 인의산 마을에서 이주한 청주한씨라 하였다. 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산의 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딱히 어느 성씨라고 말할 수 없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청주한씨가 인의산에서 처음 들어왔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김해김씨가 들어왔다 하여 김해김씨 대동보를 통한 확인을 시도했으나 찾지 못했다. 해서 주민들의 말처럼 청주한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등이 함께 어울려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장흥 고씨도 유입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꽃쟁이 능선을 사이로 두수동과 산두로 이루어졌으며 꽃재 또는 꽃쟁이라고 부르는 능선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해지안 들을 건너 인의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동산이 놓여 있다. 마을이 배 형국으로 밖에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따뜻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기운 때문에 이 마을의 농산물이나 축산물이 주변마을에 비해 훨씬 튼실하고 성장도 빠르다고 한다. 특히 주변 마을과 똑같이 소를 길러 평가해보면 10개월 후에는 50킬로의 무게 차이가 난다고 했다. 무안에는 4대 명당이 있다. 승달산의 호승예불, 몽탄 봉명리의 비봉귀소, 일로인의산의 매화낙지, 청계 월선리의 운중수월 명당으로 이곳 인의산은 매화낙지의혈처가 숨어 있다고 알려졌다. 인의산의 정상에는 매화꽃을 상징하는 돌들이 여기저기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인의산 주변을 지사들이 많이 찾아다녔다고 하며 일로자체를 매화낙지 형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또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와 1912년 그리고1917년의 자료에도 山後로 나왔다. 하지만 주민들이 ‘山後’라는 지명의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뒤’가 아닌 ‘들머리’의 의미인 산두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어려서부터 산두라 불렀다 하나 공식적인 자료에 산두라 나온 것은 1987년부터이다. 원래 소지 마을과 함께 의산2리에 속했으나 1987년 분리하여 소지는 의산6리가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밭농사는 고추와 배추를 농사짓고 배추는 절임배추로 팬매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간척사업 전에는 물이 들어와 벚굴이 나왔다. 동각 근처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되었고 벚굴 껍질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한다.
공동이용시설
풍수적인 이유로 예전에는 샘을 팔 수 없어 두수동에서 물을 갖다 먹었다. 이후풍수적 지형에 대한 의식이 약해지면서 지하수 개발이 본격화 되어 일로에서 가장 물이 많은 지역이 되었다. 두수동은 뱃머리라 했고 두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이곳에는 널리 알려진 샘이 있었다. 이번 마을 조사를 콩해 마을사람들은 두수머리, 뱃머리에대해서는 잘 안들어 본 말이라고 했다. 두수동마을 샘은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3~4미터 깊은 샘이었으나 현재는 포장해버리고 없다. 마을에 매화정 두수정 수문정 등 세 개의 정자와 한 개의 동각이 있다. 마을 길이 마치 도시계획에 의해서 조성된 것처럼 대단히 넓고 편리하게 갖춰져 있다. 주부들이 근면하고 검소하여 마을 주변의 쓰레기를 모아 팔아서 마을기금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경로잔치나 주민들의 복지에 기여하기도 한다. 해지안 들의 원둑에 있는 수문석은 매화정 앞에 놓여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仁義山은 높이 152m의 낮은 산이다. 병풍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간척지인 영화농장과 소포들 자방포들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무재봉에서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넓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정상에서 보는전망이 좋다. 산 능선에는 1.5km 길이의 등산로가 나있으며 산 동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탁 트인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다.
동/식물
산두 마을은 예전부터 꽃재 꽃쟁이라고 불렀다. 주민들 말로는 마을이 있는 능선 주변에 매화가 많이 피었었다고 한다. 해서 지명도 꽃쟁이라 하였으며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도 매화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꽃재는 정자가 있는 곳이고 꽃자매, 꽃잔등은 매화나무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 회화나무 당산이 있다. 회화나무 당산은 우리 지역에서는 일로 청금성 마을과 이 마을에만 있다. 둘레가 2미터 80정도 되는데 주민들에겐 각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추석 때는 이 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놓고 누가 멀리까지 올라가는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원래는 세 아름드리가 넘는 팽나무와 소나무 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회화나무 당산만 남아있다. 명절에(추석) 그네를 탔는데 그네시합은 누가 높이 올라가 풍경에 몇 번 닿았는지를 통해 시합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네터가 있던 자리에 그네터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400년된 팽나무도 있었는데 정월 14일 밤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날 뿐 아니라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해지안은 해지안 뜰에 샘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은 암놈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지안은 너무 시원해서 두드러기가 들어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모새길은 돈도리 가는 길에 방죽이 있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지금도 정월 보름이면 이 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풍물을 치고 샘굿 거리굿 등을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 나무 옆에 동각이 있으며 동각 자리에서는 패총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꽃잔등에서 귀신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일제강점기 때 마을에 기와공장이 있었으며 이웃인 무룡동 마을에는 일본인 신사 터가 있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교육열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인의산 주변의 농장들이 대부분 산두 사람들 소유였던 때도 있었다. 예전에는 소작농이 많았는데 200평에서 석섬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빈곤하게 사는 마을이었지만 자식농사가 남는다며 공부를 시켜 교육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마을에서는 뒤에 장지안(장짓등 안) 들과 앞에 해지안(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선이란 의미)들의 농지가 있어 비교적 여유롭게 살았다. 특히 주변에서 장지안의 쌀은 밥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이후 1925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마을 앞에 대규모 간척지인 영화농장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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