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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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봉리 청계면 태봉마을 작성
  • 태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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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가구수 91세대, 인구수 157명.
자연마을 구성
태봉리(台峰里)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무안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목포간 국도1호선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태봉마을은 태봉리에 속한 마을로 구릿골, 구시내, 상태, 하태, 뒷돔(뒷똘)으로 이루어졌다. 상태와 하태는 예전에 마을을 가르며 길이 나 있었는데, 길의 위쪽을 상태라 하고 아래를 하태라고 불렀다. 태봉은 청계면 태봉리의 마을로 마을의 입지조건이 여러 면에서 청천리 맑으내마을 곧 청천리와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광-목간 도로변 아래와 위로 위치한 마을로 달성배씨의 집성촌이라는 것과 함께, 아름드리 당산나무들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각각 청천사와 태봉사라는 사당을 통하여 달성배씨 조상들을 모시며, 승달산 줄기의 증봉과 태봉산에 안겨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마을이라는 점 등이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태봉이 큰집, 청천리의 상천천이 작은집이라고 한다.
지명유래
태봉(台峰)이라는 지명은 풍수적 지형의 이름으로 마을 뒷산의 이름이 태봉산(台峰山)이어서 붙었다. 삼태(三台)는 별이름을 나타내는 말로 큰곰자리에 있는 상태, 중태, 하태(上台, 中台, 下台)를 나타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이름하기도 했다. 또한, 세 곳의 맥을 이름하는 호랑이를 지칭하기도 한다. 태봉은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일봉(一峯)은 ‘태봉산’인데 이 마을의 주산을 말하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이요, 이봉(二峰)은 숫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는 형을 가진 이 마을 앞 ‘똘당산’이요, 삼봉(三峰)은 청계북초등학교 뒷산인 ‘호봉’을 말하며, 이를 합하여 삼태라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의 뒷산인 태봉산이 복호형(伏虎形)이라 하여 ‘복호’ 또는 ‘태봉’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달성배씨 배수문(裵繡文, 1456~?, 자-찬보, 호-승헌)으로,《마을유래지》에서는 임진왜란의 공신인 배명(裵蓂, 자-요단(堯端), 호-희암(希菴))으로 나온다. 하지만 생몰년 미상인 배명이 조선 중기 선조 시기인 1580년에 등과(登科)하여 광해군 10년 1618년까지 활동한 기록으로 보아서, 청천리 입향조인 증암 배회(甑巖 裵繪)공의 아들인 배수문이 옆 마을인 태봉리로 분가했다는 추정이 온당해 보인다. 생육신인 남효은, 이맹전 등과 교유하던 배회 공은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세조 2년 곧 1456년에 자신이 세거하던 경상도 칠곡에서 멀리 무안의 청천리로 이거 해온다. 그리하여 수문, 수채, 수영, 수장 등 네 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장남인 수문이 장성하여 같은 승달산 아래 자락인 태봉에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수문 공은 승달산의 맥을 힘차게 이어받은 복호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른쪽에는 우와산의 소뿔바위를, 앞으로는 소가 먹이를 먹는 구수둠벙 그리고 마을 앞 서쪽에는 개바위가 있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지(吉地)인 이곳에 마을을 조성하였다. 이후 달성배씨에 이어 김해김씨, 파평윤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 중에서 파평윤씨 문중이 제일 먼저 쇠퇴하여 마을을 떠났고, 이어 광산김씨가 떠났고 지금은 김해김씨와 달성배씨 두 성씨를 중심으로 전원형 주택을 지어 이주한 이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태봉(台峰)이라는 마을이름 자체가 마을의 뒷산인 태봉산이 복호형(伏虎形)이라 하여, ‘복호’ 또는 ‘태봉’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듯이, 엎드린 호랑이와 닮은 마을형국이다. 여기에서 자칫 동음인 청계리의 태봉산(胎峯山)과 혼돈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곳의 태봉산(台峰山)은 아이의 태(胎)와는 전혀 다르다. 태봉산 정상의 사자바위에는 한 사람의 시신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투장(偸葬-명당자리에 남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을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시체를 파서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 빈번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성씨
배씨, 김씨, 서씨, 옥씨, 유씨, 이씨, 장씨, 전씨, 정씨, 조씨, 최씨, 홍씨 등이 어울려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의 변화를 문헌 기록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상태봉, 하태봉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 청계면 태봉리 태봉으로 나온 이후 현재까지 태봉으로 쓰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태봉마을의 행정구역은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무안현 이서방에 속했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이서면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이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이서면 22개리가 일서면과 삼향면,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하는 과정에서, 이동마을을 합하여 청계면 태봉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달성배씨를 중심으로 김해김씨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작일촌의 집성촌인 태봉마을은 전통적으로 서로의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살아왔다. 따라서 마을에는 오랜 전통과 문화가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마을의 여러 생활환경은 물론 주민들의 일상도 안정된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
주요시설
신성교회, 신불사, 하늘재가복지센터.
마을변화
마을 뒤편의 골프장 건설 과정에서 생겨난 갈등과 혼돈으로 주민들은 몸살을 앓았다. 전통적인 집성촌으로써 예절을 중시하고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던 주민들의 순박한 삶이 골프장 건설이 시작되면서 반목과 갈등으로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골프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허울 뒤에서 마을의 하천공사는 물론 배수로와 농사를 짓는 농수로마저 정비되지 않은 낙후된 마을 환경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마을 이장을 비롯한 리더들이 앞장서서 주민들의 마음을 합심하도록 이끌어, 전라남도에서 지정하는 살기 좋은 마을로 지정됨은 물론 하천과 마을회관 정비 등 각종 마을 활성화사업을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당산나무를 살리기 위해 7채의 집을 없애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했던 마을의 당산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개발위원회, 새마을지도자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교회
전통식품/특산품
벼농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자연의 풍상과 재해 그리고 각종 재액을 막아온 당산이자 마을숲인 우실이 있다.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입향조인 배수문 공이 마을 앞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마을 위에서 불어오는 ‘을진풍’을 막기 위해, 30여 그루의 장수목과 팽나무 등을 마을 앞 시냇가에 심어 태풍을 막고 환란과 각종 재앙을 막아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마을이 되게 하였다. 지난 마을조사에서 밝혀낸 이 마을의 당산숲이 조성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태봉의 지형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라 숲을 좋아하는 호랑이를 위해서 당산 숲을 형성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몇 년을 사이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을진풍(동남풍이라는 제주도 사투리)을 막기 위해서 형성된 숲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바람을 막지 못하면 마을이 폐촌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동/식물
지금도 마을에는 팽나무, 느티나무 등이 많이 있는데 예전에는 더 많은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무가 줄어든 것은 주민들이 보릿짚을 나무 주위에다 쌓아놓은 것이 빌미가 되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릿짚은 양잿물 성분이 많아서 새어 나온 양잿물에 의해 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곳곳에 전해오는 지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삼왕묘 아래 지역인 구시내, 저수지에서 마을까지 십리가 못되고 구리가 된다고 붙여진 구릿재, 태봉 앞에 있는 들을 일컫는 가쟁, 구릿골에서 몽탄의 우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각커리재, 태봉교 아래에 있는 개바위, 태봉 입구에 있는 거북이 모양의 남생이바위, 먹굴 동쪽의 해가 뜨는 골짜기인 동막골, 그리고 동막골제와 태봉제가 있으며, 구시내 남쪽에 있는 똘당산, 태봉 앞에 있는 보를 똘땅보라고 한다. 이외에 동막골 남쪽에 있는 마염산, 정개이 옆에 있는 보밋들, 먹굴 남쪽에 있는 들을 복새동, 먹굴 앞에 있는 굴을 샛들이라 하며, 모양이 쇠뿔처럼 생긴 쇠뿔바위와 이동마을의 다른 이름인 구릿골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들판인 정개이와 가쟁에 있는 중보, 마을 앞의 다리인 태평교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에서 매년 정월 14일에 이루어지던 당산제 또는 도제는 우리 지역의 얼마 남지 않은 당산제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자산이었다. 정월 14일 밤에 웃당산을 시작으로 아랫당산까지 이어지는 태봉마을 당산제의 제관은 3명으로, 농악의 징, 북, 깡쇠를 치게 되며, 축관은 깡쇠(꽹가리)를 잘 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웃당산은 생식으로 아랫당산은 화식으로 제물을 준비하며 새벽 세 시를 넘기지 않는다. 제의 목적은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질병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윗당산의 당산영감은 마을의 양어장 부근에 있고, 당산할멈이 있는 아랫당산은 마을 입구에 있다.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게 되어서 안타까운 상황이다.
유물, 유적
서해의 바닷물이 승달산 기슭과 맞닿는 해안 간석지인 태봉마을에는 선사시대의 지석묘인 고인돌이 마을 입구의 거북바위를 비롯하여 수십 기가 있었다. 하지만 밭을 경작하기 위해서 깨거나 묻어버려서 많이 없어져 버렸다. 현재 마을입구와 구시내에 각각 1기씩 2기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예전 마을조사를 하면서 처음 찾았을 때는 마을입구에 7기, 윗당산나무 아래 1기, 구시내에 2기 등이 있었으나, 두 번째는 마을입구에 1기, 윗당산나무 아래 1기, 구시내에 4기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족히 500여 년을 집성촌으로 이어온 태봉마을에는 달성배씨 사당인 ‘태봉사’와 김해김씨 묘당인 ‘삼왕묘’가 있다. 태봉사는 마을의 오른쪽에 있으며, 1980년 3월에 달성배씨 시조를 주벽으로 모시고 역대의 명조들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건립되었다. 매년 음력 2월 말일에 제사를 지내며, 여기에는 문양공 배지타, 무열공 배현경, 달성군 배운용, 금헌 배정지, 율헌 배균, 증암 배회, 희암 배명, 효우당 배협 등 8위의 선조를 모시고 있다. 또한 마을 뒤에 있는 삼왕묘(三王墓)는 김해김씨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 양왕 김구형, 홍무대왕 김유신 등 세 왕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우로, 정면 3칸의 사당과 전면 3칸의 내삼문이 있는 전형적인 문중사우 구조이 다. 이는 1946년 태봉리에 거주하는 김용운, 종욱 두 형제가 가산을 털어 설립한 사우로, 처음에는 두 형제에 의해 제사를 지내다가 지금은 군내의 김해김씨 후손들이 매년 봄가을 2차례 향사를 크게 지내고 있다. 이에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두 분의 공덕을 기리묘당 입구의 길가에 공적비를 세웠다. 이외에 구시내와 산당에 나주정씨 제각이 있다. 또한, 최근 생긴 만남의 길 도로 옆 청수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에 ‘태봉도요지’가 있다. 청수리도요지라고도 하는 이 도요지는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데, 아름다운 청자유가 칠해진 고려청자풍의 파편 등이 많이 출토되어 청자와 인화문의 혼요가 아니었나 추정되는 도요지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유서 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비석이 많다. 마을 입구에는 한국전쟁 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거나 부상 당한 호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조전우비(弔戰友碑)를 비롯하여 애향비와 효행비, 열부비, 효자비, 공덕비, 선행비, 유적비 등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효우당배공유허비(1967), 청은배종현시혜공덕비(1996), 추당배화규공적비(1976), 수소재선생배공유적비(1990)와 사당인 선환재가 있다. 또한 금포선생달성배공사적비(1989), 감역청파배공사적비, 태암배세응유허비(1990), 죽포김종선승선실적비(2001) 그리고 삼왕묘안에 1998년 세운 가락국태조대왕성적비, 가락국양왕유적비, 신라흥무왕기적비가 있다. 그리고 1993년에 세운 열부남원양씨기적비와 그 옆에 열녀비와 1984년에 세운 달성배씨3효자각(효자모헌배공사적비, 추은배공효행비, 지헌배공선행비) 등이 있다.
설화
태봉사 뒷산에는 주민들이 고분으로 여기며 ‘말무덤’이라 부르는 커다란 봉분이 있다. 굉장희 큰 고분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나무와 잡초가 자라고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봉분으로 볼 수도 없으며 파헤쳐진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말무덤이란 ‘몰무덤’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민들 역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아서 죽어 묻힌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마을조사에서 확인한 기록으로는 5기가 있었다고 하나 1기밖에 발견 못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태봉사지(향교로 보냄/ 향교 보관됨)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정덕근 장인(장승솟대, 민속품)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태봉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모시고 있지만 특히, 1967년에 세워진 효우당 배협의 유허비는 나라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표이다. 그는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재주도 특출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평소 빈틈없이 공부했고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며 형제간에는 우애를 잘 지켜 마을사람들이 ‘효우당(孝友堂)’이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이 왜구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장인 김천일 장군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지켜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며, 태봉사에 배향하고 있다. 이외에 마을이 배출한 현대의 인물로는 배명(도교육감), 배준태(해군준장), 배충령(대령), 배석현(육군중령), 배석준, 배운기(면장), 배석연(초당대 교수), 배대석(향교 전교)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효우당 배협 공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신, 갓 등이 태봉사에 묻혔다고 한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되었던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이 마을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이라고 하겠다. 주민들은 마을 뒤편 승달산에 추진 중인 골프장 조성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무안군을 비롯한 전국 관련 관공서 등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승달산의 자연환경 훼손과 지역 주민 간의 위화감을 조성하여 마을공동체를 파괴함은 물론, 농업을 천직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지하수를 오염시켜 상수도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골프장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량 이동 소음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 가축 유산, 친환경 농사 등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으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토사 유출과 자연재해, 태봉천 하류와 창포호 및 청계만 오염을 우려하며, 500년 이상 지켜온 마을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운동은 지역사회 각계 및 다양한 단체들의 지지를 받으며 확산되어, 법원의 1심 판결에서 승소했으나 2심과 3심에서 배소하였다. 이후 주민들의 1인 시위 등으로 대처했으나 결국 골프장 출입로가 마을을 피해 남안리로 가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골프장의 오염수가 계곡을 통해서 마을로 내려오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는 무안군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계곡 위의 구시내에 있는 팽나무들도 장관이다. 이외에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지석묘도 바위 표면에 내린 푸르스름한 이끼와 함께 오랜 역사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수년 전까지 온 마을의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마을에서 벌이던 당산제도 자랑거리이며 2023년에는 전라남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무안유통영농조합, 장수옥돌침대, 양어장, 하늘조경농장.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태봉사는 1980년 3월에 작고한 배길연 씨가 터를 닦고, 목재는 동네에서 부담하였으며, 서울의 일가분들이 모금을 하여 건립하였다. 하지만 마을의 사당은 향교 3곳 이상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무안향교, 나주향교, 정읍향교의 승인을 맡고서야 온전히 건립할 수 있었다. 현재 태봉사에 있는 가마는 마을에서 결혼하는 신부들이 수십 년 전까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조사된 ‘태봉가(台峰歌)’는 다음과 같다. ‘승달산 정기 받아 뭉쳐진 향토/ 오백여 년 살아나온 전통의 향토/ 유서 깊은 정자나무 앞 옆에 끼고/ 태봉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모여라/ 태봉 청년 백여 청년아/ 아아 장하도다 그 이름/ 태봉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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