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양월1리 해제면 명양 작성
  • 명양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72세대, 인구수 120명(남 63명, 여 57명)
자연마을 구성
양월리(洋月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와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 있다. 현경면에서 해제면 소재지를 거치지 않고 지도로 가는 외곽도로인 24번국도가 마을 사이로 지나고 있다. 양월리는 대월산을 주산으로 명양, 신월, 신촌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는데, 명양과 신촌이 합하여 행정마을인 양월1리 명양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부터 마을 옆을 흐르는 좁은 해협은 진도의 울돌목에 이어 제2의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 특히 연륙이 되기 전에는 이 해협의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물살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날이면 해제면 소재지에서 들을 정도로 크게 들려서 ‘울두’ 또는 ‘울띠’라고 했다. 그리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를 한자로 명양(鳴洋)이라고 하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담양전씨(潭陽田氏)와 장수황씨(長水黃氏)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을에 살고 있지 않으며, 이후에 입향한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동족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의 광산김씨 입향조는 김호일(金號一, 호-海軒. 숙종代 인물)로 임진왜란의 의병대장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의 후손이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권율, 곽재우 등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모함받아 역적의 누명을 쓰고 옥사한 충신이다. 충장공의 후손이었던 김호일 선생은 임금인 선조에게 역적의 누명을 썼기 때문에 왕조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가 1600년대 후반에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담양전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정착하여 살면서 광산김씨 동족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호일 선생은 성품이 온화하여 주변 사람과 유대가 깊었으며 특히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명량과 신촌으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의 형국은 그대로 각각 다른 풍수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명량마을은 웃터골을 사이로 작은 마을과 큰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대월산(大月山)을 주산으로 하고 정금산을 사이로 하면서 앞에는 거대한 갯벌을 마주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물이 들면 마치 밤송이처럼 보인다 해서 부르는 밤섬(栗島)이 갯벌 가운데 놓여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자물쇠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밤섬에는 두 기의 묘가 있다. 그리고 잔등 너머에 있는 신촌은 양월2리 신월마을 앞에 있는데, 그 지형이 오리 형국이라 부란(鳧卵)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이러한 지형은 풍수적 길지(吉地)로 간주하며, 음(水)과 양(陽)의 조화로운 자연환경으로 이곳에 깃든 생명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한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부터 마을 옆을 흐르는 좁은 해협은 진도의 울둘목에 이어 제2의 울둘목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 특히 연륙이 되기 전에는 이 해협의 가운데에 있는 바위에 물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한 날이면 해제면 소재지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래서 우는 바위라는 뜻으로 ‘울두’ 또는 ‘울띠’라고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 시에 한자로 명양(鳴洋)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이 지역은 영광군 진하산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경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월리, 명양리, 신촌을 합하여 양월리로 하였다. 이후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하였으며, 양월리란 행정명은 명양과 신월에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명양마을은 해제만 안쪽에 있는 갯벌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낮은 대월산(106.9m)을 둘러싸고 펼쳐진 큰 갯벌과 낮은 구릉에 있는 농경지로 이루어진 반농반어의 생활환경에 더하여, 신안 지도와 임자도의 여러 섬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하여 주민들은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특히, 마을 앞에서 펼쳐지는 갯벌에서 나오는 감태와 김을 비롯하여 굴, 낙지, 숭어 등 풍부한 해산물로 주민들이 높은 소득을 올렸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무안군 해제면의 양월리와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를 연결하는 연륙공사가 1974년에 시작하여 1987년에야 완공되는 난공사를 통하여 완결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의 광활한 태원농장이 형성되었고 양월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특히 연륙이 되면서 갯벌이 오염되어 더 이상의 해산물이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창매리 사람들이 이곳까지 와서 감태 등을 채취해갔지만, 물길이 막힌 다음부터는 이곳 주민들이 창매리까지 가서 수산물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물론, 현재는 이와 함께 예전 방식의 어업이나 농사 등이 기계화 및 고령화 등으로 마을 자체가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명양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원래부터 이 마을은 맛 좋기로 유명한 감태 생산지였다.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갯벌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감태는 세칭‘현해탄 감태’곧 무안의 현경, 해제, 탄도에서 나는 감태의 하나로써 해제를 대표하는 감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갯벌에서는 석화와 낙지, 숭어 등도 많이 잡혀 주민들이 높은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의 주산인 대월산(大月山)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천장리와 참매리의 모습이 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개발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몰무덤’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24번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3~4기의 봉분이 몰무덤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명양에서 신월로 넘어가는 잔등인 ‘고재기’가 있으며, 마을 왼쪽에 있는 모퉁이를 말하는‘노재기’에는 갈대가 있었던 곳이다. 이외에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통계, 녹안, 점재, 부란, 서쪽에 있는 골짜기인 파천골, 점등, 숯골, 절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 절골(寺洞)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김덕령 장군을 모시고 있는 광산김씨 재각인 숭모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6일에 문중에서 제를 모신다.
유물, 유적
대월산 아래에는 명양마을 입향조를 모시는 광산김씨 재각인 숭모재가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광산김씨삼강문>에는 충신 김덕령과 효자 김수철 그리고 열부 밀양박씨 등 3위(位)를 모시고 있다. 김수철은 부모의 상을 당하여 각각 3년동안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자다. 밀양박씨는 남편(김태식)이 젊어서 큰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이를 낫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병이 위급한 상태에 이르자 단지(斷指)를 하고 자기 살을 베어 병구완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평생을 소복으로 생을 마쳤던 열부이다. 삼강문은 1920년에 세운 건물로 근래에 들어 보수를 거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홍살문으로 마감한 내부에는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 3개와 밀양박씨정려기(1942년)와 광산김씨삼강정려기(1934년), 광산김씨삼강정려상량문 등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숭모재와 삼강비 모두 주변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관리되고 있다. 또한 신촌마을에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점등이라 부르는 사기점과 옹기점이 있었던 곳이 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설화
대월산 기슭에는 마치 장롱처럼 보이는 농암이 있다. 여기에는 전(田)장사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예전에 이 마을엔 전장사라 부르는 힘 센 남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장사는 집에서 쓸려고 대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를 칡넝쿨로 얽어 등에 메고 내려오다가, 산 중턱에서 더 내려오지 못하고 멈춰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멈춘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민들은 중턱의 바위를 농바위라 하고 고개를 농암치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노가미’로 알고 있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김종갑(서울시 구의원)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의 지리적인 위치가 신안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에 동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리라 여겼는데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특히 동학의 화를 피하려고 주민 중 일부가 광산김씨를 광주김씨로 바꿀 정도로 동학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제보가 있어 내심 기대했으나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했으며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가족이 몰살당 한 가구가 여러 가구가 있으며 마을의 남자들은 싹쓸이당할 만큼 수십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뿐만 아니라 망운으로 경비를 서기 위해 죽창을 들고 갔던 일도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전통 깊은 역사와 문화를 살려서 마을의 주택과 골목길 등에 마을사업으로 벽화를 그렸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

  • 이전
    작성일 2025.07.02 10:30
  • 다음
    작성일 2025.07.02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