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무안 쪽으로 약 3km지점에 있다. 솔치와 대성동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성동 마을을 가르며 광주-목포 간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다. 솔치마을은 송치(松峙)라고도 불리며, 깃대봉 너머에 있는 도장골과 붓당골을 포함하여 송현1리에 속한다.
지명유래
솔치마을은 예전부터 ‘똘똘이 잔등’을 중심으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라고 하여 솔치로 불렸다. 이는 사실 상마리 용계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이었으며, 60년대까지는 무성하게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옆으로 복용리 대곡마을로 가는 길이 있는데, 예전에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길이 나 있어서 주민들은 솔치재라고 부른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이 마을에 대대로 살고 있었던 사람은 나주정씨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주민들이 일로와 무안읍 등으로 피난 가고 남아 있던 집들도 불에 타 없어지면서 폐촌이 되었다. 이후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임란이 끝나고 난 후 옆 마을인 강정리에 살던 나주 정씨 정지용(丁智龍, 자-순서, 호-효우당, 1720-1760)이 들어와 다시 마을을 형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마을조사에서 채록된 주민들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원래의 마을 형성은 마을 뒤 할멈당산 주변에서 인동장씨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렇듯이 마을 뒷산에는 인동장씨와 나주정씨의 묘가 있으나, 현재 거주하는 주민 중에 인동장씨는 없고 나주정씨와 장흥고씨들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마을의 지형이 ‘소구레형국’이라고 한다. 소구레란 ‘수구레’라고 부르는 말로 ‘소의 가죽과 살 사이에 붙은 피하조직을 부르는 명칭’이다. 이는 소가 배부를 때도 있고 배가 고플 때도 있는 것처럼, 마을주민들도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해지기도 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크게 성공한 사람도 별로 없지만 잘못된 사람도 없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에서 소의 힘과 안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누구나 노력하면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대성동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의 ‘각골’이라는 곳에는 길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소뿔바위’가 서 있었다. 현재는 숲속에 한 개의 바위만 있다고 한다.
마을성씨
지금은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명칭이 처음 기록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송치(松峙)로 나오며, 1912년의 기록에서 일서면 송현리, 송정리로 나온다. 1917년에 청계면 송현리, 북산리, 농소촌, 호산동, 연화촌, 송정리, 대성동 등으로 나오다가, 1987년에 이르러 청계면 송현리 송치 곧 솔치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나주부 무안현 일서방에 속했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일서면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일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일서면(46개리), 이서면(22개리), 삼향면 대치,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소구레형국’이라는 마을의 지형이 그렇듯이 마을주민들은 예전부터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마을이 좁고 협소한데다가 저수지가 없어 농사를 짓는데 대대로 애를 먹었다고 한다. 많은 샘들이 있어서 식수를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농사는 말그대로 천수답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1950년대 후반에 ‘청수제’가 조성되면서 도장골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이후로 농사를 지으면서 화합하는 농촌마을이 되었다.
주요시설
청계2농공단지
마을변화
마을과 경계를 이룬 청수리에 청계1농공단지가 들어온 데 이어서 마을에 청계2농공단지(2011년 준공)와 레미콘공장 등이 들어오면서, 농공단지의 배후마을로써 직장인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도로 주변으로 귀촌인들이 많이 이주해와서 새로운 주택을 건립하고 있다. 하지만 주로 양파, 마늘을 비롯하여 밭농사를 짓는 마을주민들과 함께 단합하고 화합하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도장골 마을 앞으로 거대한 석회층의 수맥(水脈)이 지나고 있어서 가끔씩 지반이 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수맥은 무안읍 중사지의 못샘을 거쳐 화설당샘-농공단지샘-상마정샘 그리고 남성리의 시여샘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름에는 따스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귀한 샘물이다.
동/식물
현재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각골, 각골샘, 뒷매, 매봉, 딴매, 송현보, 서당뫼, 초분골, 똘똘이잔등, 방죽골 등이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각골, 각골샘, 뒷매, 매봉, 딴매, 송현보, 서당뫼, 초분골, 똘똘이잔등, 방죽골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오래 전에는 마을에 있는 영감당산과 할멈당산 그리고 마을 뒤에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어서 당산제를 지냈었으나, 현재는 별도의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12월 31일에 동계를 지내면서 한 해의 마을일을 처리한다.
유물, 유적
마을에 있는 두 개의 입석은 선독바위라고 부르는 ‘영감당산’과 ‘할멈당산’으로 일컫는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영감당산은 1m70cm 정도 되는 크기이며, 할멈당산은 영감당산과 많이 떨어진 마을의 윗쪽에 있는데 높이가 1m정도의 크기이다. 이 입석들은 살맥이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이곳 솔치와 도장골마을 주변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앞에 1924년에 건립된 달성배씨 재각인 ‘추원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그리고 팔작지붕에 삼문(三門)을 갖추고 있으며, 재각 안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설화
원래 인동장씨들이 살았던 마을이 폐촌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오래 전 어느날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에 들어와 탁발하면서 공양했는데, 주민 한 사람이 시주는 하지 않고 공양그릇을 깨버리고 중을 쫓아버렸다. 쫓겨난 중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마을에 해를 주려고 하였다. 다음날 중은 다시 마을로 찾아와 시치미를 떼면서, 이 마을이 번성하려면 마을 입구에 있는 “쇠뿔을 깨뜨려버려야 한다. 마을의 좋은 기운을 그 쇠뿔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반대로 가르쳐 주었다. 주민들은 마을에 해코지하려는 중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날 마을 앞의 쇠뿔을 깨뜨렸다. 그러자 깨진 쇠뿔에서 나온 금송아지가 피를 흘리면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부터 웬일인지 마을에는 안 좋은 일만 생기고, 결국에는 마을이 폐촌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쇠뿔바위에는 그때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정영재(청계농협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마을의 상당부분 땅이 삼학간장 문봉엽 씨의 땅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수탈당한 토지를 해방 이후 분배하는 과정에서 문봉엽 씨가 개입한 결과로 여겨졌다. 이는 그가 이 마을과 아무 연고가 없기 때문으로, 지난 마을조사에서 기록되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솔치마을 앞에 있는 산을 깃대봉이라 하는데 옥녀봉이라고도 한다. 그 산은 김해김씨 현화문중의 산으로, 마치 옥녀가 연주를 하며 즐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옥녀봉 아래는 거문고라 하고, 그옆에는 방구봉이라고 부르는 북봉, 또한 피리봉이라고 하는 젓대봉 등의 지명을 가진 봉우리들이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청계2농공단지, 대우농장.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의 입향조인 나주정씨와 관련하여 지난 마을조사에서 부기한 일로읍 산정리의 나주정씨 입향기록은 다음과 같다. ‘산정리에 있는 <부사정공나주정씨묘표>에서는 나주정씨 무안의 입향조로 26세인 정대흥(丁大興, 1428~1498, 호-시옹(詩翁))공으로 보고 있다. 공은 1428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는데, 자품이 영수하고 지개가 견확하여 학문에서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수재였다. 단종 조에 급제하여 퉁훈대부, 호조정랑, 집현전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연안부사를 제수받았다. 이후 사육신의 정변이 있고서, 당시 학문적 교분을 맺어왔던 박팽년, 성삼문 등이 변을 당하자,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공은 벼슬을 버리고 청계면 송현리 솔치마을에 은둔하여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