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매리(蒼梅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있으며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창마리와 매당리를 합하여 창매리라 하였다. 현재는 창산, 매당, 매안마을로 이루어졌다. 철마산이 주산인 창산은 창산, 진등, 참샛골, 장두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말(馬)의 형상이고 산세가 좋아 창마(蒼馬)라고 일제강점기까지 불렀지만, 언제부턴가 산세의 푸르름이 절경이라고 하는 뜻에서 창산(倉山)이라고 부른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의《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원래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자리 잡았다’라고 하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 뒤에 있는 묘지 중에 백씨 묘로 불리는 봉분이 몇 기 있어서 백씨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입향한 성씨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17세기 후반에 31세손 김하현(자-치서, 호-매호, 1669 - ?)이 양매리에서 살다가 산이 좋고 물이 많은 이곳이 500년 이상 안주할 터 자리라 판단되어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철마산을 주산으로 우측에 독산과 웅봉산 곧 매봉산 좌측에 도문산, 마을 앞 건너에 중매산이 자리하고 있다. 철마산은 말(馬)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산은 산 위에 커다란 독(바위)이 있다 해서 붙여졌고 독아지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철마산과 독산 사이에 있는 산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철마산에 쇠로 만든 말이 자리하고 있어서 주민들이 그곳에서 치성을 드리곤 했다고 한다. 이는 철마신상(鐵馬神像)을 모셨다는 말이 된다. 이 지역이 말을 기르는 목장(牧場)이었기 때문에 전해오는 풍습으로 보인다. 응봉산 기슭에는 금을 채굴했던 굴이 있다.
이 마을은 풍수적으로 배 형국이라고 한다. 이는 행주형(行舟形)으로 불리는 양택풍수(陽宅風水)의 명당으로써, 배가 물건을 많이 싣고 있듯이 동네 사람들이 부자로 산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배 형국의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을 뚫는 것과 같아서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마을에 샘을 파지 않았다. 물론 이는 행주형의 마을 대부분이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곳이기 때문에 땅이 사토질로 돼 있어 지반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지명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창마(蒼馬)라고 했으나 이후 현재의 창산(蒼山)으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지역은 1906년까지는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다. 하지만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에 속했다가 이후 1987년에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창산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바닷가 어촌마을이었으나 간척사업을 통해서 확보된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는 등 반농반어의 생계를 통하여 비교적 여유로운 마을이 되었다.
주요시설
창산저수지, 고래캠핑장, 무안한옥리조트.
마을변화
현재 마을 주민들이 사는 주택의 상당수가 고풍스러운 전통 한옥이어서 특이하다. 10여 년 전 군청의 한옥지원사업에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여 한옥마을로 탈바꿈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창산마을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결풍재 아래에 큰샘이 있다. 이 샘물은 석간수로서 지금도 봉대산 약수를 제외하고는 해제에서 제일 깨끗한 약수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풍수적으로 배 형국이기 때문에 지하수 개발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이 물을 먹고 생활했는데, 옆 마을인 진등에 지하수를 개발해서 철마산 기슭에 있는 상수 탱크에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랑죽골’이 있으며 그 밑 철마산 기슭에 ‘산지당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마을 남쪽에 있는 벗개, 앞개, 뒷개, 서친개, 마을에서 천장리 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한주(寒走)개’ 등이 있다. 한주개는 추위가 달아난다는 의미인데, 겨울이 되면 마을 입구까지는 엄동설한인데 입구를 넘어 마을에 들어서면 추위를 막아주기 때문에 붙여졌다. 서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한아지’가 있다. 괘치동, 가양동, 고얏골, 산제당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는 마을에서 거리굿, 걸궁, 샘굿 등과 당산제를 크게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소성거사 행의비 자리가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던 자리인데 고사되면서 당산제도 시들해졌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철마산에 쇠로 만든 말이 있어서 주민들이 그곳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는 철마신상으로 이 지역이 목장이었기 때문에 전해져 오는 풍습으로 보인다. 참고로 목장이 있었던 진도의 철마산 유래를 보면 ‘고을 수령이 북산에서 1년 중 특정한 날짜에 말 목장의 원활한 마정(馬政:말 사육, 개량, 번식, 수출입 따위에 관한 행정)을 기원하며 철마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마조단(馬祖壇)이 있던 데서 철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 뒤 독산 앞에는 광산김씨의 제각인 결풍재(潔豊齋)가 있다. 1904년에 건립된 것으로 삼문은 불이 나서 1992년에 원형대로 다시 세웠다. 오른쪽에는 서당채가 있는데 세 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제각에는 9개의 주련과 3개의 현판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기둥마다 주련이 있었으나 도중에 소실되어 지금은 12개의 주련만 걸려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 마을의 입향조인 김하현과 김가삼, 김덕봉 등 광산김씨 3위(位)를 모시고 있다. 결풍재 앞에는 1845년에 세운 ‘김광수 유허비’가 있다. 또한 마을 입구에도 1995년에 세운 ‘연당 김용성 선생 송은비’와 ‘광산김씨 세장산’ 그리고 1928년에 건립한 ‘조선소성거사김공유학행의비(김성수유학행의비)’ 등 세 개의 비가 있다.
설화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기슭에는 마치 사람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은 형상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말 발자국으로 보이는 두 개의 자국이 있다. 예전에 그 밑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 물이 항상 담겨 있었다. 이 물을 사람들은 약수라 불렀으며, 병이 있는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특히 짝불알에 효험이 있어 외지 사람들이 와서 물을 마셔서 큰 효험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물을 수저로 떠서 마셨다고 한다. 또한, 철마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예전에 이 산 중턱에는 돌산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쇠로 편자나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었다(실제 마을에 말편자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고 함).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여기에서 만들어진 편자나 기구들은 얼마 가지 못해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대장장이는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앞을 지나던 스님이 쇠로 만든 기구들이 자꾸 갈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변의 산세를 유심히 보고는 처방을 알려 주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말 형국이니 쇠로 말 한 마리와 가마를 만들어서 봉우리에 모시면 다음부터는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대장장이는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행했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편자나 기구들이 갈라지지 않았다. 그 후 철마나 철가마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말과 가마를 모셔놓은 곳의 밑에는 넓적한 바위와 감나무가 있는데,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돈이나 쇳덩이를 놓고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한다. 만약에 그냥 지나가면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치성 없이 지나갔던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였다.
기록물, 문헌
지난 2011년에 무안문화의 집에서 《선비의 충절이 깃든 매화골 이야기》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창산, 매당마을 등의 마을역사가 기록되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은 옆 마을인 백동과 장동마을 경우와 같이 6.25한국전쟁 때 이념 분쟁으로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마을 주민 중에 부유한 사람이 많아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이다.
마을 주민 중에 남편과 딸 셋 그리고 아들이 참변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정정애(2017년 당시 97세/ 8년 전 작고) 주민의 기억으로는, 음력으로 1950년 8월 24일 저녁에 남편을 포함한 딸과 아들이 모두 붙잡혀 웅봉산 아래 한아지 골에 있는 금굴로 끌려갔다. 당시 이 어른은 임신 8개월로 몸이 불편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은 상당수가 붙잡혀 와 창이나 칼에 찔린 채 금굴 바닥으로 떨어져 죽거나 신음하고 있었다. 이 어른은 좌익 세력에게 붙잡혀 가면서 행인지 불행인지 도중에 의식을 잃은 채 금굴로 떨어졌다. 한참 지난 후에 가까스로 눈을 떠보니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져 있음을 알았다. 남편과 세 딸은 이미 죽었고 두 아들만 살았었는데 나갈 수가 없었다. 밖에는 아직도 좌익세력이 있었고 금굴의 깊이가 상당히 깊어 어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굴에 갇혀서 며칠이 지났을까, 멀리 나룻깐에서 포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면서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좌익이 물러가고 국군들이 진주한 것이다. 이때 함께 있었던 한 아주머니가 밧줄을 타고 올라가 주민들에게 금굴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다.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굴속을 비춰보기 위해 거울을 사용하여 햇빛의 반사를 이용해 굴을 비춰 생존자를 찾았다. 이 어른도 이때 도움을 받아 밖에 나오니 날짜는 9월 4일이었다.
그 후 굴에서 살아나왔던 어른은 정신을 추스르자 자기와 가족을 강제로 금굴로 끌고 갔던 마을 주민의 집에 갔었다고 한다. 자기가 당한 만큼 고통을 갚아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가해자들은 어디론가 피해 버리고 방에는 아이만 포대기에 싸여 자고 있었다고 한다. 화가 치민 어른은 아이를 끌어내 마당에서 패대기치려고 하자, 마침 잠에서 깬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아서 차마 어찌할 수 없어 다시 방에 들여놓고 나왔다고 한다.
지금 가해자의 후손들은 중소기업체의 사장과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가까스로 살았던 어른의 두 아들 중 한 아이는 끝내 목숨을 잃었고, 뱃속 아이는 10월 중순에 양간리로 가서 무사히 낳았다. 그때 금굴에서 죽은 주민은 47명이나 되었다. 후일 경찰과 국방군에 의해서 보복 살해된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주민들은 금굴을 메우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메우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이 마을 출신으로 해제면장을 지냈던 김도중 씨는 마을에서 참샛골을 지나 양월리로 길을 내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운 일을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