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4리를 이루고 있는 연수동․새터마을은 도대로를 경계로 서호2리 신기마을 맞은 편에 위치한 자연마을로 40여세대 6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연마을이다. 얼마 전까지 서호2리의 신기마을과 한마을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분리된 연수동은 원래 창포만을 앞에 두고 방죽동, 중앙동, 새터, 감성골, 상여가 넘어가는 고개라는 돔메잔등, 죽산안씨의 선산 주변인 청진머리, 연수동 등 8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많이 이거하여 새터, 방죽동, 연수동으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무안군 마을유래지》에서는 원래 마을의 지형이 제비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연소동(燕巢洞)이라고 하였다가 편리한 발음 때문에 현재의 연수동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외의 관련 기록은 없으며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물을 찾아 마을에 왔다가 벼루에 담긴 물을 보고 연수동이라고 했다고도 하지만 주민들은 ‘제비네’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서 까치네(鵲川), 남안동(기러기), 사마동(말) 등으로 부르며 새나 동물의 형국을 닮아서 붙여진 자연지명의 형국이기 때문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에 대해서도 《무안군 마을유래지》에서는 ‘입향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오고 있지 않은나 임진왜란때 경남 밀양에서 거주하던 박씨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뒤로 흥동장씨가 물이 풍부한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구전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주민들은 1700년대 중반에 장수황씨 황익룡이 나주 동강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장수황씨가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황익룡과 관련한 자료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장수황씨인 황익재(黃翼再, 1682~1747) 공이 본관 및 이름자돌림이 비슷한데다가, 1711년에는 무안현감으로 재직하였음과 아울러 나주 조군의 통솔권과 영광군수 등을 역임했음에 비추어, 황익룡과의 형제 등으로 충분히 실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청계만과 창포만에 접하여 낮은 산과 구릉을 앞에 두고 뒤에는 청수리의 박달봉을 두고 형성된 마을의 형국은 날아가는 제비를 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제비형국의 마을은 두 개의 산이나 두 산의 끝이 뾰족하게 돌출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풍수상 이와같은 연소형국(燕巢形局)은 왕성한 기운으로 다산(多産)을 주관한다고 한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마을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반송정, 연수동(連水洞)으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이서면 연수동(硯水洞)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도 마찬가지로 청계면 서호리 연수동으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서 청계면 서호리 연약동(?)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이는 오기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현지의 지형과 형국에 따라서 붙은 지명인 자연지명(自然地名)이자 주민들이 말하는 ‘제비네’ 곧 연소동(燕巢洞)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와 비슷한 발음 내지는 행정담당자들의 편의에 의해서 붙은 ‘의준지명(擬準地名)’의 또다른 한 사례로 보이는 지명들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지명의 변천과정은 연소동(燕巢洞)에서 시작하여 연수동(連水洞)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서 연수동(硯水洞)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는데 1910년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동, 연수동, 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처음부터 창포만과 많은 연관을 갖고 있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창포만 간척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주민들마다 낙지, 숭어, 전어, 석화, 게 등을 창포만 갯벌에서 잡기도 하였고, 어장을 만들어 기르는 양식어업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고 한다. 특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창포만에 있는 ‘도치등’이라고 부르는 ‘도끼등’에서는 부녀자 한 사람이 하루에 8접(160마리) 이상의 낙지를 잡기도 하였으며, 곳곳에 소나무 가지를 꽂아서 놓는 석화양식을 통해 많은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창포만 간척지가 만들어지면서 생업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이 힘들어졌으며, 또한 이때 바다와 갯벌인 관계로 제대로 된 경작권으로 판정받지 못하여 보상까지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원래 이 마을은 예전부터 제대로 된 기와집 한 채가 없을 정도로 대부분 초가에서 살아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포만의 비옥함 때문에 낙지, 게, 석화 등을 채취하여 목돈을 마련하여 나라에 내는 세금만큼은 잘 내는 마을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마을의 별칭 또한 ‘여시동’이라고 불릴만큼 주변 마을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쪽파, 양파 등 밭작물의 다양화와 마을주민들의 부지런함으로 어떤 마을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청년회(서호1, 2, 3, 4리 합동)
공동이용시설
서호교회
전통식품/특산품
귀농인들이 벼, 쪽파, 양배추, 배추 재배 교육을 받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 풍족함을 주었던 창포만 바다와 갯벌이 간척되기 전에는 낙지, 곤쟁이, 게, 굴, 바지락 등이 많이 잡혀서 풍족하고 재미나게 살았으나, 간척되고 나서는 수입이 되지 않아 동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 목포 등의 도회지 공장으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다니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도끼등(도치등), 백정등(백정만들), 만개등, 버린개등, 방구바위, 장구바위, 상여바위, 솥바위, 해수찜구덩이(두 사람이 들어갈 구덩이). 달바위, 깃대봉, 두름봉, 큰깃재, 작은깃재, 박달봉, 말바위재, 서당골 외에 한국 지명총람에는 마을 앞에 있는 골짜기로 돔매잔등과 모리바웃재가 나온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 서당골 밑에는 옹기 가마터로 짐작되는 터가 있는데, 그 주변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를 비롯한 자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당골 주변에서도 조금만 깊이 땅을 파면 양질의 점토층이 나온다. 이곳 역시 해안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가마터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또한,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 마을의 남쪽에 해발 24미터의 낮은 구릉이 있고 동-서 방향으로 낮은 산들이 인잡하여 낮은 지맥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회청색경질토기편, 회색연질토기편, 석봉편 등이 수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써 온 동계책이 있었으나 마을의 지도자가 자주 바뀌면서 소실되어 지금은 1946년부터 써 온 책이 남아있다. 또한 개인들이 돌아가면서 관리하다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장한 어머니상을 두 번이나 탄 박양례 어르신(1938년생)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한국전쟁 때 좌-우익의 이념 싸움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여러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고, 이 마을에서도 그 사상의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마을에 좌익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한동안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져 서로를 모함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후유증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1999년부터 건설된 태양광이 약 20군데나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위태로우며, 퇴액비공장 이전추진 반대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