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천장리(泉壯里)는 서쪽으로 금산간척지와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장동, 보천, 돌기, 백동 등 4개의 행정마을로 이루어진 천장리는 보천과 장동에서 이름을 땄다.
여기에서 천장3리에 속하는 백동(栢洞)마을은 금산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로 가실마을과 함께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온통 야산 지대였으나 근래에 개간이 되면서 밭으로 변했다.
지명유래
'백동(栢洞)’이란 지명에 대해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에 잣나무가 많았으며 백동과 가실을 합하여 백동(栢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동은 원래 ‘잣골’이라고 하였으며, 가실은 당초 가곡(佳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 의견을 들어보니 원래부터 마을에는 잣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대신 참나무과인 아름드리의 상수리나무들이 많았는데, 상수리나무를 잣나무로 여겨 잣골로 이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에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120여 년 전에 신안 도초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진주강씨 강영순이다. 강영순은 탐방에 참여한 주민 강종원(작고/2017년 조사 당시 85세)씨 조부로, 이주 당시에 이 마을에는 한 가구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진주강씨 강연회로 본래 산길리에서 살았으나 1860년경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실마을 입향조는 김해김씨로 이후 김씨, 황씨 등이 입향하여 현재는 여러 성씨가 함께 사는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옆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철마산(鐵馬山, 천마산 83m)으로 산의 형태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천마산을 철마산으로 부르는 연유를 주민들에게 물었으나 잘 모르고 있었다. 아마 서남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한 해양 민속신앙의 하나인 철마전설로 이해되지만, 이는 역사지리적으로 제철(製鐵)과 관련한 지명과도 얽혀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마을 앞 바닷가 가오리골 주변에서 철을 제련하고 남은 슬러지로 보이는 쇠똥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인근 운남면 성내리 성내 마을에서는 철마(쇠말)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으로 여겨진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백동마을은 잣나무가 많았다고 ‘잣골’이라고 불렸으며, 가실마을은 당초 가곡(佳谷)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마을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 등의 자료에도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82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해제면 천장1리 장동에서 분리되어 천장3리 백동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를 지날 무렵까지 주민 대부분이 대주지인 김성규와 김철진의 소작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주변의 땅 80% 이상이 김성규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김성규는 일제강점기 때 상성회사를 차려 아들 김철진과 함께 이 땅들을 관리했다. 이처럼 무안 곳곳에는 김성규 소유의 땅이 많았다. 근래 들어 마을의 토지들이 주민들의 손으로 돌아오기까지 주민들은 그만큼 힘들게 살았다.
주요시설
만민교회
마을변화
백동마을은 물길이 좋아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놀고 있는 땅이 거의 없다. 따라서 현재 다른 마을에 비해 젊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 양보하고 협동하며 잘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일상용품 재활용 및 마을사업을 통해 마을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잔치 및 경로사상을 자주 고양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백동마을회관, 백동영농회 농산물 간이집하장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에서 생산하는 주작물인 콩을 이용하여 마을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뒤의 천마산에서 이어지는 구릉지에 더하여 반도로 튀어나온 갯벌이 풍부한 생태환경이다. 마을의 동북쪽에 ‘대섬’이 있는데, 대나무가 많이 있어서 대섬이라 했으며 순전히 바위섬이다. 재일교포인 김문평 씨가 소유했다가 이후 만민교회로 소유주가 바뀌었다. 대섬에는 바위가 많아서 금산간척지를 막을 때 활용되었으며, 흙은 함평모씨 선산에서 퍼왔다. 지금은 간척을 위한 제방이 쌓여서 육지와 연결되었는데 그곳에 만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동/식물
마을 앞에 바다와 갯벌로 이루어져 있어서 특산물인 해산물이 낙지와 석화이다. 또한, 밭농사는 콩을 많이 재배하며, 콩밭 곳곳에 ‘채종장’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많아서 콩의 종자를 채취하는 단지임을 알 수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우죽골(牛跡洞), 돈머리(豚頭), 가오리골, 송성골, 약나무골 등이 있다. 가오릿골은 마을 앞 바다에서 잡았던 가오리를 방죽을 만들어 보관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송성골은 오리와 관련된 지명이다. 한국전쟁 때 주민들은 벼를 수확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섭기도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다 보니 일손이 없었다. 그런데 수확하지 못한 벼를 청둥오리들이 날아와 먹었다. 벼를 먹은 오리들은 갯벌에 날아가서 갯벌을 집어먹었는데 오리들은 갯벌 바닥에 쓰러져 주민들에게 잡혔다. 그리하여 오리를 주웠던 골짜기를 송성골이라 부른다. 약나무골은 장동마을에서 백동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저수지가 있는데 그 위의 골짜기에 약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 한 사람이 매년 제사를 지냈던 호랑이 바위가 바닷가에 있었다는데, 마을 개발과정에 훼손되어 버린 후에는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이 마을에는 1950년대에 백동에 7가구, 가실에 5가구가 살고 있었다. 가실에는 1950년 10월에 희생당했던 148명의 영령을 모신 위령탑이 있다. 주민들이 공동뫼 또는 공동묘지라고 부르는 곳에 안장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참사가 벌어졌던 현장이었다. 1984년에 위령탑을, 1985년에 추모비를, 1988년에 묘지 단장을 했다. 경내에는 이재현 초대 무안군수의 공덕비와 나남수 이종섭 전 자유총연맹 무안지부장의 공덕비가 있다. 이재현의 시비(詩碑)와 위령비 그리고 학살현장표지석 등이 있다. 현재 무덤은 74기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1950년 6.25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9.28서울수복으로 인민군은 퇴로가 막혔다. 인민군 지도부는 패잔병들과 동조한 좌익들에게 빨치산 전투가 용이한 지리산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신안군 임자도 등에 있었던 인민군들이 지리산으로 가기 위한 중간지점인 영광 불갑산을 향해 지도를 거쳐 해안선을 따라 서둘러 퇴각할 무렵이었다. 1950년 10월 13일에 양월리에 도착하여 양월1리 명양마을 주민 30명에 이어 이웃 마을 창매리에서 60명을 학살했다. 다음 날인 10월 14일(음력 8월 22일)에는 장동마을에서 마을 단위로는 가장 많은 148명을 가실마을 근처 바닷가 산기슭으로 끌고 가서 총칼과 죽창으로 학살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아이들도 다수 있었고 미처 숨을 거두기도 전에 생매장했다고 한다. 이때 장동에서는 기계유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천안유씨 등이 피해를 보았다. 백동에서는 용태 씨 형제가 희생당했다. 희생된 양민을 위한 합동위령제는 무안군 자유총연맹 주최로 매년 10월 30일에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