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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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장1리 해제면 장동 작성
  • 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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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4세대, 인구 56명(남 43명, 여 33명)
자연마을 구성
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천장리(泉壯里)는 서쪽으로 금산간척지와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장동, 보천, 돌기, 백동 등 4개의 행정마을로 이루어진 천장리는 보천과 장동에서 이름을 땄다. 이 중에서 천장1리에 속하는 장동마을은 해제면 수암사거리에서 시작되는 해제면 외곽도로를 따라 지도 방면으로 약 4km에 있는 마을로, 자연마을인 장동과 장두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의 터는 마을 앞 철마산 기슭이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의 좌향은 북향이었는데 전염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죽자 현재 터로 옮긴 것이다.
지명유래
마을이 처음 이루어질 당시는 ‘짱골(壯谷)’이라고 하였다. 마을 전체가 소(牛)의 형국을 취하고 있어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듯하다. 또한 ‘장곡’이라고도 같이 불리었는데 이 역시 소의 씩씩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을 둘러싼 곳곳에도 소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즉 우족동, 구시통, 핑경등, 각골 등이다. 현재 마을이 있는 곳은 소의 배 부분에 해당되며, 소가 이 마을을 감싸는 형국이라 하여 행정구역 개편 시 현재의 ‘장동(壯洞)’으로 바꾸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기계유씨 유제(杞溪兪氏, 兪 梯, 호-篁館, 1616∼1691)로 경기도 광주에서 세거하면서 진사에 올라 이조전랑을 역임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재질이 있어 경서와 문장에 통달하였다. 이조좌랑을 역임하던 병자호란(1637년) 때 백성을 수탈하고 노예로 끌고 가는 오랑캐와의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삼전도에서 굴욕에 따른 맹약을 하는 것을 보고, 나라는 백성에 대한 의를 저버렸다며 ‘어찌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며 남쪽으로 내려와 무안 장동마을에 입향하였다. 집안 뒤뜰에 동백나무(수령 380년 보호수)를 심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그는 학문이 높아 주변의 학자들이 많이 찾아왔고 오는 사람마다 황관처사로 부르며 칭송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전체가 소(牛) 형국으로 특히 소의 배 부분에 속한다고 한다. 이는 소의 여러 몸통 부위 중에서 풍요와 생명력이 집중되는 배(牛腹)의 부분으로, 장동마을이 낮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을 지닌 장소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평탄하고 비옥한 들판에 더하여 주변으로 하천이 흘러서 소가 물을 먹는 형상인 우음수형( 牛飮水形)의 마을형국은 농업과 생계에 유리한 조건으로 풍요로운 기운을 누린다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원래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을 포함하여 백동과 창매리, 양월리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동과 해제면의 보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보천과 장동의 이름을 따서 천장리라 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마을에 입향한 기계유씨(杞溪兪氏) 충목공후 황관공 종가의 문중에서는 후손들에게 ‘직의(直義)’ 곧 올바른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남겨서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본받은 청족(淸族)으로서의 마을 성격을 올곧게 지켜오고 있다. 이처럼 향촌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절의를 굳게 한 덕분으로 마을에는 수많은 효자와 열부들이 많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 줄줄이 있는 비석이나 효자각은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1883년에 지은 김식 효자각은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지은 것이다. 김식(金植) 선생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성재(誠齋)이다. 공은 1801년 천장리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다. 어머니께서 병환이 깊어지자,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으나 낫지 않으므로 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려 수일간 어머니의 목숨을 연장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며,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하루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나라에서 그의 효성이 지극함을 알고 1883년 마을 앞에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 한국교육방송이 선정한 ‘2006 효도 도우미상’을 수상한 안기운(당시 76세)옹이 있었다. 왜소증 환자로 기구한 인생역정을 살았던 안 옹은 5년 전 소천했다고 한다.
주요시설
장동교회.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장동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의 특산물인 감태와 숭어는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올라갈 정도로 맛이 좋았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비교적 낮으면서도 주위를 모아내고 있는 천마산(83m)을 주산으로 넓게 펼쳐진 농경지와 주위의 바다와 갯벌을 지닌 장동마을은 특히 물이 좋았다. 마을에서 나오던 석간수 우물인 큰샘이 있었고 갯벌에서는 감태와 숭어는 물론 장어도 많이 잡혔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한국지명총람에는 장동마을과 관련된 이름으로 마을 뒤에 있는 소로재를 뜻하는 ‘산너맷재’와 마을 뒷산을 ‘뒷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동북쪽 들에 새로 쌓은 둑을 ‘신언’이라고 했고, 신언 옆에 있는 부리를 ‘한새부리’라고 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어귀에는 1m 남짓한 입석(立石) 두 개가 50m 간격으로 서 있다. 주민들은 입석을 ‘하나씨당산’과 ‘할매당산’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 짓등에 있는 팽나무 당산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마을의 평안과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다. 제를 마친 다음 날에는 제물을 나누어 먹고 매굿, 줄다리기, 마을총회를 연다. 여기에서 매굿은 잡귀를 쫓아내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한 벽사(辟邪)와 기원(祝願)의 굿으로, 먼저 당산에서 당굿을 치고 살메기 한다고 하여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집굿을 한다. 줄다리기는 남녀 편을 갈라 경기를 한 후, 새끼줄은 2월 초하루 하래드랫날 할매당산에 감아 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 어귀에 두 기의 입석이 50m 거리로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130㎝ 크기의 하나씨 당산과 135㎝ 크기의 할매 당산으로 불리는 입석이다. 현재 주민들은 입석의 내용과 역사를 잘 모른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기계유씨 유영환(兪永煥) 선생과 관련된 진산단(珍山壇)이 있다. 진산단은 유영환 선생의 문하생들이 그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1년에 세운 단으로, 매년 음력 2월 13일에 제자들이 모여 제사를 모신다. 유영환(1834-1877, 호- 東溪)은 김중암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돌기마을에서 장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기계유씨 입향조를 모시는 문중재각인 황관재가 있다. 1984년에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 가운데에는 영광 ‘진사묏등’이라 부르는 광산김씨의 묘가 마을길 바로 옆에 있다. 묘지에는 비석이나 표지 등 아무것도 없는데 후손들은 그 자리가 명당 터라 여기며 옮기지 않다가 근래에 옮겼다. 이 묘를 쓸 때의 일화가 있다. 묘 주인은 원래 부안에서 살았는데, 이 마을에 있는 터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고 했으나 주민들이 반대하자 꾀를 썼다. 당시에 유행하던 굿을 마을에다 열게 하고, 그 사이 마을 뒤에다 묘를 써버린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설화
이 마을에는 기계유씨 문중과 바위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마을 앞산인 철마산의 중턱에 있는 바위와 마을 뒤 진산단 뒤에 있는 바위는 수풀 속에 가려져 있어야 마을이 잘 된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수년 전에 마을 주민 중 세 사람이 철마산 중턱을 개간하기 위하여 바위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냈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화를 당했다. 현재는 두 곳 모두 수풀에 가려져 있다. 철마산에는 마치 공중에 뜬 돌(浮石)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는 여자의 생식기를 닮은 조그만 구멍이 나 있다. 주민들 사이에는 그 구멍의 물을 먹거나 상처에 바르면 남자의 생식기와 관련된 질병은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주민들의 상당수가 효험을 봤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마을 입구에 있는 비석들을 정리하면 1991년에 세운 ‘효열부 광산김씨 기행비’, 2002년에 세운 ‘효정문 효자성재선산김공지 정려비’가 있다. 또한, 1990년에는 세운 ‘효열부 장흥고씨 기행비’와 ‘광산김공선길공적비’, 그 외에 ‘초산선생이공유적비’와 ‘매헌선생여공유적비’ 등이 있다. 장두마을에는 조씨삼세감송비(曺氏三世感頌碑)가 있는데, 이는 병무, 경환, 희양(秉武, 康煥, 喜陽)의 삼세(三世)가 백성들을 구제한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마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원래는 비각이 있어 그 안에 세 개의 철비가 있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제각은 무너지고 철비는 소실되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 주민들은 6.25한국전쟁 와중에 큰 피해를 입었다.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집에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은 인접한 백동마을에 있는 위령탑에 모셔져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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