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5리는 인의산을 배경으로 덕치와 내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대부분내동에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원래는 인의산 마을과 한 행정구역이었으나 80년대 들어서 분리 되었다
지명유래
내동 마을은 인의산 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안들 또는 안골 마을이라 불렸다.1912년의 자료에 마을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조선조 말부터 형성된 마을로 여겨진다. 인의산을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에 나빗등이 있으며 나빗등 너머에는 노적봉이있다. 나빗등은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나비가 날아서 영산강에 있는 멍수바위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강물이 막혀 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 나빗등이 마을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빗등 끝머리에는 나빗머리(나붓머리)라는 둔덕이 있다. 나비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곳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나무가 훼손되거나 없어지면 마을에 큰 재앙이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마을인 덕치는 인의산의 맥을 이은 노적봉을 주산으로 하고 소포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원래 18가구가 살았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2가구만 살고 있다. 특히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일로에서 제일 부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호구총수에도 나오는 이 마을은 큰 불이 나서 주민들이 대부분 안들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해서 지금도 이 마을 주변을 파보면 숯이나 재 그리고 기와 조각 같은 것이 많이 나온다. 덕치는 6세대가 살고 있는데 예전에는 한집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는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이 덕으로서 주민을 다스리고 덕으로 이웃마을까지 교화한다 하여 덕치라 하였다. 또한 입향사실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선 선조 연간에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서로가 좋은 인심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에 김해김씨가 살고 있어 족보를 통해 입향조를 확인해 보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명당이 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던 곳이다. 인의산의 혈을 받은 매화낙지의 혈처를 이 마을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해서 이곳에 묘를 쓰려는 사람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 지금은 그 가옥들이 폐가가 되어 관리가 되고 있지 않지만 관심이 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신의 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영화농장과 소포들 그리고 자방포 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장엄하게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주산인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 주민들은 아직도 매화낙지의 혈이 어디로 뻗어나갔는지 모르고 있다. 영광군 법성포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인의산이 있다.
마을성씨
원래 이 마을엔 청주한씨가 살았다고 했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김해김씨가 주로 살고 있다. 100여년전에 무안박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 강변이 물반 고기반의 황금어장이었다. 숭어를 비롯한 대과이 장어 등이 지천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영산강이 막힐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해서 간척지를 분할 할 때 당국에서는 영산강에서 고기를 잡았던 가구에겐 두 배로 농지를 불하 해 주기도 하였다.
장어와 게, 대가니, 숭어(모치), 운저리가 많이 잡혔다. 대가니는 봄에 풋마늘에 무쳐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딴봉은 원래는 마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영산강을 개발하면서 흙을 파서 딴봉이 되어버렸다. 딴봉은 물이 들어올때도 육지였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 청년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의산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물이 없는데 이 마을에는 샘이 있었다. 새끼샘기라고 부르는 바위 틈 새에서 나오는 독샘이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있는 소포들은 소포선생이 덕치 마을에서 구정 마을까지 막은 둑이다. 소포는 주룡 마을의 입향조 나덕명(자-극지, 호-소포. 1551-1610년)으로 공이1589년 정여립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워 사면을 받자 나주로 귀향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청호리 주룡 마을에 부친을 모시고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 농지가 부족한 일로 주민들의 상황을 보고 사재를들여 구정리와 의산리 사이를 막아 농지를 형성한 것이다. 아쉽게도 주민들의 배고픔을 구원했던 소포공의 활동을 적은 공적비나 소포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석 같은 것들이 없어 안타까웠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무제봉에서의 기우제는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몸을 정갈히 하고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놓고 남자들만 지냈다고 한다. 제를 지내며 불을 피운다. 명산이어서 묘도 함부로 못쓰고 묘를 파서 형무소에 가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마을 앞에서 보는 멍수바우에는 모자간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엄마는 굴을 따러 가고 아들이 영암 주막에서 술을 먹고 오니 물이 들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들의 이름이 멍수라고 한다. 멍수는 구정리 사람이라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실지로 이 마을에서 별이 네개, 즉 두 사람의 소장 장군이 나오기도 해 별동네라 부르기도 하였다. 덕치 입구에 팻말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 앞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비롯한 빨치산들이 영암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마을 앞에 소댕이 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당시에 약간의 피해를 입긴했지만 사람이 다치는 등의 큰 피해는 없었다고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영산강 폐수처리장이 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이 마을 주민은 ‘인의산은 한자 仁義의 모양새를 닮았다’고 주장한다. 실지로 인의산 정상에서 살펴보면 인의산 마을을 중심으로 양맥이 펼쳐지고 있는데 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인의산을 둘러싸고 있는 6개 마을의 모습이 한자 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여년 전에는 인의산에 맷돼지가 살고 있어 농작물의 피해가 크기도 했다.예견지명이 있다. 마을 옆에 영산강 쪽으로 딴봉이라고 부르는 외딴 봉우리가있는데 원래는 인의산의 한 줄기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인의산이라 부르지 않고 딴봉이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연유를 몰랐다. 그러다 1990년대에 무안군에서 인의산과 이 봉우리의 맥을 끊어 폐수처리장을 세우면서 인의산과는 다른딴 봉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라고 한다.
간척지의 불하는 가구당 한필지를 불하하였고 배를 가진 사람에게는 두필지를 불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