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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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산6리 일로읍 삼천동 작성
  • 삼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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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25세대 3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35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집이 많이 뜯겨나갔다고 한다. 새로 이사온 집도 7가구 정되 된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삼천동 마을은 세 개의 한자 이름으로 쓰였다. 三天洞, 三千洞, 三泉洞이 그것으로 三天洞은 마을 이름으로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三千洞은 마을에 삼천가구가 살고 있다고 해서, 또는 앞으로 삼천 가구가 사는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三泉洞은 세 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즉 이 마을은 물이 귀한 곳인데 주민들이 사용하는 샘이 세 군데나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 것이다. 실지로 마을에는 마을 입구의 청수샘, 鳥寢이(朝雉尾) 샘, 그리고 현재 수로가 지나는 자리에 묻힌 샘 등 세 개의 샘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주민들은 100여년 전에 몽탄면 양장리에서 나주 정씨가, 죽산 마을에서 전주최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뒤에는 뒷 능선 또는 호암산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일본인 이름을붙인 미야끼[宮木]산과 알뫼산이 있다. 미야끼 산은 지금도 국유지로 되어있는데 한때는 이석호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운 적이 있었다. 알뫼산은 거북등 뒤에 있는 산으로 새 형국을 하고 있어 무덤에 석물을 쓸 수 없다고 한다. 실지로 오래 전에 신씨들이 이곳에 묘를 쓰면서 석물을 했다가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자 석물을 치워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신씨들과 관련된 묘나 석물은 없다. 알뫼산 주변에 여지동이 있다. 그곳은 황촌(黃村)이라고 부를 정도로 황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지금도 황씨들의 문중산이 있다. 청호리 망월리 죽산리의 대부분의 마을에서 황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보면 1987년의 자료에도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2008년도에 죽산마을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솔머리라 불렀으며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솔머리는 마을 입구를 말하며 지금은 없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로 벼농사를 한다.
주요시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정병일씨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마을의 왼쪽에 있는 조치미에는 유산각이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변화
삼천동 옆으로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신작로 길로 구루마(수레) 정도가 다니는 길이었다. 그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예전의 마을 이름인 솔머리[松頭村]가 있으며 그곳에는 막걸리를 빚는 술도가(술도게 - 양조장)가 있었다. 술도가는 오래 전에 도장포 마을 초장골로 옮겨졌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다. 봄에는 소풍을 가고 겨울에 동계를 한다. 청년회는 분구 전에 있었다.
공동이용시설
주민들이 사용하는 샘이 세 군데나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 것이다. 실지로 마을에는 마을 입구의 청수샘, 鳥寢이(朝雉尾) 샘, 그리고 현재 수로가 지나는 자리에 묻힌 샘 등 세 개의 샘이 있다. 묻힌샘은 수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자세히 보면 고인돌로 볼 수 있는 바윗등이라 부르는 거북등이 알뫼 산 앞 장목등에 있다. 크기는 길이 260센티미터 높이 155센티미터이다. 주민들은 그 바위 때문에 마을이 섬으로 부르지 않고 육지로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이 육지와 끊겨져 섬이 되었다가도 빠질때면 그 둑으로 길[路]이 만들어져 육지의 일부가 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 바윗등은 67년 한해(旱害) 때 없어질 뻔 했다. 왜냐하면 영산강 물을 끌어들여 농수로 사용하기 위한 수로를 계획하면서 바윗등 옆의 둔덕을 이용한 계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밑으로 수로가 나면서 보존될 수 있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조치미는 꿩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도 꿩들이 많이 날라와 농작물이 피해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조치미는 북향이라고 한다. 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길 건너 왼쪽에 위치해 있고 산 밑이다. 조치미에는 유산각이 있었는데 둠벙자리로 어르신들이 어렸을 적에는 멱을 감았던 장소라고 한다. 10여년전 태풍에 소실되어 다시 지어서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여지동의 황씨집성촌은 알뫼산 바로 밑에 위치하는데 삽으로 파면 기왓장과 재가 나왔다고 한다. 배를 댓던 곳으로 파시가 형성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삼천동에서 죽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할미재 또는 할미젖 고개라 한다. 주민들이 낮에도 쉽게 가지 못하는 조금은 무서워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각각 전설이 있다. 하나는 승달산 꾸리재에 살고 있던 할미 귀신이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이곳 죽산재에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 할미재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끼니를 연명하던 한 할미가 어느 겨울날 따뜻한 이곳 등성이를 찾아 몸을 쉬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그곳에서는 늘 물이 흘러내려 마치 할미젖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할미젖 고개라 하였다 한다. 현재 이 고개는 49호선 도로 때문에 할미재의 당산이 윗당산과 아랫 당산으로 나누어졌다.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무덤은 없어졌다. 비가오려고 하면 도깨비 불이 났는데 거북등 또는 할미재에서 생겼다. 낮잠을 자다가 도깨비한테 홀려서 돌아다니다 무명 옷이 헤어지도록 고생을 하고 사람살려 외치며 둠벙으로 끌고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분의 이야기는 돼지고기를 들고오면 도깨비가 욕심내서 맞아버리고 돼지고기를 뺏겼다고 이야기 해 주셨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의 모습이 여유롭고 밝아 보인다. 넉넉함이 있고 미래가 있어 보인다. 이장의 말대로 단결과 협조가 잘 이루어져 주민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자랑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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