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용3리에 속한 감정(甘井)마을은 민대들을 앞에 두고서 오른쪽 바닷가에 위치한 석산마을과 왼쪽 봉대산 아래 위치한 용흥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감정, 용 끝에, 붉은고지(황토밭이라고 해서 부르는 말로 예전에는 초분골이었음), 외남리 등을 포함하여 석용제를 안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지명유래
원래 감정마을의 이름은 뒷산인 등걸산의 모습이 용꼬리를 닮아서 ‘용끝에’라고 불렀고 주민들은 이를 ‘요꽃때’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후에 이를 한자로 고치면서 용미동(龍尾洞)으로 바뀌었으나, 용미동이 감정으로 바뀐 것은 원갑사의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에 있는 샘물을 마신 후 물맛이 좋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감정(甘井)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자료에 따르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석용2리 용흥마을과 같은 담양전씨 18세손인 전익화 (田益華, 자-성보, 호-호은)공이다. 이렇게 마을의 입향조가 같은 것은 감정마을이 1917년의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이어서, 이전에는 용흥마을과 같은 범주에서 운위되었던 거의 동일한 마을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감정마을에 속해있는 외남리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이를 오늘날의 기준에서 구태여 용흥마을과 감정마을의 구분을 통하여 입향조를 따진다면, 서전동김(西田東金) 곧 해제의 서쪽으로 들어온 담양전씨 전익화 공이 정착한 곳은 감정저수지 위에 자리 잡은 텃골 또는 구렁목이라고 부르는 외남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감정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담양전씨들만 100여 호가 살았었는데, 전염병이 돌면서 마을을 비우고 맞은 편인 용 끝에(龍尾洞) 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용흥마을로 이주해가지 않았는가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후 에 간척으로 민대들이 조성되자 지금의 감정마을에 내려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마을조사에서 만난 전준갑 씨 역시 담양전씨의 시조인 전득시(田得時) 공이 고려말에 개성에서 담양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이후 6대손인 야은공파 전녹생(田祿生)의 후손이 감정마을로 이거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감정이라는 마을이름은 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현재의 감정마을에 속한 외남리가 표기되고, 한참 이후에 마을의 샘물맛이 좋아서 붙인 감정(甘井)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따라서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의 구전을 통해 유래된 지명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마을의 뒷산인 등걸산의 모습이 용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용끝에’또는 ‘요꽃때’에서, 이를 한자로 고친 용미동(龍尾洞)으로 바뀌었다가 현재의 감정으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마을이 포함된 석용리는 함평현 해제면에 속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무렵에 무안군 해제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때 현재의 감정마을에 속한 외남리가 해제면 석용리에 포함되었고, 이후 ‘무안군 해제면 석용3리 감정’으로 구분된 행정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석용제(저수지)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사실 석용리의 행정마을 세 곳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감정마일이 안정적인 자연환경에 있는 셈이다. 실제로 앞으로 광활한 민대들을 두고서 양쪽에 용흥마을의 봉대산과 석산마을의 왕제산 사이의 구릉에 자리한 감정마을에는 특히 마을이름처럼 물이 좋아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마을이었다. 또한, 넓고 깊은 뻘밭과 접한 세 마을에서 모두 축조했던 저수지 역시 감정마을에서는 일찍이 석용제를 축조하여 농사 및 생활용수로 활용하였다.
동/식물
마을 앞에는 전라남도에서 지정한 기념물인 600여 년의 수령을 지닌 당산목인 소나무가 있다. 이 곳은 개어덕으로 부르는 곳인데, 예전에 나무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봉대산의 맥을 이어받은 등걸산의 줄기가 마치 용꼬리 모양으로 마을 앞까지 이어졌는데,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이 당산나무가 있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입향조가 전염병을 예방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심은 나무라고 한다. 수형이 잘 잡혀 있으며 무안의 기념물 중 가장 건강하고 모양이 좋은 나무이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기며 정성껏 가꾸고 있다. 오래전에 주민 한 사람이 소의 멍에로 쓰기 위해 이 나뭇가지를 베어서 사용한 일이 있었다. 이후 그 집안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환이 계속되었고 그 주민 당사자는 성기에 종기가 나서 3년이나 고생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이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신목에 정성을 다해 제를 모시면서부터는 마을이 평안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1949년에는 한 주민이 우연히 당산나무 주변에서 놀다가 오래된 시신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시신의 상태는 황골(黃骨)로 보존이 잘 된 상태였다. 주민들은 이 시신을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당산나무에 둘 수 없다고 앞산에 묻었는데 1년 후에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주민 중 7명이나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주민들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을 그때 시신을 건드린 결과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명당자리임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당산나무의 수령은 600여 년이며 둘레는 3m가 넘는다. 수형이 잘 잡혀 있으며 나무 아래 들독이 놓여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넓들, 포전, 초등판, 깊은 곳을 가리키는 개창, 텃골, 구렁목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오래전에 당산목을 훼손하였다가 큰 우환을 당했던 마을에서는 이후 매년 2월 초하룻날이면 온 주민들이 모여서 정성스레 당산제를 모신다. 어느 해인가는 당산제를 지내고 풍년을 기대하는 줄다리기를 한 후 새끼줄을 당산나무에 옷을 입힌다고 하여 둘둘 감았었다. 그런데 그 해에 홍역이 마을에 들어와 아이들 7~8명이 변을 당했다. 그 이후부터는 제만 모시고 줄다리기는 하지 않는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100kg가 넘는 바윗돌이 있다.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에서 그 바윗돌을 가슴높이까지 들어 올리는 청년이 그해 마을장사로 뽑혔다고 한다.
유물, 유적
자료에 따르면 마을 북쪽 촉길산에서 내려오는 구릉의 끝자락에 지석묘 1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었다. 또한, 마을 주변에서 고려장터라 부르는 곳에서도 오랜된 잔(高杯)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외남리 주변에 도굴꾼들이 많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또한, 학송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가에는 선돌이 하나 서 있다. 감정저수지 위에 있는데 그 바위를 주민들은 독선배기라 부르며 저수지 맞은편에는 배맨바위가 있다. 예전에 그 바위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에 들어온 배를 매었던 계선주 역할을 했던 바위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에 따라서는 말(馬)을 매었던 바위라고도 한다. 예전에 ‘용끝에’마을에 살았던 전씨들은 그 바위를 활의 표적판으로 삼아 활용하였다고 한다. 즉 용끝에마을에서 바위를 겨냥해 활을 쏘곤 했다는 것이다.
설화
마을의 감정저수지 위에 있는 선돌인 독선바위에는 혼인할 때의 풍속이 설화로 전해오고 있다. 신부가 시집으로 들어오면서 이 바위를 지날 때는 쌀 한 움큼을 바위에 얹어놓고 온다는 것이다. 이 쌀을 새미쌀이라고 하는 데 신부의 옷을 만들고 남은 여러 가지 색의 자투리 천을 이용해서 쌀을 쌓아놓는다고 한다. 이 쌀을 신행길의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면서 이불등짐을 맨 일꾼에게 바위 위에 얹어놓고 가게 하는 것이다. 당시 이 바위는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새미쌀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던 것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액막이가 된다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과부가 되어 받는 차별인 고과숙살(古寡淑殺)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에는 이러한 풍습이 60여 년 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풍습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고 한다. 나중에 이 새미쌀을 가져다가 닭의 모이로 주면 닭이 건강하게 자라고 알을 잘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기록물, 문헌
마을 입구에 있는 <담양전씨삼강비>는 1977년에 의사(義士)인 전준엽(田俊燁, 1806∼1882, 자-응백, 호-農村), 효자인 전성기(田聖淇, 1865∼1950, 자-태화, 호-송은), 그리고 열부인 연안차씨를 모시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열부인 연안차씨는 전준엽 의사의 부인이다. 전준엽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기가 광대하여 충량지도(忠良之道)가 어느 사람보다도 뛰어나고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1866년에 공이 무관(武官)으로 봉직 중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애국애민의 정열에 불타 수백의 촌민을 통솔하여 선두지휘하고 온 힘을 다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나, 끝내는 적의 총포에 전사하였다. 2008년 무자년에 후손인 전용관 씨가 삼강비에 시멘트 구조물의 각을 하였다. 이 삼강비 옆으로 <효부진주강씨기행비>가 서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이 민대들이다. 당시 아시래에서 염전으로 부를 쌓았던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된 사람이 둑을 막아서 형성한 들이라 ‘민대들’이라 부른다. 이 들에는 19세기 말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든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았던 연병장이 있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서도 주민 중 한 명이 동학의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직접 동학군에 가담해서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 동학군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쫓겨 다녔다는 것이다. 이름이 윤흥옥인데 윤재미라고도 불렀다. 힘이 장사였고 달리기를 잘하였다. 그런데 동학군 중 윤재미라는 사람이 있어서, 같은 이름을 지닌 윤흥옥을 잡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다행히 몸이 날래서 붙잡히지 않았으나 일생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조사 과정에서 감정마을이 고향이면서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에서 터를 잡고 사는 전준갑 선생을 소개받았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여 보존하고 있었다. 마을회관에는 마을 역사와 옛날 사진을 넣은 화보가 걸려있었는데, 전준갑 선생이 개인 사비를 들여 제작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하느라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었고, 이후 고향에 내려오면 꼭 뵙자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