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명으로 청계1리인 원청계마을은 광주-목포간 도로를 따라 청계면 소재지에서 목포방향으로 약 1㎞가량 진행하면 도로 양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가시동마을, 왼쪽으로 행림, 원청계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지명유래
‘청계(淸溪)’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는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시내인 ‘청계천(淸溪川)’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깨끗하게 흐르며 또한 마을 주위에서 맑은 지하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행림마을의 옛이름은 '골시초'라 했고,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무성하다고 하여 행림(杏林)이라 불렀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왕의 태가 묻힌 태실이 있는 마을 뒷산 태봉산과 관련하여 왕이 행차하여 묵었다간 행림(行臨)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한, 가시동(佳時洞)마을은 가시목과의 가시나무가 많아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고, 이러한 지명의 한자표기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한 무안박씨 족보에 표기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청계를 이루는 세 마을이 다 무안박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진위장군 박제의 아들인 농와 박숙(聾窩 朴俶, 1599- ?) 공이다. 공의 벼슬은 장악원정(掌樂院正, 정삼품 당하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공은 벼슬을 탐내지 않고 수은 강항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전력을 다했으며 집안에서는 가훈팔장(家訓八章)을 지어 시행케 하였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원래 원청계 마을은 현재의 위치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폐촌이 되어버린 다음 임란 이후에 무안박씨 박사번 씨가 입향하고 그 후 나주정씨, 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고 한다.
또한, 행림마을은 ‘무안의 성씨자료’를 보면 원청계 마을에서 살던 주민이 위쪽으로 올라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행림마을의 입향조는 정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까지 지낸 경주김씨 김성집(金星集, 호는 송포)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마을 또한 원청계마을의 무안박씨가 분가해서 형성한 마을이며, 가시동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마을을 포함한 전체적인 지형이 거북이 형상이다. 마을 뒤의 태봉산이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거북이 형상이고, 구암 마을과 당치가 거북이의 양발에 해당하는 형국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또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가시동마을은 누운 소의 모습인 와우형(臥牛形)의 지형으로 마을 앞에까지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성씨
최씨, 김씨, 정씨, 박씨 등 혼합성씨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청계마을의 지명이 1987년의 자료에서까지 청계리로 나오는데 비교적 최근에 원청계로 바뀌었고, 원래 가시나무가 많다고 가시동(佳時洞)이라고 불린 가시동은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에는 가시동(加柴洞)으로 나온다. 특히, 원래 고을의 시초라는 뜻으로 ‘골시초’로 불린 듯한 행림(杏林)마을은 일부 주민들이 왕의 태가 묻힌 태실이 있는 마을 뒷산 태봉산과 관련하여 왕이 행차하여 묵었다간 행림(行臨)이라고 주장하여 흥미롭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일서면 청계리, 당치, 행화촌이었다가, 1910년에 목포부로 편입되었다. 1912년 청계면 일서리의 청계리, 가시동이었고, 1914년에 행림리, 가시동리, 당치 등이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자료에는 청계면 청계리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가운데로 예전의 국도 1호선이자 광주-목포간 도로가 지나고 동양환경과 레미콘 공장이 길 건너편에 가시동마을 입구에 있다. 그리하여 세 개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은 기간도로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실 한 마을이라고 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원청계 마을은 현재 빈집을 없을 정도로 외부유입 인구가 지속적으로 들어와 주민들과 잘 어울리고 꽃을 가꾸어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산 중턱에 자리한 행림마을 역시 최근들어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오고 또한, 현재 네 가구가 거주하는 가시동마을은 교통이 불편하여 유입 인구가 적은 편이다. 주민들의 주업은 벼농사, 양파, 시금치 농사 등을 지으며, 교통이 편리한 도로 주변으로 정미소와 목재소를 비롯한 여러 산업체들이 입주해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직장인들이 서로 어울려서 살아가는 도농복합마을이라고 하겠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정자, 청계제. 방주기도원, 여수룬기도원
마을변화
예전의 청계리라 불렸던 원청계마을은 승달산과 태봉산을 사이에 두고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하지만 근세기에 들어서 놓인 국도 1호선에 더하여 광주-목포간 도로가 놓여 무안과 목포간 중간지점이 되면서 편리해진 교통환경으로 급격히 도시적 성격을 띄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청계마을을 중심으로 레미콘공장은 물론 목재소와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상업시설이 들어오고 최근에는 무인모텔까지도 입주하였다. 따라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세 걔의 마을이 흩어져 있어서 마을행정이 가중되고 있는 데다가 여러 성향의 주민들이 섞여있어서 마을공동체로서의 운영에 애로사항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편이다. 몇 년 전에는 마을 뒷산인 승달산 등성이에 대규모 풍력발전소가 들어오려고 해서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간신히 막아내기도 했다.
이에 원청계마을은 일반적인 시골마을과 달리 도농복합형 전원마을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이에 따른 마을운영은 물론 다양한 주민들의 융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가 운영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청계막걸리는 승달산 계곡의 맑은 물로 빚어서 1970년대까지 서남권에 명성을 떨쳤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과 태봉산(169.5m) 사이의 마을 중앙에 청계저수지를 품고 있는 행림마을은 수려한 산세로 두 개의 기도원이 있다. 또한 청계제의 지하에서 솟아나는 맑은 너무 맑고 깨끗해서 고기가 살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또한, 가시동마을 역시 숲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산개발이 이뤄지며 산이 잘려나가고 레미콘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황폐화되고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아름답던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여타의 시골마을처럼 급격한 인구감소의 위험성은 없다고 하나, 급격하게 변하는 자연환경을 인간친화적인 마을환경으로 유지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식물
은행나무, 가시나무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저수지 옆에 있는 ‘방주기도원’은 서당재라는 지명이 있다. 월선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청계 초등학교로 등교할 때 넘었다는 고개다. 행림 마을에서 목대로 넘어가는 재를 딩굴재라 한다. 샘가에 내[川]가 있다 해서 ‘샘갓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행림마을의 청계저수지 상류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무안군의 문화유적』이라는 자료에서는 이 마을에 지석묘가 6기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을주민 서유조 씨 집에서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사용된듯한 황토벽돌이 많이 발견되어 가마터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앞 광주-목포간 도로 옆에 있는 밭에서는 실제로 가마터가 발견되어 분청사기의 한 종류인 마상배(馬上杯) 두 개와 수많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어 관심을 모은 적도 있었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는 마을에서 태봉산 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에서 슬러그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쇠를 다루던 청계 야철지(冶鐵址)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950년경에 원청계 마을 뒷산인 태봉산에서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이 발견되었다. 여섯 명의 마을주민들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려 산에 올라갔다가 발견한 태실은, 절구통 같은 모양의 석실 두 개, 주민이 마셔버렸다는 누런 탯물, 그리고 수저자루 같은 손가락 길이의 금, 태를 담았던 항아리 속에 넣어져 있던 벽돌 모양의 옥돌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광명 정덕’이란 한자가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또한 태의 주인도 ‘명나라 황족의 태’라는 추측에서 ‘고려 혜종의 태’라는 주장도 있다. 태실(胎室)의 조성은 왕실에서 왕자나 왕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묻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태실을 전국 도처의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도 있었다.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이러한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는데, 전국에는 ‘태봉산’이라는 이름의 산들이 많이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청계면 태봉리와 청계리의 태봉산 등 같은 이름이 있는데 태봉(台峰)리는 한자가 다르다.
또한 마을에는 2개의 기도원이 있으며 가시동 마을에 무안박씨 제각인 ‘영사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다. 안에는 7개의 현판이 있으며 삼문 밖에는 2003년에 세운 ‘박용화공적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태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승달산 등성이에서 바라보든 또한 광-목간 도로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이든 원청계마을은 그대로 자연환경 자체가 수려한 마을이다. 물론 도로에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마을에는 여타의 시골마을과 달리 빈집(空家)이 거의 없다. 비록 농토는 적고 세대수는 적지만 주민들의 근면함과 부지런함으로 주변의 어느 마을보다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떠나가는 세대가 없다. 풍요로운 자연환경만큼이나 마을가꾸리를 잘해서 집들이 모두 번듯하고 깨끗한 경관을 자랑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산촌김치, 한섭정미소, 천년한옥종합목재, 광명제재소, 한길건축, 동양 환경공장, 래미콘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