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망운면 무안국제공항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망덕산을 주산으로 오른쪽으로는 박달봉, 깃대봉이 있고 왼쪽으로는 우두산이 있다. 소쿠리 형국의 마을로 도대로가 지나고 있으며 창포만 간척지와 접하고 있다. 현재 벌포(서호정), 신기, 기동, 연수동 등 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서호1리인 벌포마을은 벌포, 솔무정, 뒷동산, 뒷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개설된 청계읍내에서 무안국제공항을 잇는 815번 국도와 광주-목포간 국도1호선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흔히 서호정으로도 불리는 벌포마을은 서호(西湖) 곧 서쪽에 있는 호수라는 지형적 특징과 함께 벌포(伐浦)라는 역사 속의 인간적인 스토리가 찰랑대고 있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명인 벌포(伐浦)는 원래 벌랑포(伐浪浦)의 줄임말로써, 이 마을의 입향조인 나주정씨 정신(鄭紳, 호-牛山, 1576~1640) 공의 효성이 깃들어 있는 지명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훈을 세워서 나라로부터 선무원종공신으로 책정된 두 분의 무안출신 공신이 모두 나주정씨 문중에서 나왔다. 현재 무안시외버스터미널 앞의 무안읍 월천리에서 태어난 월탄 정기수(月灘 鄭麒壽, 1559~1598)와 월봉 정황수(月峰 鄭凰壽, 1562∼1628) 공이다. 두 형제는 모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토벌한 충신들로서, 단순히 의병장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한산도, 당포해전 등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시에는 무안의 무안현, 임치진, 다경포 등에서 내 고장을 지키는 싸움은 물론 노량해전에도 참여하여 퇴각하는 왜구들을 척결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월탄공이 전사했으나 그 시신마저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월탄공의 아들인 정신은 행여나 선친의 시신이 물결에 밀려오거나 아니면 서해바다를 보며 선친을 기리고자, 1600년대 초에 이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서해안의 한 줄기인 창포만 달바위 위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낮이나 밤이나 선친의 시신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자 창포만의 물결을 시묘하던 지팡이로 치면서 자신의 불효를 한탄했다고 한다. 뒷날 마을주민들은 입향조의 이러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이 마을을 벌랑포(伐浪浦)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안읍에서 이 마을을 보았을 때 서쪽에 창포만이 있어 서호(西湖)라고 하였는데, 이곳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서호정(西湖亭)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서 망해정(望海亭)은 물론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정신(鄭紳) 공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세운 정자이다.《무안군지》에서는 이를 '望海亭 清溪에 있으니 持平 鄭紳이 先考月灘公하여 望西海하고 終身 慕之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바닷가에 창궐하던 깔따구를 없애기 위해서 고양할미와 연관된 벌포라는 지명설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정씨 정신(鄭紳, 호-牛山, 1576~1640) 공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기반으로 창포만 등 서해바다의 수려한 풍경이 서로 어울려서 형성된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서호리 자체의 지형이 청계만과 창포만에 접해 있어서 풍광이 좋은 형국이다. 예로부터 노래되고 있는 서호팔경(西湖八景)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서호1리 벌포마을의 뒤편에서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우두산(牛頭山)은 마을의 주산으로, 마을주민들은 모두 이 산의 정기를 받아서 힘이 세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주민들은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힘센 소와 같은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창포만이 막히기 전에는 바다로 뻗어나가 반도형으로 생긴 우두산을 우산반도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우산(牛山) 곧 소가 뜯어먹을 풀이 창포만 바다에는 한 포기도 없었다. 소머리 앞바다에는 솥바위와 구유바위가 있었으나 쇠죽을 끓일 풀과 곡식이 없으니 참으로 어려운 형국이었다. 또한, 소의 왼쪽에 깔짐 또는 꼴짐이라 부르던 미섬(羊島, 머구리섬)과 깔망이라고 하던 대섬(竹島)이 있었으나 모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처럼 마을이 우두봉 곧 소와 관련된 지명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입향조인 정신 공의 호도 우산(牛山)이며,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소의 뒷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이라고 하며, 마을 오른쪽에는 소를 매었다는 소맷봉(차일봉, 기동에서는 망덕산이라고 부름)이 있고 와우물, 버찌(도끼)등, 잿간나무를 비롯한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또한,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에 창포만이 간척으로 막히면서 소머리 앞의 바다가 육지가 되었으니, 바닷물이 빠지고 농경지가 되어 소에게는 살판이 난 셈이라고 한다. 깔짐과 꼴망을 찾아서 마음껏 꼴을 베어다가 배불리 먹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갈수록 활성화되는 무안국제공항의 배후 마을로써의 다가오는 미래를 예견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또한, 서호팔경 중에 ‘백정만적(百町萬積)’이 바로 이런 상황을 예견한 지명이 아닌가 하여, 단순한 자연 지형에서 마을의 역사와 전통은 물론 미래비전까지로 이어지는 문화지명(文化地名)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마을성씨
나주정씨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마을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기동리, 서호산리, 반송정, 연수동으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이서면 연수동, 신기동, 서호정리, 기동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청계면 서호리 서호정, 신기동, 연수동, 기동으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서 청계면 서호리 서호정, 신기, 기동, 연약동으로 나온다. 따라서 벌포마을 곧 서호정은 서호산리, 서호정리, 서호정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최근에 벌포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는데 1910년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동, 연수동, 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오랫동안 집성촌으로 살아와서인지 전통과 규모가 어우러진 마을이며, 주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검소하고 부지런하다. 6.25한국전쟁을 비롯한 각종 변란에도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고, 장수마을로써 지금도 노인들이 마을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 마을은 예로부터 주로 양반들이 모여 살던 반촌(班村)으로서 예의, 도덕과 어른이 우선시되는 마을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인들이 자체적으로 ‘노인계’를 결성하여 마을 일을 돕기도 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후손들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이처럼 노인들이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마을의 주민들이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많이 줄어들어서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주요시설
서호정미소
마을변화
서호간척지 바깥쪽으로 마을과 인접하여 무안CC골프장이 들어오고 인근에 무안국제공항이 활성화되면서, 이에 가까운 배후 마을로서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청년회(서호1, 2, 3, 4리 합동)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시금치, 고구마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비교적 낮으면서도 청계만과 창포만 등 호수와 같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던 벌포마을은 천혜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서 특히, 마을 잔등 너머의 창포만과 접해 있었던 ‘개어덕샘’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부인병과 신경통 등에 약효가 좋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물맞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입향조인 정신(鄭申)공 역시 망해정을 짓고 부친을 그리워하며 생활할 때도 이 물을 이용해 식수를 해결하였고, 이후에 마을 앞의 공동샘인 ‘들샘’도 ‘개어덕샘’과 연결되어 풍부한 수량은 물론 좋은 수질의 물이 나는 샘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골프장 용지로 들어가 메워지면서 이름만 남아있어 안타까운 상황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망해정 앞에 ‘건넛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건넛등에서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서 기와조각 등 주거지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 아래에 ‘솔무정’이 있는데 여기는 주민들이 ‘솔무랑지’라고 부르는 현재의 송무동(松茂洞)이다. 문헌에는 반송정(盤松亭) 곧 소나무로 해풍을 막는 방풍림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외에도 마을 곳곳에는 전통 서린 지명들이 많다. ‘미섬’(머구리섬, 깔집), ‘대섬’(깔망), ‘소맷봉’(차일봉), ‘와우물버찌’(도끼), ‘잿간나무’는 물론 서호정에서 도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구석물재’, 청수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태밋재’ 등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는 선사시대의 흔적인 고인돌이 18기나 남아있다. 마을의 북서쪽에서 바다와 인접한 차일봉에서 우두산으로 넘어가는 낮막한 능선부인 잔등마을에서 바우백이로 넘어가는 언덕 주위에 고인돌군이 모여있다. 마을 길을 조성하면서 고인돌의 위치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1980년대에 조사된 바와 같이 18기가 그대로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제일 큰 고인돌은 3m×2m40cm의 크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웃 기동마을에도 몇기의 고인돌이 있어서 정밀조사가 요구된다.
마을을 향하여 자리 잡은 우두산 중턱에 ‘영모각’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05년에 지었고 1990년대에 중수하였다. ‘영무각중수비’가 경내에 있다. 각 안에는 10개의 편액이 걸려있으며, 이서면으로 불리던 시절에 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설화
벌포라는 지명유래와 관련한 전설로 ‘고양할미전설’이 있다. 이는 현경면 현화리 성자동 마을 등에 전해 내려오는 고양할미샘의 전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고양할미가 현화리의 깔따구룰 없애기 위해 치마에 담아다가 무안 전역에 뿌리고 다녔는데,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후 이 마을 곧 벌포마을에 와서 얼마나 남았는가 치마를 벌려 보았더니 남아있는 깔따구가 전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마를 벌렸다.’라는 의미의 ‘벌포’라 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문자맞추기 등을 통해서 생성하는 지명인 ‘의준지명(擬準地名)’의 한 형태로 보이나, 벌포라는 지명이 문헌에 나오지 않으므로 구전의 의미는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경에서 서호리를 넘어 깔다구를 비롯한 각종 동식물이 교류하던 자연생태망이나 지리적 관계들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조사에서 서호리에 거주하는 정영춘 선생으로부터 채록한 전설이 있는데, 이는 나주정씨 종보(15호, 2008. 4)에 수록된 내용이라고 한다. 두 개의 전설이 있는 그 중에 ‘쇠머리전설’은 지명유래에서 설명하였고, ‘달바위 전설’은, 우두산 아래 창포만과 접해 있는 능선에 지름 6m 가량의 큰바위가 있다. 지금은 골프장의 영역 내에 속해 있지만 보름달 같은 바위의 모습은 유지되고 있다. 이 바위 옆에는 입구가 좁고 길이가 긴 동굴이 있는데, 그 굴속에는 여우 한 쌍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 가축의 피해가 잦아 주민들이 여우를 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잡지 못해 골칫거리였다. 덫을 놓아도 덫을 해체해 버리고 굴 앞에서 연기를 피워 질식사를 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굴속에서는 여우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던 한 쌍의 구렁이가 달바위 앞 큰바위의 그늘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며 큰바위에 벼락이 내리꽂는 것이었다. 주민들이 신성스럽게 여기는 달바위근처에서 상서롭지 못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서 벌을 내린 것이다. 특히 굴 속에서 편하게 잠을 자던 여우는 벼락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 버렸다. 또한, 벼락 맞은 바위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하늘이 보호해준 증표라 믿고 보관하려 하였으나, 새마을사업 등 각종 사업에 사용되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다. 물론 여우굴도 없어져 버리고 남은 건 달바위 뿐이라고 한다.
기록물, 문헌
지금은 사라진 망해정의 각종 현판과 편액은 나주정씨 재각에 보존되어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기리고자 서해바다가 잘 보이는 달바위 위에 망해정이란 정자를 지었던 뜻을 기리는 많은 시문들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참판을 지냈던 이행진(李行進)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바다의 도둑들과 길고 긴 7년 동안이나 싸웠으니/ 지나가는 원숭이와 학도 노량바다를 보며 우는구나/ 충신이 죽으니 나라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효자는 부모를 추모하여 물가에 정자를 짓는다네// 세상에 남긴 업적은 동방 천년의 역사에 남고/ 서호 바닷가에 울리는 가문의 명성은 만년에 이르리/ 공의 충의를 온전히 기려서 따라가려 하노니/ 이슬비 내리는 날에도 망해정을 오직 사랑하노라(海冠長驅大七齡 堪憐猿鶴露梁舲 忠臣死國禋官社 孝子思親涘一亭// 世蒹東方千古史 家聲西浦萬年溟 要將公議褒純行 爲愛遺廬日已零)’
현재 망해정은 골프장 건설용지로 편입되어 사라지고 우두산 능선 정씨묘역에 ‘망해정시려비’만 남아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정재철(농협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나주정씨 묘역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시 좌,우익 투쟁으로 유가족이 생김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서호리 퇴액비공장 이전추진 반대 대책위원회, 토암건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십수년 전에 서호리 일대에 기업도시가 추진되다가 포기되어서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아쉬워하고 있다.
기타사항
지리적으로 청계만과 창포만이 접해있어 풍광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전해오는 서호팔경(西湖八景) 곧 ‘서호리의 이름다운 여덟 가지 풍경’을 떠올려 본다.
‘승달조우(僧達朝雨) : 승달산에서 아침에 몰려오는 빗줄기/ 지봉제월(芝峰霽月) : 지취봉(芝翠峰)에 비추는 비개인 달빛/ 창포귀범(蒼浦歸帆) : 창포(蒼浦)로 돌아오는 만선의 고깃배/ 전리모연(田里暮煙) : 전리(田里)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양학석전(養鶴石田) : 양연리(養鳶里) 앞까지 펼쳐진 너른 석화밭/ 서호망월(西湖望月) : 서호(西湖)의 물결 위에 뜬 보름달/ 죽도청풍(竹島清風) : 죽도(竹島)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도대명사(道堡明沙) : 도대(道堡)의 밝은 은빛 모래사장’
여기에서 ‘양학석전(養鶴石田)’이 ‘백정만적(百町萬積)’과 서로 엇갈리며 혼용되고 있었지만, ‘양학리 또는 양연리 앞까지 펼쳐진 너른(백정의) 석화밭’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말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