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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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대리 청계면 도대마을 작성
  • 도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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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가구수 144세대, 인구수 232명이다.
자연마을 구성
도대리는 조선시대 봉홧불을 올렸던 도대봉의 뒤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대리 오른쪽에는 창포만 간척으로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앞에는 도대봉 자락에 천주교공원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대청몰, 아랫몰, 웃동네 등 세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서느리, 정마동, 여당뫼 등이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자연마을로는 무안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고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지명유래
도대(道垈)라는 지명은 ‘도대리에 속한 마을로써 길옆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한 다른 의견으로는 ‘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길이 날 것’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마을의 주산인 도대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는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도 기록된 내용으로 확인되며, 도대봉은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봉우리로 원래 고림산이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에는 선조년간《宣祖年間(1567∼1608)》에 청주한씨와 청송심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의 횡포가 너무 심하여 다른 곳으로 모두 피난을 갔다고 한다. 그 후 1724년(경종4년)에 다시 청주한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구전(口傳)되고 있다. 이에《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는 입향조가 숙종(1674∼1720)때 청주한씨 한처양(韓處良, 자-재양)이 나주 오양리(五良里)에서 세거하다가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로 정조(1776∼1800) 때 청송심씨 심득상(沈得相, 자-영원, 호-남은)이 함평 신광(新光)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봉수대가 있었던 도대봉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도대라고 불렀던 마을지명에 반하여, 일부 주민들은 마을의 지형이 칼의 형국을 하고 있어서 도대(刀垈)라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승리봉, 투구봉 등의 봉우리 이름이 말해주듯이 전쟁에서 승리를 한 장수가 투구를 벗고 말을 쉬게 한 후 칼을 놓고 다른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듯이 이 마을은 깃대봉, 옥녀봉, 차일봉, 투구봉, 승리봉, 장구봉 등 여러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분지형 형국이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도대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도대’라 했는데, 임진왜란 전에는 마을에 계림사란 큰절이 있어서 ‘절골(또는 강정리 가는 고개인 ‘적골’이라고 부름)’이라 불렀고, 이후 도대봉수가 있어 ‘도대(道垈)’라고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주변에 해당화가 많이 피어있어 ‘해당촌’으로 불렀다. 이후 마을 중앙에 길이 가로질러서 ‘도대(刀垈)’라고 하였다가 현재의 이름인 ‘도대(道垈)라고 하였다. 이는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기에서 일부 주민들은 도대봉의 풍수상 형국을 근거로 ’도대(刀垈)‘라고 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에 나타난 행정구역 변천과정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서면 도대리로 나오고,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도대마을은 원래 바닷가에 접한 어장촌이었으며 주민들 중 상당수가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의 ‘아랫갱변’은 주막이 여러 채가 있을 정도로 한때는 흥청거렸던 곳이다. 황금어장인 청계만에서 잡아올린 각종 수산물이 이곳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음은 물론 번화했던 곳이었다. 심지어 갱변 인근에는 도자기를 구워서 파는 마을인 점등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자주 발견되었다고 한다. 점등은 서호리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후 도대마을은 간척으로 개발이 되면서 어업을 하던 주민들이 떠나게 되었지만, 늘어난 농경지로해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다시 번성하였다. 물론 마을 주민들이 근면하고 부지런하여 간척된 농지가 주로 이웃 마을인 강정리 정씨들의 소유였던 것을 다시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도대마을은 무안군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한때 주민이 성할 때는 200여호가 넘는 세대에 주민수도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140여 세대에 230여 명의 주민수는 여타의 마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마을이다.
주요시설
도대교회(1931년 설립, 94년 역사), 청계서초등학교(2007년 폐교), 농산물가공지원센터, 유니크가구공장
마을변화
도대마을은 원래 바닷가에 접한 어촌으로 주민들 중 상당수가 어업으로 생계를 삼았다. 또한 한때 청계만에서 잡아 올린 각종 수산물이 거래되던 곳으로 번성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간척으로 개발되면서 농경지가 늘어나 농업이 주업으로 바뀌면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마을 역시 큰 세를 이루어 무안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하지만 마을 아래로 창포만 간척으로 형성된 골프장이 들어서는 등 간척지의 무분별한 개발과 바다를 비롯한 각종 환경오염으로 갈수록 자연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또한, 마을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는 도대길이 주민들을 여전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 길을 중심으로 본동네와 중촌이 나뉘어져 주민들이 편하게 다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군에서 마을을 우회하는 도로를 개설하려고 했다가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다. 얼마 전에 개설된 청계에서 무안공항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개통되어 인근 도회지로 이어지는 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개발위원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보건진료소
전통식품/특산품
대림마당 식당(토종닭, 보신탕)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회관 앞에 6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중 5개 정도가 고인돌로 추정된다. 주민들에 의하면 4개는 마을 뒤편 바윗등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이 중에 미루바위와 장재바위가 있다. 여기에서 ‘미루바위’는 메루바위 또는 멸구바위라고도 하는데, 들판에 있었던 바위로 여름철에는 마을에서 제사를 지냈던 바위다. 예전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재앙이었던 멸구를 없애는 것이 한해 농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름철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이 바위에 재물을 올려놓고 멸구의 방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전조바위라고도 불렸다. 또한, ‘장재바위’는 바위의 폭이 50cm정도 되는 작은 바위였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을 건널 수 있도록 하던 다리 역할을 하던 바위였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상(喪)을 만하면 상여가 이바위(구름바위 : 마을회관 앞으로 옮겨 왔다)를 건너 장지로 간다고 했다.
동/식물
이 마을은 창포만이 막히기 전까지는 천주교묘지 입구에서부터 서호리의 달바위까지 모래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십리 넘게 펼쳐진 모래사장에는 해당화와 선인장이 피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이기도 했는데, 1950년 6.25한국전쟁 때는 이곳에 50여 세대가 넘는 피난촌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당시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었던 말집 두 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에는 두 개의 섬을 ‘미섬’과 ‘대섬’으로 지칭했다. 미섬은 머구리(다이버나 잠수버를 일컫는 옛말) 모양으로 머구리섬 또는 양처럼 생겼다 하여 ‘양섬’으로 불렀으며, 대섬은 ‘상죽도’, ‘웃대섬’, ‘상죽섬(현 유당농원 소유)’ 등으로 불리는데, 구로리에 있는 섬은 ‘아랫대섬’이라 하고, 이 대섬은 ‘웃대섬’이라 불렀다. 두 섬 모두 망월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미섬은 서호리의 달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며, 대섬은 현경면 당두의 달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미섬에는 신씨(申氏)들의 묘소가 있었으나 1980년대 창포둑이 연결되면서 사라졌다. 마을에 ‘큰애기샘’과 ‘아랫마을샘’도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었다. 도지바탕의 당산하네와 아랫말인 중촌의 당산할멈 사이를 오가면서 매년 정월보름이면 온 주민이 나서서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 당산나무는 모두 아름드리가 넘는 구슬나무였는데, 오래전 큰 태풍에 쓰러진 뒤로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마을에는 큰애기샘과 아랫말샘이 있었는데, 당산제에서는 반드시 큰애기샘의 물만 사용하였다. 현재 당산제를 지내던 곳은 아예 포장을 해버려서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유물, 유적
봉화를 올리던 도대봉은 높이가 180m에 지나지 않지만, 해안가에 있어 사면이 탁 트인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 지금의 왕산에 있는 ‘군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현경의 ‘옹산봉수’까지 연결했던 ‘도대봉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봉수대도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 때가 되면 이 산은 만남과 놀이의 장소였다. 또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고림산이라고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대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안 고림산 봉수 유적’은 전국 봉수의 제5호 직봉의 19번째 봉수이며, 고지도 및 고문헌 등에 기록되어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연대와 토단의 방호벽이 있어 연속유산으로서의 가치성을 인정받아 지난 2023년 11월에 ‘국가지정유산’으로 지정받았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무안군 합창단지휘자(한영만)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경민(경찰청장), 서형기(숭의중학교 교장), 서원주(전 면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한국전쟁 때 마을에 피해가 많았다. 당시 주민 중에 좌익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서 청계면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사상적인 의심을 받았고 또한 주민들의 피해가 크기도 했다. 그래서 주민들 중 몇 사람이 복길리 참사의 가해자로 주목받기도 하였는데, 그로 인한 주민들 간의 갈등과 고통을 크게 받았다. 당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피해를 입은 복길사람들과 특수부대원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일일이 검색과 검증을 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당시를 회상하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던지, 손으로 봉초담배를 말지도 못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무안CC골프장, 미섬 어항(50억 예산 설계중)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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