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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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 2리 청계면 구암마을 작성
  • 구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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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세대수 44세대, 인구수 74명(남 42, 여 32)이다.
자연마을 구성
친환경 우수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청계2리 구암마을은 청계면소재지에서 광주-목포간 도로를 타고 목포방면으로 약 2km쯤 진행하면 나오는 마을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유래
원래 구암마을은 마을 뒷산에 아홉 개의 바위가 송편처럼 겹쳐있어서 구암(九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쇠를 다루는 고철소원과 청계원이라는 역참 등이 있었던 구암마을은 원래 학유정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행림리, 구암리, 학유정리, 가시동리, 당치, 중신기를 합하여 청계리라 해서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면서 구암리로 구분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구암마을을 포함한 청계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적인 지형이 거북이 형상으로, 태봉산이 바다로 기어나가고 있는 거북이처럼 구암과 당치(唐峙)가 양발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학유정 앞의 둑이 막히면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마을이름이 구암(九岩)으로 바뀌었는데,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거북이에게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둑이 생기면서 물이 없어지자 이름도 바뀌었다.’라고 한다. 그러다가 1999년에는 학유정에서 분구하여 청계 2리로 확실히 분리되면서 구암마을이 되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김해김씨로 마을 이장을 역임했던 김해김씨 김몽룡 씨의 집안에서 12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인 16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이후 나주정씨, 밀양박씨, 달성배씨 등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살고 있으며, 또한, 구암마을이 단순한 성씨로 구성되는 자연마을이 아니라 철소원, 역원, 당포와 영진포구 등을 드나들던 여러 관원을 비롯한 기관단체의 인원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을 포함한 구암1구 원청계와 2구 구암마을을 전체적인 지형으로 보면 거북이 형상이다. 마을 앞의 태봉산이 거북이처럼 바다를 향해 기어나가는 형상으로, 구암마을과 예전에 영진포와 당포로 들어온 중국배의 선원들이 넘어가던 산이라고 하는 당재(唐峙)가 거북이의 양발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이는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인데 구암마을은 우백호의 지형에 해당된다. 이에 학유정의 간척지 둑이 막히면서 구암(九岩)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거북이 지형을 그대로 살린 풍수적 관점에서 구암(龜岩)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을성씨
혼합성씨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1789년의《호구총수》에 수철점(水鐵店)이라고 나온다. 이는 무안에서 나오는 수철(水鐵)로 가마솥, 농기구 등 철제품을 만들던 철광소가 있었던 마을로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마을이었다. 그 후에 거북이 형상을 한 마을의 풍수적 지형을 따서 구암(龜岩)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마을 뒷산에 아홉 개의 바위가 송편처럼 겹쳐있어서 구암(九岩)이라고 한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청계리는 무안군 일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행림리, 구암리, 학유정리, 가시동리, 당치, 중신기를 합하여 청계리라 해서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예전에 당포와 영진포 그리고 철제련소와 역원(驛院)이 있던 역참마을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리하여 별다른 농지가 없어도 풍족한 생활을 했으나, 근세로 오면서 역원(驛院)이 폐지되고 제련소 역시 무력해지면서 실질적인 수입원이 없어 어렵게 살던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 앞의 바다가 간척되어 농지로 바뀌면서 농사를 통해 일정한 경제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국도1호선과 광주-목포간 도로가 활성화 되면서 중간기착지로서의 역할을 확보하여 휴게소, 주유소를 비롯한 기사식당 등 교통 및 물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마을이다. 따라서 농사를 짓는 농민은 물론 각종 교통, 식당업, 까페 등 요식업 등을 하는 상인들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마을이라고 하겠다.
주요시설
주유소, 택배회사, 자동차공업사
마을변화
구암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운영하던 포구와 철소원 등 역사적인 흔적이 많은 곳임은 물론 이를 통해 교통과 물산이 풍부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렇듯이 근세기에 들면서 건설된 국도1호선 신작로가 원래 장부교를 지나 송학마을 앞으로 지나가다가 노선이 변경되어 확장되면서 이 마을을 경유하는 광주-목포간 도로의 중간기착지가 되었다. 또한, 이후 일로읍으로 연결되는 815번 지방도로가 시발하는 기점이 되면서 삼거리가 되어, 이 마을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장부다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주유소, 휴게소, 식당, 까페 등 교통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다. 최근에는 자동차공업사, 택배회사, 컨테이너 하우스회사와 여러 물류창고 등이 들어서서 목포와 무안 및 남악 등 일정부분 도시의 배후기능을 하는 마을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정자, 옛 원터(쉼터), 휴게소공원
전통식품/특산품
산촌팥죽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아랫마을인 학유정에는 복길간척지를 막기 전까지 ‘영진포’라고 불리는 포구가 있었다. 구암마을 앞까지 바다였을 때 나락 2-3천 가마를 실은 범선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었으며, 중국의 사신들이 드나들었던 항구이며 포구였다. 이 포구는 오래전부터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되었던 항구로 중국의 불교가 승달산으로 들어오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승달산의 원래 이름이 ‘영취산’이었는데 당나라 승려 500여 명이 이 산에 들어와 모두 도(道)를 깨치면서, 도를 얻고자 하는 승려는 이 산에 들어오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뜻의 ‘승달산(僧達山)’으로 바뀌었다. 이때 당나라 승려들이 정족포에서 내려 승달산을 향해 올라갔던 고개가 지금의 이 마을 아래에 있는 송학동 마을 뒷산의 당재(唐峙)이다. 이곳을 영진포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기록 뿐만 아니라, 현재 이곳 주민들이 마을 앞의 둑을 ‘영나루’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 역문인 돌 두 개가 남아있으며, 삼향면 지산리에는 역마촌과 하인촌이 있었다.
동/식물
마을에 ‘원터’라고 불리는 고철소원이 있었던 곳에는, ‘땅밭’이라고 부르던 제련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뒤에 원이 들어섰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수령이 300년 넘은 이팝나무 두 그루로 이루어진 당산나무가 있다. 물론 당산목이면서 동시에 배의 닻줄을 내려서 묶어두었던 나무이기도 했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곳이 명당터로 알려져서인지 당산목 아래에 버젓이 여흥민씨의 묘와 묘비가 자리해있는 것이다. 또한, 철소원터 앞에는 솥다리포구(정족포)가 있어 식수원으로 쓰던 땅밭샘이 있었고, 옆으로는 청계천이 흘러 아래쪽에는 수문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복개공사를 하면서 사라졌다고 하며, 당재에는 주막이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철소원터 아래 시냇가 끝부분에 ‘수문터’가 있었고, 뒷산 중턱에 ‘넘샘’이라는 마을의 공동우물이 있었다. 현재 식수로 이용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주변 마을에서까지 식수로 사용했던 물이다. 그 위의 팽나무는 주민들의 여름철 쉼터였고, 현재 구암식당의 근처를 ‘모랫등’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조금만 깊이 파면 모래가 나온다. 아홉 개의 바위 또는 거북바위여서 부르는 ‘구암’, 청계1리에서 청계제로 흐르는 행천천, 일제강점기에 간척된 들판을 ‘앞들판’이라고 부른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지냈던 당산제를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구암마을은 역사적인 흔적이 많은 곳이다. 예전에 무안반도의 해발고도가 지금보다 5~6m 높았을 때부터 근세의 간척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구암마을에는 중국배를 포함한 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인 일명 ‘당포(唐浦)’였다고 불리며,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철소원과 관련된 ‘솥다리포구’ 곧 정족포(鼎足浦)가 있었다. 이에, 육지로 이어지는 역참인 청계원(淸溪院)이 있었는데, 이는 무안의 경신역을 중심으로 망운의 명탄원, 현경의 옹산원과 더불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포괄하여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구암마을에는 삼면이 물로 둘러쌓인 무안에서 주로 나오던 특산물인 수철(水鐵)을 제련하여 철제품으로 만들던 ‘고철소원(古銕所院)’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무안에는 세 개의 철소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남면 연리 원동과 삼향읍 유교리 원동 그리고 청계면 청계리 구암마을의 고철소원이다. 또한 철을 제련했던 곳도 이 마을의 고철소원과 최근 철소재공원으로 개발된 무안읍 성암리 성암마을의 철소재원 그것이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에 철을 제련했던 지명으로 보이는 ‘고철소원’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구암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면 ‘쇠똥’으로 부르는 철제련소에서 나오는 찌꺼기가 나오는 곳이 많다. 이러한 철찌꺼기들이 나오는 곳을 주민들은 ‘땅밭’이라 불렀는데, 이런 땅밭이 여러 곳 있었으며, 이를 뜻하는 ‘솥다리포구’ 곧 정족포(鼎足浦)가 현재의 ‘원 터’ 앞에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을 건너편을 ‘쇠터’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이를 실증할 수 있는 조사와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운 상황이다. 마을의 중앙을 이루는 구암식당 뒤편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포구였기에 배의 닻줄을 매기도 했었다고 하며, 여기에 조선 후기 세도가였던 여흥민씨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김성곤(우중 뿌리공예 운영)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의 산 위에 크기가 비슷한 검은 바위 10여 개가 시루떡을 쌓아놓은 펼쳐져 있으며, 마을 뒤편에 얼마 전부터 경작하기 시작한 각종 연방죽이 은은한 향기와 오롯한 자태를 뽐내는 연꽃을 피워내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장부다리 휴게소(주유소/음식점), 한성가구, 유달주방가구, 한국타이어공업사, 경동택배, 한빛컨테이너, 구암식당, 초심가든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오랜 세월 포구였던 구암마을 위의 가시동마을은 가시나무가 많아서 이뤄진 지명이라고 한다. 배의 닻줄을 매어두는 닻나무는 무거워서 쉽게 가라앉지 않으며 잘 썩지 않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시나무를 쓴다. 이에, 포구 인근 산골인 가시동에서 닻나무인 가시나무를 길러서 활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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