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蓮洞은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윗마을인 적동(迪洞)은 임진왜란 당시 승달산에 있는 사찰이 불에 탄 후 사찰의 재건을 위해 신도들이 법천사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쉬어갔다 하여 적동이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귀래촌은 움푹 들어간 지형의 특성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 구레라 불러 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구레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귀래촌으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에서 발간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효희로 무오사화(1498년) 때 화를 피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
김해 김씨 뒤를 이어서 전주이씨가 들어왔다. 전주이씨의 입향조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이 백(자-여장, 호-석촌. 1625-1703)공이다. 공은 1689년 기사환국을 피하여 동생인 이 서(자-사성, 호-월은. 1629-1705)공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자리를 잡았다. 이 백공은 귀학리 적동 마을에 터를 잡았고 이서공은 애갯재 너머 달산리 영춘동에 터를 잡은 것이다.
연동은 이천 서씨 마을이다. 무안의 이천서씨 입향조는 쥐꼬리명당이라 부르는 곳에 있는 재각의 주인인 서숭로(1422- ?, 자-대수, 호-正巖)이다. 서숭로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큰 아들인 의손(호-연징, 1459-1534)이 이 마을에 정착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귀래촌은 움푹 들어간 지형의 특성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 구레라 불러 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풍수적으로 소의 뱃구레에 해당되는 와우형의 지역으로 봤기 때문이다. 뱃구레는 여물을 먹을 때는 불룩하지만 배설하면은 훌쭉해지기 때문에 주민들은 현재의 마을 현상과 견주어 이야기 한다. 예전에는 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승달산의 명당인 노승예불형의 혈지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이 한국의 혈맥을 자르기 위해서 박았다는 쇠말뚝이 두 군데나 있다고 하며 맥을 끊기 위해 뜸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으며 단순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성씨
적동은 원래 문씨들의 터였다. 하지만 현재 문씨들은 한 세대도 없고 김씨 이씨 채씨 박씨들이 살고 있다. 귀래촌에는 정씨와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이들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박곡면 귀래촌 내동 (입석리) 연동 학봉정 등으로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박곡면 귀학리 귀래촌 연동 내동 등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현재 귀래촌과 적동 그리고 연동의 세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귀학리는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귀래촌 연동 내동 학봉정 일부를 합하였다. 이때 귀래촌의 귀와 학봉정의 학의 이름을 따서 귀학리라 하였으며 박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몽탄면을 가로지르는 현재의 도로가 개발 되기 전에는 오갈재의 비포장 도로를 활용해서 다녔다.
주요시설
영사재 아래 터는 일제강점기 때 석곡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병대산은 무슨 목적으로 주둔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대가 있었던 산이다. 병대산 정상에는 막사와 우물이 있으며 기관포를 장착했던 시설이 있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적동 뒤에는 삵(살쾡이)봉이 있고 연동 뒤에는 한새봉이 있으며 귀래촌 뒤에는 병대산이 자리하고 있다. 삵봉 옆에는 주민들이 의미를 두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 매봉산(서씨 재각이나 서씨 족보에서는 鷄峰山으로 나온다)이 있는데 이 산은 날이 가물 때 인근 주민들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내는 산이기도 하다. 삵봉은 중턱에 살쾡이가 사는 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한새봉은 큰 새의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병대산은 무슨 목적으로 주둔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대가 있었던 산이다. 병대산 정상에는 막사와 우물이 있으며 기관포를 장착했던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산의 일부가 없어졌다.
마을 입구에는 독배기라 부르는 곳이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엔 쌍독으로 불렀던 커다란 돌이 두 개 서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올 때 이 독에 배를 매었다고 한다. 도로공사 때 없어졌다.
고인돌도 몇 기 있었으나 경지정리 하면서 깨버리거나 파묻어 버려 지금은 없다.
동/식물
적동 마을 아래에 아네미라 부르는 곳엔 당산나무가 있다. 원래는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두 개의 당산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당산은 고사되어 고목이 되어 남아있고 할머니 당산만 살아있다. 두 당산 둘레가 모두 4미터 60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적동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정월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산제를 모시며 마을의 평안과 일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입향조인 김해김씨가 심은 나무로 믿고 있다.
또한 경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아네미 맞은편에도 당산나무가 있어 그곳에서도 지냈다. 당산나무가 있는 길 양옆에는 석장승도 있었으나 지금은 나무도 장승도 전부 없어졌다. 당산샘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주변 골짜기는 순서대로 텃골, 살막쟁이, 고래실, 아네미, 간데미, 샘골, 비석등, 지네정(진헌정)골, 진득골, 고조골, 진등, 거문달, 큰골, 작은골, 배나무골, 지네밭(밤)골, 당산(장사)등, 작은매장골, 큰매장골, 적밭, 서반정, 애갯(어잇)재, 작은애개, 대파리골, 가장골, 건넌골, 솔짐개, 범성골, 맞추쟁이의 지명으로 불린다.
삭봉, 한새봉, 독배기 등의 지명도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한때 이 마을엔 농악이 유명했다. 귀학농악이라 하면 인근에서 알아 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잔치 때나 행사 때면 출장 가서 농악놀이를 하곤 했다.
애갯제를 넘어 영춘동과 농악패들이 오가면서 놀이를 했었다. 최수백님(전통적인 꽹과리)과 박상구님(장구)이 유명했다. 500여년간 이어진 당산제는 현재(2023년) 채병렬 개발위원장이 지속하고 있다. 제관으로 지정이 되면 목욕재개하고 일주일 금줄을 쳐놓고 신성시 하면서 제를 지냈다.
매봉산 기우제는 샘터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하여 지냈다. 마을주민들은 연기를 피우면 비가 내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이천 서씨 재각인 영사재가 있다(학산리에 속함). 정면 사칸에 팔작지붕의 형태인 이 재각은 주련이 5개나 걸렸다. 안에는 6개의 현판이 있으며 이천 서씨 파조인 徐 稜의 영정이 걸려있다. 또한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 시 문중의 묘가 파묘되면서 나왔던 짚신과 시신을 쌓던 천[과두裹肚]과 삼베 조각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묘의 주인은 연동 마을 입향조인 서의손의 아들 서철주(1496-1557)이다.
마을에는 1960년에 세운 성경처사유허비와 2009년에 세운 김하동공적비가 있다.
설화
일본 순사가 칼을 차고 마을사람을 잡으러 오는데 당산나무 수호신 덕분에 순사가 탈이 나서 오지 못하게 만들어 마을사람들을 지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당산나무 뿌리를 자르거나 나무를 다치게 하면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입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서해안 고속도로가 마을 앞으로 개통되면서 귀래촌 주민들은 방음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소음피해가 막심하다고 말한다.
주민요구사항
당산제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음에도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의 우려가 크다. 보호수로 지정하고 주변을 관리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