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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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 4리 청계면 학유정마을 작성
  • 학유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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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세대수 46세대, 인구수 77명(남45, 여32)이다.
자연마을 구성
학유정마을은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월선리와 장부교 및 구암마을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청계천의 끝부분에 있는 마을이다. 광주-목포간 도로를 타고 오다가 구암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이 마을은 영암산을 주산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에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지명유래
학유정은 마을의 지형이 학이 먹이를 찾아서 놀고 있는 형상(鶴遊)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효종 때 나주정씨 정도하가 최초로 입향 했으며, 그 후 나주김씨 김용규가 이거 해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고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계만 안쪽으로 바다에 접한 이 마을에는 ‘영진포’라는 큰 포구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이전에도 배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주김씨 족보를 보면 이 마을 나주김씨 입향조는 몽탄에서 넘어온 김상칠(자-문겸, 1780-1838) 공이다. 마을유래지에서 입향조로 제시한 김용규의 할아버지 때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나주정씨 족보에서는 입향조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이 학이 먹이를 먹이를 찾아서 놀고있는 형상이라서 지명으로 붙인 학유정마을에는, 실제로 학이 놀기 좋은 장소로써 마을 중간에 해남윤씨 묘를 둘러싸고 12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주민의 말에 의하면 풍수지리적으로 학의 먹이가 되는 세비섬 곧 세우섬도 있으므로, 학유정은 백학이 솔밭에 내려앉아서 놀다가 새우를 먹이로 잡아먹기도 하는 형국의 마을이라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해남윤씨 묘역의 소나무에는 해마다 수많은 학들이 놀러왔으며 그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고 한다. 그런데 60여년 전에 해남윤씨 문중에서 그 소나무들을 베어서 팔아버리자, 마을에는 좋지않은 일이 연이어서 일어나고 젊은이들이 이유도 없이 죽거나 다치는 등 변이 일어나면서 마을에 우환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은 뒤로 영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으로 간척된 농경지가 크게 펼쳐져 있어서 살기에 편안한 마을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마을성씨
정씨, 김씨, 박씨 등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학유정(鶴遊亭)이라는 마을 명칭은 1978년의 《호구총수》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오래전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도 학유정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구암마을과 장부교마을이 이 마을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행정구역 변경
학유정마을은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무안군 일서면에 소속된 학유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 자료에도 마찬가지로 일서면 학유정이었다가, 1917년에 청계면 청계리 학유정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바닷가 갯벌에 위치한 학유정마을은 살기에 힘들었으나 간척을 한 후로부터 농경지를 확보하여 비교적 풍요롭게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간척지의 염해를 풀고 또한 농경지에 댈 물이 많이 부족하였다. 심지어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가장 힘든 일이 새벽에 일어나서 물 받는 것이라 할 만큼 마을에는 물이 없었다. 한때 삼향과 학유정마을 사이에 냉동공장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길러내어 마을까지 수도관을 묻고 산 위에 물저장탱크를 만들어 상수도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나서서 대형 관정을 파기도 했었으나 자체적으로 물이 없어 인근에서 상수도가 가장 먼저 보급된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잘 뻗어있는 농수로를 이용하여 농경지에 물을 대고 있다. 주업으로는 벼농사를 비롯하여 양파, 시금치, 마늘, 고추 농사를 하고 있는데, 최근 외부에서 이주를 와서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
주요시설
광림교회
마을변화
이 마을은 뒤편에 있는 영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에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영암산이라고 한 것은 영암 사는 밀양박씨들이 뒷산에 와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간척을 하기 전에는 이렇다 할 농지가 없어 어렵게 살았으나 1980년대 간척이 되면서 부자 마을이 되었다. 마을에는 규모 있는 양계장을 하는 세대가 있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외부에서 이주해온 직장인들이 외부로 출근을 하기도 하면서 마을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을 가로지르며 KTX호남신선 건설공사가 한참이어서 조만간 마을의 지형적 변화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가 있으며, 매년 1회씩 부녀회 주관으로 야유회를 다녀온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양계업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두 차례의 간척으로 넓은 농지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뒤로 영진산 그리고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펼쳐진 포구마을이었다. 이에 국제항구인 영진포구를 중심으로 활발했던 중세 이후에 국경을 중심으로 공도정책 등 바다를 붕쇄하는 조선 후기에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세 들어 간척을 통해서 농경지가 확보되며 농사를 통해 여유있는 마을생태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타의 바닷가나 간척지가 그렇듯이 물이 부족한 자연환경에서 샘은 중요한 생태자원이었다. 학유정과 가시동마을 사이에 있는 통정골에는 한때 14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사는 큰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마을에 있었던 석각으로된 ‘통정샘’때문이었다. 지금도 샘 주위를 파보면 기와조각과 통나무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는 고려자기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학이 먹이를 찾아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마을 앞에는 학의 먹이라 일컫는 떡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떡처럼 반반하고 넓은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었으나 현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복길간척지를 만들면서 사용해 버려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석문은 중국의 사신들이 드나들 때 사용했던 통문이라고도 한다.
동/식물
수많은 백학들이 날아들던 12그루의 소나무를 찾아서 잘 복원하여 친수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서 구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큰 잔등’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그곳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곳이어서 어렵게 살았던 시절 굶주렸던 거지나 주민들이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죽어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물이 항상 넘친다 해서 ‘넘샘, 새샘, 황샘, 통정샘, 갯샘, 고을샘, 구석샘, 도롱밭샘, 영나리샘, 서그태샘’ 등이 있다.영진포구를 나타내는 ‘영나리, 방구등’, 원둑 건너 가시동으로 돌아가는 길은 ‘원건너 엽댕이’, 서쪽 끝이라 해서 ‘서그태’, 마을 입구의 바닷가에 돌이 많아 ‘도롱밭’, 그리고 ‘뒷재’가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마을 주민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약 20여 일간은 일하지 않고 세시풍속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때 마을의 농악은 주변 마을 등에까지 널리 알려졌었다. 이뿐만 아니라, 40여 년 전에 마을 주민들이 함께 불렀던 ‘소타령(牛歌)’이 민속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고 하여 찾아보니, 1983년에 개최된 ‘제13회 남도문화제’인 것 같았다. 주민들은 그때 수상 기념으로 무안군에서 마을 앞길을 포장해주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불렀던 소타령은 다음과 같다. <소야 소야 망망소야/ 오양곱장 망망소야/ 생길몸도 새였는데/ 소몸으로 생겼느냐/ 나무휘어 코를 뚫고 이하 생략> 가사는 이렇게 기억하는 주민들이 있었지만 노래를 부르던 할머니가 별세하여 곡을 알 수는 없었다.
유물, 유적
현재 이 마을은 191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서 두 차례의 간척으로 넓은 농지를 갖고 있지만 조선조 말까지도 마을 앞은 바다였다.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숙이 구암마을까지 들어온 지형적인 영향으로 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포구인 영진포구가 형성되었다. 포구는 마을 서쪽 끝 갯고랑 부근에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왜구와 같은 해적들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영나리’라 해서 대수롭지 않은 포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포구를 통하여 중국의 사신 및 수많은 스님들의 왕래가 자주 있었으며 벼를 2~3천 석씩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포구를 관할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통정관(通政官)이라는 관리가 거주하며 살았던 곳을 ‘통정골’이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통사골(通死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는 한때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시체를 다 치울 수가 없어 그대로 버려두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통사골에 나주김씨 문중산이 있는데 많은 고총(古塚)들이 있다고 한다. 오래전에 통사골 주변과 김씨문중 산에 도굴꾼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서 검침봉으로 쑤시고 다녀 수많은 유물들을 찾아서 도굴해갔다고 한다. 도굴품 중에는 고려청자에 해당하는 유물도 있었다고 하는데 주민들도 그때는 관심이 없어 잘 몰랐다고 한다. 통정골은 학유정과 가시동 마을 사이에 있다. 예전에 이 통정골에는 14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석각으로 된 통정샘이 있으며 지금도 샘 주위를 파보면 기와와 통나무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자료에는 고려자기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한국철도공사에서 KTX호남선신선 건설공사을 진행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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