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리는 청계면소재지에서 무안 쪽으로 약 3km지점에 있다. 솔치와 대성동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성동 마을을 가르며 광주-목포 간 ‘국도1호선’이 지나고 있다. 대성동마을은 아래쪽에 있는 솔치마을로부터 시작하여 승달산자락까지 펼쳐져 있는데, 대성동, 연화촌, 호산, 상동, 용수촌, 옥동골, 웃버든, 북산, 솔깃재, 새태 등 10여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회관은 웃버든에 있고, 그 오른쪽에 대성동이 있으며, 그 앞에 새태가 있다. 웃버든 앞길 건너에는 연화촌이 있고, 옆에는 옥동골, 주유소 건너편에는 북산, 대성저수지 밑에 상동이 있다.
지명유래
대성동(大成洞)은 송현2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 있었던 ‘대성실행조합’이라는 농촌진흥조합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으로, 크게 이룰 수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물론 조선시대까지는 ‘장송정(長松亭)’이라는 지명이었는데, 이는 송현리라는 지명 자체가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것처럼, 이 마을도 솔치마을과 같이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정씨(丁氏) 정영효(1530-1575, 자-성미, 호-의암)이다. 공은 솔갯재 너머 태봉마을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는데, 천성이 강직하고 학문에 큰 뜻을 두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성씨자료에는 정대흥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또한, 마을에는 나주정씨 외에도 진주강씨, 김해김씨, 기계유씨, 장수황씨 등 여러 성씨가 섞여서 살고 있다. 진주강씨 입향조는 강계공(姜啓恭, 호-추담)으로 수은 강항의 5세손이며, 영광 불갑면 운제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인 이 마을을 찾아서 들어왔다. 공은 학문이 높았으나 영리를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김해김씨 입향조는 김석권(1837-1916, 자-국서, 호-장곡)으로, 공은 현경면 오류리 곡지동에서 세거하였으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주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주산인 용지봉(龍池峰)은 용이 승천해서 넘어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며, 솔치마을 앞 도장골 뒤에 있는 깃대봉을 옥녀봉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예전부터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인데, 마치 옥녀가 연주를 하며 즐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옥녀봉 아래는 거문고라 하고, 그 옆에는 방구봉이라고 부르는 북봉과 피리봉이라 하는 젓대봉 등의 지명을 가진 봉우리들이 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약수가 유명하여 사람들이 물을 퍼가기도 했다. 김해김씨 현화문중의 소유이며 옥녀봉 정상에는 나주김씨 묘가 있기도 하다.
마을성씨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명칭이 처음 기록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장송정(長松亭)으로 나오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서면 송현리 대성동(大星洞)으로 바뀌었다. 이후에 ‘크게 이룰 수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대성동(大成洞)으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나주부 무안현 일서방에 속했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일서면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일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일서면(46개리), 이서면(22개리), 삼향면 대치,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교통과 물류의 요지로써 조선시대에도 번화가의 중심지로 ‘장송장’이라는 시장이 있었다. 남녘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고, 상마정 앞까지 뱃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주막도 여러 개가 있었다고 하며, 《면성지(綿城誌)》에 보면 ‘고을 남쪽 20리 일서면에 장송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시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송현리와 상마리 경계 즉 청계초등학교 주변을 ‘장등’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근대가 시작된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 마을은 청계면에서 최고의 번화가였다. 북산에 진흥조합이 있어 당시 청계면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마을에는 드물게 목욕탕, 회관, 베틀기계, 정미소 등이 있었다. 광복이 되자 조합이 보유하고 있던 많은 토지들이 몇몇 유력자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공동의 소유가 아닌 개인소유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6.25 한국전쟁 때에 피해가 전혀 없었다. 마을이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어 좌-우익 인사가 활동하기 좋아 큰 피해가 우려되었는데, 정작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주요시설
청계농공단지, 수정개발회사, 전원교회, 대성주유소, 호남수석 등.
마을변화
마을 앞에는 2011년에 준공한 청계2농공단지가 있으며, 지난 1990년대에 시작하여 20여 년째 진행된 마을 뒤의 석산개발로 주민들은 몸살을 앓았다. 극심한 자연훼손이 이루어졌고 현재는 토석채취가 끝나고 빈 공터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지역에 SRF(고형 폐기물 연료) 열병합발전소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서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개발위원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용이 승천해서 넘어갔다는 의미를 지닌 마을의 주산인 용지봉에는, 석산이 개발되기 전에는 큰 ‘납작바위’가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용지봉 뒤로 기우제를 지냈던 무재봉이 곧바로 승달산으로 연결된다.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거대한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산제를 지내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었다. 하지만 70여 년 전에 불이 나서 당산제도 그치고 현재는 당산나무 한 그루만 남아있다.
유물, 유적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용지봉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며, 용지봉 뒤의 무재봉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에 있는 대성저수지 위의 큰고랑에는 옹기나 도자기를 구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도 주변에서 옹기나 도자기 구을 때 나오는 슬러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하얀 점토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전원교회는 대성교회의 전신으로, 청계면에서 복길교회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상동에서 출발하여 용수촌으로 옮긴 다음 지금의 옥동골에 자리 잡았다.
또한, 뒷골에는 1976년에 준공된 나주정씨 제각인 <장송재>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현판이 5개나 있다. 그리고 송갯재 앞에도 전 재경무안향우회 회장이었던 문충식 선생 송덕비가 있다.
설화
호산마을 뒤의 불당골이라는 곳에 구전으로 전하는 ‘송감사묘’에 대한 설화가 전하고 있다. 절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불당골에는 송감사의 묘라고 불리는 큰 봉분이 있다고 한다. 물론 송감사에 대한 기록이나 증거는 없지만 주민들은 송감사가 주변에 살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여긴다. 이는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기》‘현재 하마정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죽림지역에 송감사라는 관리가 살고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갔다가 상마정이란 곳에서 말을 다시 타고 지나갔다.’라고 하여, 말에서 내려 걸어간다고 해서 ‘하마정(下馬亭)’, 그리고 다시 말을 타고 간다가고 하여 ‘상마정(上馬亭)’이라는 마을 지명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지역에는 지금도 밭을 갈 때면 쟁기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와조각이 나온다고 하며, 송감사의 묘 앞에 있었던 석인(石人) 두 기를 예비군훈련을 받던 예비군들에 의해 현재 청계중학교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강대원(군농협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대성동의 10여 개 자연마을 중에서 특히 용수촌은 한때 100여 호가 살 정도로 주민들이 많이 있었으나, 오래전에 불이 나면서 폐촌이 되다시피 했다.
-마을 뒤 저수지위에 석산개발이 1990년대 시작하여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좁은 도로에 하루에도 수백대씩 대형차의 소음과 먼지로 극심한 피해를 겪었는데 이제는 마무리가 되어 수십만평의 토지에 쓰레기장을 유치하려고 해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저지 투쟁에 나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