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창매2리 해제면 매당 작성
  • 매당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4세대, 인구수 63명(남 37명, 여 26명)
자연마을 구성
창매리(蒼梅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있으며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 창마리와 매당리를 합하여 창매리라고 하였으며, 현재는 창산, 매당, 매안마을로 이루어졌다. 창매2리에 속하는 매당(梅堂)마을은 진등, 산넘어(통계), 매당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무안의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좋은 터를 나타내는 명당이 와전되어 맹당(孟堂)으로 이후 맨댕이로 불러왔다가,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매당(梅堂)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이웃 마을인 창산마을로 입향했던 김하현의 손자인 김인봉(1774∼?)이다. 그는 윗마을인 창산에서 조금 내려와 1800년대 전후하여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의 주변 환경을 보고 500여 년은 넉넉히 살 수 있는 터로 보고, 후손들을 위한 훈육에 관심을 두는 한편 마을 주변에 방풍과 비보를 위해 당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에 선산김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 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뒤에 있는 산은 예로부터 ‘명당산’이라 불렀다. 해제에 비가 오지 않으면 양월리에 있는 사람도 대사리와 양매리에 있는 사람도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해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봉대산이나 백학산, 강산이 아니라 이 산으로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만큼 산의 기운이 좋아 하늘의 감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자기 마을을 ‘명당’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맹당’으로 변하면서 현재 마을 이름인 ‘매당(梅堂)’이 되었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광산김씨(光山金氏) 동족 마을로 전에는 이씨들이 살았다. 해제면에는 광산김씨가 양매리 매곡 마을에 처음 입향 후 양월리 명양, 덕산리 사야, 덕림리, 산길리 강산, 만풍리 신풍, 창매리 창산 매당 등으로 동족 마을이 이어졌다. 이 마을의 광산김씨 입향 계보를 보면 양매리 매곡의 김득남(28세)에 이어 창매리 창산의 김하현(31세) 그리고 매당의 김인봉(33세)으로 이어졌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마을유래지》에 나온 것처럼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좋은 터를 나타내는 명당’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와전되어 ‘맹당(孟堂)’으로 그리고 ‘맨댕이’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매당(梅堂)’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은 마을 뒤의 매령산이 명산이어서 ‘명당산’이라고 불렀으며, 이에 딸린 마을 역시 ‘명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음운변화에 따라 ‘맹당’으로 변했다가 이후 일정한 의미를 지닌 ‘매당(梅堂)’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마을의 이름으로 부적당한 고유명사인 ‘명당’을 피함은 물론 발음이나 연상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바꾸는 '민중어원(民間語源)' 또는 '속사어원(俗詞語源)'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지역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나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에 속한 매당으로 나오다가 이후 1987년에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관할의 매당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옛날에는 물이 귀해 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해제에서 잘 사는 마을에 속한다. 이유는 마을 앞바다 우아래갓이란 곳에서 무안에서 가장 질이 좋은 석화와 낙지, 감태 등 다양한 수산물을 수확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태를 매는 계절이 오면 마을 전체에 향기로운 냄새가 넘친다. 마을 앞 정챙이 갯벌에서 매(채취)는 감태는 무안에서 가장 질 좋은 감태로 소문이 났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나가서 하루에 20동 이상씩 매기도 했다. 그 외에 낚시 미끼인 홍거시를 비롯하여 낙지, 석화 등은 이 마을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매당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은 매령산(梅靈山)과 중매산(中梅山)을 배경으로 하고 마을 앞에는 서해를 접하고 있다. 매령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중매산은 매당과 매안의 가운데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산 중턱의 경사진 곳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주변 풍광은 좋지만, 농지가 적고 물이 귀해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상수도가 보급되어 부족했던 물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동/식물
마을에 당산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그중 마을 앞에 있는 나무가 몇 해 전에 고사하여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다. 고사한 나무는 버드나무로 세 아름이 훨씬 넘는 크기였는데 태풍에 넘어지면서 죽었다. 그 나무 옆에는 수호신처럼 서 있던 선돌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 선돌을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 옆에 세워놓았다. 마을 옆에 있는 나무는 둘레가 4m가 넘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원래 매령산(梅靈山)은 마을 뒤에 산이 있다 해서 그냥 ‘뒷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나서서 의견을 모은 결과 김성규 어른이 의견을 내어 매령산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이는 매당마을의 신령스러운 산이란 의미이다. 이는 예전의 명당산이란 이름값을 그대로 이어받은 지명이기도 하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뒤에 ‘명당산’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마을은 물론 해제면의 모든 주민이 찾아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산의 기운이 좋아서 하늘이 금세 응답하여 비가 내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주민들은 더 정성스럽게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일제강점기부터 지내왔다. 산 정상에서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데 초하루를 전후해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2월 초하루에 지내기도 하였다. 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산제는 그 바위 앞에서 지냈다. 산제를 지내고 난 후에는 마을로 내려와 당산제와 샘제 등으로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다. 산신제를 지낸 그릇들은 제단 옆에다 묻고 다음 해에 다시 파서 사용해왔다. 하지만 40여 년 전부터 산신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농촌 인구의 감소 현상 때문이다. 주민들은 마을에 안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 다시 산제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물, 유적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고한 자료를 보면 마을 뒤편에 있는 매령산의 북쪽 산사면 말단부에 유물산포지가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적의 북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설화
주민들은 뒷산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특히 한국전쟁 때 좌익들에 의해서 주민들이 대부분 학살당할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좌익들이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산에서 차량 경적이 들렸다고 한다. 좌익들은 그 소리가 마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들이 오는 줄 알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당시 이웃 마을인 창산이나 백동은 좌익들에 의해서 피해를 크게 입었으나, 이 마을은 한 명도 피해가 없었다. 주민들은 뒷산이 영험해서 주민들을 사지(死地)에서 구했다고 믿는다.
기록물, 문헌
마을 입구에 ‘광산김씨삼강려’라는 제각이 있다. 이곳에는 1명의 충신과 2명의 효자 그리고 1명의 열부 명정을 모시고 있다. 살펴보면 충신 김득남(1601~1637)은 1828년에 정려를 받았고, 효자 김성옥(1760~?)과 김철현(1800~?)은 1891년에 정려를 받았다. 또한, 열부는 김득남의 처인 밀양김씨로 1630년(庚午7월)과 1632년(崇禎5)에 각각 정려로 포상된 것을 1946년에 삼강문으로 합친 것이다. 삼강문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충신, 효자, 열부의 명정 등 9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제각 옆으로는 호은처사광산김공경모비(1982년), 회산처사김공강학비(1976년), 효자김공치선실적비(1998), 창와김선생유적비 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6명의 선생이 있을 정도로 주민들이 학문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특히 창와 일연 선생은 그 학문이 깊어 제자들의 추앙받았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에 머우섬이라 부르는 와도(蛙島)가 있다. 개구리 섬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에서 바다를 따라 쭉 뻗어있는 지형이 개구리를 잡으려는 뱀과 같다고 하여 ‘배암 혓바닥’이라는 지명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섬이 되었다. 원래 이 섬은 마을 공동 소유였지만 주민들의 관리 소홀로 언제부터인지 개인 소유로 변해 있었다. 머우섬 주변에 ‘정챙이개’가 있다. 정챙이에는 깊은 강이 있어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변을 당하기도 했다. 마을 왼편에 있는 ‘동아실’은 예전에 지도 사람들이 망운장을 보러 갈 때 배로 지나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이곳에는 주막이 세 군데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현재는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아실 앞에는 ‘살쾡이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

  • 이전
    작성일 2025.07.02 11:04
  • 다음
    작성일 2025.07.02 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