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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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산4리 일로읍 도장포 작성
  • 도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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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0가구 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마을은 도촌 준매 초장골 호룡정 동쪽고샅 서쪽고샅 가운데고샅 등 7개 지역으로 이루어 졌다. 도촌은 마을회관 우측마을, 준매는 회관 맞은편 서북쪽 우측 위의 마을, 초장골은 삼거리, 호룡정은 마을회관 맞은편 큰동네쪽을 말한다. 고살은 골목이란 뜻인데 동쪽고살은 큰 마을로 샘위이다.
지명유래
道壯浦란 지명도 조선시대 중기 壯湖(호등 또는 호룡정이라고도 한다)와 道村이 둑으로 연결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둑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경지정리 바람이 불면서 둑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전주이씨 수춘군파 이득룡(1698-1782)이다. 공에 대한 기록은 전주이씨 대동보의 짤막한 기록 외에는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1650년경 전주이씨 이종우로 부친 이항을 따라 전북 남원에서 관동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전남 광산 평동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장호(또는 당살뫼)는 남자 형국이고 도촌은 여자 형국이어서 둘이 이어져야 마을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촌에는 대밭이 있어야 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야 마을이 흥 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속설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호룡정은 호랑이 형상의 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그 호랑이가 양지촌 마을의 주구산의 개를 쫓는 형국이다.
마을성씨
도장포는 죽산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장수 황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이후 전주이씨 수춘군 후손들이 망월리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전주이씨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도장포리로 나온다. 1912년에는 이로면 도장포동, 1917년에 이로면 죽산리 도장동으로 그리고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도장포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 때 일로에서 광암리 광암과 죽산리의 도장포만이 밥술을 뜨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이었다. 세 차례의 간척 덕분이다. 하지만 한때는 ‘밥 바구니에 나락을 담아서 되돌아 온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이 마을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이 나락을 수확하면서 들판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때 밥을 담았던 바구니에 주인 몰래 나락을 담아서 가져 온다는 말이다.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한 톨의 쌀이 귀한 때라 서로 모른 체 하며 넘어가던 때였다.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주 소득원으로는 쌀 농사이나 갓 재배를 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주요시설
농장은 일제 강점기 때 간이학교가 있었는데 해방 이후 죽산분교에 통합되었다. 도촌 마을 꼭대기에도 간이학교가 있었다. 도촌마을 꼭대기에는 상수리나무가 있고 이곳이 간이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초장골에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저수지 위쪽 둑에서 막걸리를 팔았다고 한다. 비석거리에도 주막집이 있었다. 마을에 정미소도 있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농지를 확보하였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이 마을 주민들과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 앞 바다인 장호를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두 번째는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이후 세 번째 간척사업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에게 마을 앞 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망월리 사양동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 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여호였는데 광복 후 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으며 ‘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 청년회가 있다. 청년회는 목포에 거주하는 마을 자녀들까지 와서 활성화 하고 있다. 복달임 행사와 동계를 실시하고 추석 전 청소를 한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의 지반이 바위여서 물이 귀해 집집마다 샘을 파놓고 지표수를 받아 생활하였다. 바닥에 바위가 있어 깊게 팔 수가 없는 얕은 샘이었다. 마을에는 세 군데의 공동샘이 있는데 도촌의 옹달샘과 마을 앞 당산나무 밑의 시남샘 그리고 길 가의 큰샘 등이다. 시남샘은 빨래를 했던 샘으로 지름이 3m, 깊이가 1m 70~80cm로 깊었다고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당살뫼 산 기슭에는 상당한 두께의 굴 껍질들이 발견되어 바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동/식물
마을 앞에는 둘레가 5미터 20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다. 200여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에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 제를 모시지 못하지만 주민들은 다시 당산제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당살뫼 앞에는 ‘새피네’라는 독특한 지명이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각종 그릇이나 가구 등을 버리는 곳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새피네에는 아이 낳은 태를 묻었던 자리도 있다고 조사되었다. 죽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초장골로 부른다. 삼거리에는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어 청호 주룡 나루와이어져 옛날에는 영암 사람들이 일로 장을 보러 다니는 큰길이었다. 이 삼거리에서주민들은 일로장을 가기 전 초벌로 장을 보아 초장골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때는 3곳의 가게가 있을 정도로 북적되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 주민들은 도장포 마을의 간척지 경작권을주장하며 일제에 소작료를 내지 않기 위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도장포의 선창은해발고도가 7m로 선박의 운항이 가능한 곳으로 조사되었다. 우측에 있는 밭은 일명'선창밭'이라고 하며 주막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한국전쟁 등 나라의 변란이 있을 때도 주민들 간의 갈등이 없어 피해가 없었다. 현재도 마을에 현안이 발생하면 이장을 중심으로 모든 주민들이나서서 해결하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도장포는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이다. 예전부터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벗어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화합과 단결이 잘 되었다. 또한 마을에서 혼자 사는노인들을 위하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생일상을 차려 노인공경의 본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喪을 당했을 때도 마을회관에서 거릿제를 지내 주민들간의 돈독한 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2005년도에는 이러한 주민들의 따뜻함이 널리알려져 훈훈하고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 구현에 기여한 마을로 한 언론사로부터 ‘좋은 이웃 밝은 동네’의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표정 또한 넉넉해 여유가 있으며 밝았다.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한 노인은 ‘천국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주부들의 음식솜씨도 좋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일로 어디를 가봐도 우리 마을만큼 맛과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고 자랑 한다. 서로를 위하고 감싸주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민들이 근면하고 검소해 생활은 짜임새가 있으며 윤기가 있어보였다. 전주이씨 동족 마을로 오랫동안 이어왔으면서도 위계를 통한 반목이나 불신의 틈이없어 보였다. 해서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사 오고 싶은 마을 1순위에 해당하기도 한다. 으뜸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마을을 정비하고 화단가꾸기 사업을 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일로장에서 삼거리까지 와서 장이 섰는데 곡식과 채소들을 팔았다. 영화정 앞에도 장이 섰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상 당했을 때 거릿제(노제)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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