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면 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석용리(石龍里)에 속한 석용2리 용흥마을은 봉대산 줄기를 타고 내린 낮은 구릉에 용흥, 신기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현재 지명인 용흥은 용흥동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용동이라고 부르다가 용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흥(龍興)이란 지명은 용이 흥한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데, 1968년도에 마을 앞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용이 물을 만나 비상할 수 있는 형국이라며, 주민들은 앞으로 마을이 번창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자료에 따르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담양전씨 18세손인 전익화(田益華, 자-성보, 호-호은) 선생으로 원래 나주에서 세거하였으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 구렁목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출한 용모을 지녔으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자질로 주위의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에 정진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고 한다. 자료에 공의 생몰연대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담양전씨 대동보를 통해서 확인해 본 결과 1600년대를 전후해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것도 빠르면 1600년대 초반 늦으면 16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담양전씨 대동보를 자세히 보면 전씨들이 훨씬 이전에 무안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11세손인 전실(田實, 자-신보. 생몰연대 미상)은 현재의 무안 몽탄인 석진의 사호강을 보고 너무 사랑하여 그곳에서 풍월을 읊으며 지냈다고 한다. 이어 후손들의 묘는 석용리 칠오지산(七五地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해제에서 처음 들어온 성씨를 말할 때 서전동김(西田東金)이라고 한다. 서쪽에는 전씨 즉 담양전씨가 먼저 들어왔고 동쪽에는 김씨 즉 김해김씨가 먼저 들어왔음을 말한다. 서쪽은 석용리 감정과 용흥마을을 말하고 동쪽은 만풍리 신만 마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담양전씨 입향조로 추정되는 전익화보다 훨씬 이전에 전씨들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처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이 무렵에 전익화 공이 정착한 곳은 감정저수지 위에 자리 잡은 텃골이라고 부르는 외남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감정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담양전씨들만 100여 호가 살았었는데, 전염병이 돌면서 마을을 비우고 맞은 편인 용끝에(龍尾洞) 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가 용흥마을로 오지 않았는가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지명도 용미동의 이름을 따서 용이 흥한다는 의미의 용흥동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또 다른 성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입향조는 밀약박씨 박시진(자-인숙, 1840∼1897) 선생으로, 마을의 형성은 마을 뒤 서당골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주춧돌과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봉대산에서 산줄기를 타고 힘차게 뻗어 내린 두 개의 맥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쿠리형의 아늑한 곳으로, 왼쪽의 안산과 오른쪽의 연꽃 모양의 연등산이 그것이다. 안산 위에는 칠유지(七酉地) 또는 칠오지(七五地)로 부르는 명당터가 있다. 칠유지는 봉대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산줄기에 있는 7개의 봉우리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예전에 석산마을 앞 민대둑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의 지형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 연화부수형은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태를 상징하며 풍수지리에서 매우 길한 형국을 뜻한다.
또한, 마을 뒤 용동골에는 해제 8명당 중 하나인 장군대좌혈(將軍大坐穴)이 있다. 장군대좌혈은 풍수지리에서 매우 강력한 기운을 가진 명당(明堂) 중 하나로, 장군이 위엄 있게 앉아 있는 형상을 상징하는 길혈(吉穴)로써 권위, 재물, 자손의 번영을 모두 갖춘 희귀한 지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이 명당터는 일찍이 신안주씨들의 문중 묘역이었는데, 이후 남양홍씨 등의 타 성씨들이 묘지로 쓰기 위한 각축을 벌이기도 하였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이 마을의 지명은 채정리(采畊里) 곧 챙골, 또는 용동, 방아골로 불린 춘동(舂洞) 그리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의 신기(新基) 곧 새터로 불렸다. 이외에 천호 터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집들이 천호(千戶)가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조선시대 수군 벼슬 중 만호 밑에 있는 천호라는 벼슬아치가 살았다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문헌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에 해제면 용흥동, 그리고 1917년에 해제면 석용리 용흥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마을이 포함된 석용리는 함평현 해제면에 속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무렵에 무안군 해제면 용흥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후 해제면 석용리 산하의 용흥리가 되었다가, 현재는 해제면 석용2리 용흥으로 소속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용흥제(저수지)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용흥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이 마을은 특산 농산물인 조생양파 주산지이다. 따뜻한 해양성기후와 사질양토의 좋은 토질이 펼쳐져 있으며, 서리가 가장 늦게 오고 눈이 많이 오는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봄과 여름이 늦게 오기 때문에 양파의 생육기간이 길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조생양파는 맛이 뛰어나고 단단하며 아삭한 식감에 우러나는 생즙도 풍부하다. 또한, 저장성도 좋아 용흥동 양파라면 상인들이 값을 많이 쳐 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마늘, 양배추 등 다른 밭채소들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는 저수지인 용흥제(龍興堤) 너머에 간척지인 ‘민대들’이 펼쳐져 있다.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막으려다가 뻘이 너무 깊어서 실패만 하다가 이후 1968년에야 축조하였다. 물론 이 마을에는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원래 물이 많아 밭곡식을 기를 수 있어서 예전부터 챙골(采畊里)로도 불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봉대산과 니성산은 금광이 많이 개발되었다. 특히 이 마을 안산에는 여러 개의 금광굴이 있을 정도로 금맥이 많이 뻗어 있었다. 지금도 채광업자들이 자주 안산을 비롯한 봉대산 일대를 탐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 앞터가 저수지가 되었지만,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에도 이 터는 물이 잘 나오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안산에서 채굴한 금을 이 물로 세척하여 분리하기도 하였다.
이 저수지 아래를 수랑들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서 지하수를 개발했던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개흙층이 19m나 되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고래, 한아지, 잔등, 수랑들, 신기마을로 가는 돈단, 황장목이 있다는 황장맷가, 텃골, 방아들고랑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연화부수 지형의 정점인 연등산에는 주민들이 김장성으로 부르며 무안감리를 역임한 초정 김성규(草亭 金星圭, 1863~1936)의 할아버지 묘가 있다. 특히 이곳에는 무덤 뒤에 달바위가 있는데 정월 보름에는 마을주민들이 모두 나와서 달맞이를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보름달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던 곳이다.
유물, 유적
연등산 능선에는 <연여선생여산송공교사비>가 있는데, 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는 교사비(敎思碑)이다. 흔히 송상숙교사비로 불리는 이 공적비는 중암 김평묵 문하에서 배웠던 송종화의 비로 1976년에 제자들이 세웠다.
또한, 마을 중앙에는 밀양박씨 문중에서 배출한 효자 박준석과 열부 김해김씨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7년에 건립한 <효자밀양박공/열부밀양박씨실적비>가 있다.
설화
해제 8명당의 하나로 장군대좌혈의 형국을 지닌 용동골의 명당터는 원래 신안주씨의 문중산인데 여기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혈자리 주변에 벼락바위와 장군바위가 있는데, 장군바위에 핏자국처럼 빨간 무늬가 있어 주민들은 아기장수가 부모에게 죽임을 당할 때 흘린 피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이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보니 묘지터를 둘러싸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군대좌혈 부근은 신안주씨들 묘가 차지하고 있는데, 주씨들 묘역 한가운데 전혀 다른 성씨인 남양홍씨 묘 1기가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홍씨들이 주씨들 모르게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도장(盜葬)을 한 것이라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에 있는 <효자밀양박공실적비>의 주인공인 효자 박준석(朴俊碩, 1814∼1832)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에 모친이 병에 들어 위독하게 되자 자기 손가락을 단지(斷指)하며 병구완하였다. 그러나 끝내 모친이 운명하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조석으로 묘에 올라가 통곡하였다. 자식도 두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조카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해제면의 진산인 봉대산은 백제시대 성터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한양까지 연결되는 통신역할을 했던 산이기도 하다. 봉대산의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 뒤에는 돌고랑(독곡)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돌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전해오는 말로는 주민들이 이 돌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집을 지을 때 주춧돌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