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매리(蒼梅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있으며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 창마리와 매당리를 합하여 창매리라고 했으며, 현재는 창산, 매당, 매안마을로 이루어졌다. 창매3리에 속하는 매안마을은 매안과 매실(실구렁)마을으로 이루어졌으며 약 40여 년 전에 매당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매안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주산인 중매산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은 월성 석씨(月城 昔氏)가 자리 잡았던 마을이다. 지금도 석씨묘로 불리는 여러 기의 묘가 마을 안에 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석씨들이 3代를 채우지 못하고 절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경주 정씨 정태눌(鄭台訥, 호-눌헌)이다. 자료에 따르면 광주 하방동에서 세거하다(후손은 함평 엄다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함) 살기 좋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 매당리에 정착한 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며 후손들의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의 후손 중 일부가 옆 마을인 보천동에도 있으며 경주정씨 제각은 몽탄면 학산 마을에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주산인 중매산(中梅山)은 매당과 매안의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큰 중매산과 작은 중매산이 있다. 그런데 원래의 이름은 중시산(仲始山)으로, 지형상 해제를 받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또 이 산은 예로부터‘명당산’이라고도 불렀다. 중매산은 영험하여 비가 오지 않으면 해제의 모든 지역 주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지역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나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무안군 해제면 창매리에 속한 매당으로 나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에 창매3리 매안마을로 분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이 마을은 물이 부족하여 생활용수와 농사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주민들은 자조적으로 ‘땅배추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척박한 땅이어서 해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땅배추는 특별한 관리 없어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어디서나 잘 크지만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상품성이 있는데 물이 없어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주산인 중매산을 신령스럽게 여기며 서로가 화목하게 살았다. 예를 들어, 6.25한국전쟁 때에도 이웃 마을들이 지방 폭도들에 의해 많은 갈등과 피해를 겪었음에 비하여 이 마을은 한 명도 피해가 없었다. 이는 뒷산인 중매산이 영험해서 주민들을 사지에서 구해주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처럼 자연 생태적인 주민들의 삶은 부족한 농경지를 대체하여 마을 앞에 펼쳐진 바다와 갯벌에서 나오는 풍부한 수산물을 근거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시설
창매교회
마을변화
예전부터 이 마을의 감태와 낙지는 유명했다. 비가 많이 오거나 태풍이 불었던 다음날에는 바닷가에서 어린아이들도 갑오징어를 잡을 수가 있었다. 그때는 앞바다 가득히 갑오징어가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잡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도와 연륙이 되면서 나룻깐의 물길이 막혀 이후 갑오징어뿐 아니라 다른 수산물도 어획량이 많이 줄어들어 주민들 생활이 어려워졌다. 또한,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적어 늘 줄을 서서 사용해야 했다. 가뭄이 들면 십 리나 떨어진 창산마을까지 가서 물을 양동이로 길러와 생활하였다. 한때는 마을 우물에 열쇠장치를 만들어 물 배급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이 잘 되어 풍족한 식수는 물론 여러 간척사업을 통하여 많은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이 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매안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감태 철이 오면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잘 익은 참외 맛이 나는 감태의 향이 진동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의 감태를 갖고 광주나 목포에 가면 인근 주민들이 줄을 서서 사려고 했다. 하지만 현재는 감태 수확량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실구렁이라고 부르는 매실도 유명하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 펼쳐진 탄도만의 넓은 바다 앞은 대부분 갯벌이어서, 마을 앞으로 새언안, 대창, 등관이언장 등 세 군데의 간척지를 안고 있으며 비교적 넓은 농토를 갖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 머우섬 또는 머구리섬이라 부르는 와도(蛙島)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섬이 되었다. 원래 이 섬은 마을 공동 소유였지만 주민들의 관리 소홀로 언제부터인지 개인 소유로 변해 있었다. 머우섬 주변에 정챙이 개가 있다. 정챙이뻘이라고도 하는 데 이곳에서 수확한 감태가 특히 맛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매안에서 매당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허천들’이란 지명이 있다. 물이 귀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물을 쑥 빨아들였다는 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뱀이 섬을 향해 길게 뻗은 형국이라 해서 ‘사두’라고도 부르는데, 뱀이 개구리를 잡으려고 하는 지세이다. 뱀 혓바닥이라고도 부르는 이 지형에 예전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 현재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고 있다. ‘코진백이’도 있다. 계곡이 실처럼 가늘게 뻗어나갔다 해서 ‘실구렁이’라고 하는 지명과 ‘큰골’, ‘적거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주민들은 4~50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초하루나 2월 초하루에 매령산 정상에서 산제를 지냈고, 이어 당산제~샘제 등으로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지만,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분청사기로 유명한 무안에서 특이한 홍도(紅陶) 생산 유적이 있다. 예로부터 해제와 현경, 망운의 황토는 널리 알려졌다. 입자가 고와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자기를 만드는 연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붉은도자기(紅陶)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황토로 만든 도자기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마을의 황토는 널리 알려져서 도자기의 원료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황토 벽돌을 만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마을에 작은 부뚜막 큰 부뚜막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는 목포사람이 운영했던 벽돌 공장과 몽탄 사람이 운영했던 기와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설화
옆 마을인 매당마을 주민들은 뒷산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한국전쟁 때 좌익들에 의해서 주민들이 학살당할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에서 차량 경적이 들렸다. 좌익들은 그 소리가 마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들이 오는 줄 알고 도망쳤다고 한다. 당시 이웃 마을인 창산이나 백동은 피해를 크게 입었으나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뒷산이 영험해서 주민들을 구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가난하지만, 화목하게 지내 좌우의 대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당마을 주민들은 이 산을 매령산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