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월리(洋月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와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 있다. 현경면에서 해제면 소재지를 거치지 않고 지도로 가는 외곽도로인 24번국도가 마을 사이로 지나고 있다. 양월2리인 신월리는 대월산에서 왕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자연마을로 정강이, 안정갱이 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신월(新月)이란 지명의 유래는 새롭게 떠오른 달이 마을을 비추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는 양월리의 주산이 대월산(大月山)이어서 달과 관련된 의미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래의 자연마을의 지명인 정갱이란 이름도 장강(長江)에서 비롯된 말로 발음이 와전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반도형인 마을을 칠산바다에서 들어온 바닷물이 긴 강처럼 휘감아 돌고 있기에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겠지만, 대월산에서 왕산까지 이어진 마을의 지형을 따라 길게 비치는 달빛의 강을 나타낸 지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에서는 엄씨(嚴氏)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고 있으며 마을 주변에 엄씨의 묘지들만 남아있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주민에게 자료를 통한 마을의 입향 연대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기록이 전무하였다. 무안군에서 간행한 《마을유래지》(1987)에는‘이 마을의 입향조는 500여 년 전에 신안 임자에서 거주하던 전주이씨 이모(李模)가 육지로 나와 정착하였다고 하며, 이후 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입향조인 이모(李模) 공의 증 조부 이형수가 1615년 경 지도 내동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병사한 후에 이거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입주 시기는 공이 1640년생이므로 약 1660년경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이 마을로 이주한 내력은 배위가 광산김씨인 바 처향(妻鄕)으로 온 듯하다. 참고로 명양마을은 광산김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복합성씨의 마을로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양월리의 주산인 대월산의 맥이 24번국도를 넘어 정금산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봉우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왕산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산들을 배경으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앞으로는 간척으로 이루어진 태원농장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정금산은 정금이 많이 열린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왕산은 마을 뒤 여러 봉우리 중 가장 큰 봉우리를 말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상 마을의 명칭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1912년에야 영광군 진하산면 신월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 신월로 나온다. 따라서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 긴 강 곧 장강(長江)이 유음화(流音化) 되어 정갱이, 안정갱이라는 자연마을의 지명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무안의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쟁쟁이’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이 지역은 영광군 진하산면 신월리였으나 1906년경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 무안군 해제면 양월리 신월로 나와서, 현재는 무안군 해제면에 속한 양월2리 신월이라는 행정명으로 불리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지형상으로 신안군 지도읍과 매우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지도읍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귀양을 많이 온 유배지였기에 학문이 깊은 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일찍이 학문에 눈을 뜬 지식인과 선각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주민 중 ‘석정영감’이라 불리는 사람이 엄격한 가르침으로 마을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왕산 밑에 학당(學堂)을 지어서 주민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자제는 진보적인 학자로 지역의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미군정시대에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용무씨와 친구이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이 야학소를 설치해 학습 분위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주요시설
순복음양월교회.
마을변화
수년 전부터 마을은 깊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원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철이 되면 마을에 흥이 나고 북적거렸는데, 지금은 지금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을 앞 간척지의 경작권을 상실한 후로부터는 마을에 생기가 돌지 않는 것이다. 경작권 상실의 원인은 태원농장 주와 주민 간의 임대료 인하 협상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인근 농장보다 비싼 농지임대료를 내려달라는 주민들의 요구와 이를 들어주지 않는 태원농장 측의 입장이 맞물려 분쟁과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급기야 감정싸움으로 번져서 해제지역 주민에게는 일체 농지를 임대 해주지 않는 상황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에 주민들이 단결하여 대응하였지만, 법을 앞세운 자본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최근 태원농장 측에서 태양광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제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서로 협의가 안된다면 관을 비롯한 지역의 지도층 등에서라도 나서서 중재하고 협의하여 상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신월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대월산과 왕산에 걸쳐있는 이 마을은 주위가 온통 갯벌로 둘러싸여 있는 섬의 형국이다. 지금도 24번국도가 지나는 곳만이 유일하게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을 포함한 양월리 자체가 섬이 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듯이 육지와 이어진 신촌마을의 점등이라고 부르던 지역을 파버리면 섬이 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내륙과 단절시켜 섬을 만들어서 나병환자들을 수용하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행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현재의 소록도로 옮긴 것이었다.
동/식물
예전에 마을 앞에는 어른 네 사람이 팔로 둘러싸도 남을 만큼 큰 팽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 나 한국전쟁 이후 고사되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주민들이 막후지라고 부르는 마고지(馬姑地), 활목(궁항), 새언안, 동아실, 독언안, 늦바지, 청년, 점재, 선바우, 새언에 있는 지명으로 9군데서 물이 나오는 구천동(九泉洞), 한아지, 큰노루섬, 작은노루섬, 큰샘, 작은샘, 소낙구지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마고지(馬姑地)란 지명은 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서, 조선시대에 있던 진하산목장과의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이외에 소낙구지는 주민들이 천장학교를 가는데 지나다니던 길이었으며, 안쟁갱이 뒤에 있는 깊고 큰 골짜기인 큰 구렁이란 지명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무안문화유적분포도》에서는 점등마을 주변에서 여러 기의 백자가 수습되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와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밭을 경작하면서 돌도끼와 돌칼 등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는 유일하게 <효열부함양여씨기행비>가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1972년 개교하여 2000년 9월에 해제남초등학교로 통폐합하면서 폐교가 된 양월초등학교가 있다. 교사 숙소가 3동이나 있어야 할 정도로 벽지였던 이 학교는 한때 주민들의 자랑이었다. 개교 당시 순전히 주민들의 기부와 울력으로 조성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폐교가 되어 을씨년스러워 새로운 문화기반시설로 활용될 수 있는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학구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마을의 분위기로 인하여 6.25한국전쟁 시에는 주민들 간의 사상적인 갈등을 야기 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옆 마을인 명양과 창매리의 창산, 천장리의 백동과 장동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틈탄 혼란의 와중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마을도 전쟁 중에 약 20여명의 주민이 희생을 당하였다. 백동마을에는 한국전쟁 중 해제지역에서 희생된 148명의 합동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