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송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봉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칠산바다가 펼쳐져 있다. 학송1리에 속하는 학암 마을은 해제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km 지점에 있는데, 백악산 일주도로 연장선에서 마을 앞으로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앞으로 봉대산, 뒤로는 백학산 줄기인 대치산(한치산이라고도 부름)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지명유래
학암(鶴岩)은 안산에 곰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학이 자주 앉아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송전’이라는 지명이 있으나 학암이라는 지명은 없어서, 학이 머무는 마을이라는 뜻의 ‘새몰’로 분리하여 옮긴 후에 새로 붙은 마을의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김녕김씨(김녕(金寧)은 금녕이라고도 하며 김해의 옛이름) 동족 마을이었다. 입향조는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의 충신으로 사육신과 함께 죽임을 당한 김문기(金文起, 1399~1456)의 후손인 김예엽(1550~?, 호 신제(新濟))이다. 공은 경북 상주에서 세거하였으나, 단종 복위운동의 여파로 진안으로 옮겨 숨어 살다가 다시 이곳 학암마을로 이주하여 자리 잡았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에는 제주양씨와 김해김씨가 살았다고 전한다. 모원재 뒤에 제주양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묘가 있어 양씨들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입향조가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마을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타 성씨가 들어오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모두 떠났으나 김녕김씨만은 자손이 번성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이 마을의 터는 안산이라고 하는 산 너머의 둔곡(뚱골)에 있었다. 둔곡은 봉대산 자락이 둘러앉고 있는 형국으로 터는 좋으나 협소하였다. 이후 점차 인구가 늘어나자 더 넓은 현재의 위치로 이주했는데, 새몰(新村의 의미가 아닌 학이 머무는 마을)로 부르다가 지금의 학암이라고 하였다. 예전의 둔곡에는 사찰이 있었는데 마을 주변을 파면 지금도 기왓장 유구가 나온다고 한다. 자료에는 이 마을이 해제 8명당 중 하나인 백학귀소(白鶴歸巢)형의 지세라고 전한다.
마을성씨
김녕김씨(주류), 서씨(1가구), 이씨(2가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해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송전리가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학암동 송전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 해제면 학송리 학암동, 송전동이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 해제면 학송리 학암, 송전이 나와서 현재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본래 함평현 해제에서 목포부 해제면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학암동과 송전리를 병합하여 학송리가 되어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7년 무렵에 해제면 학송1리에 속한 학암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입향조의 학문에 관한 관심과 충효에 대한 정신이 이 마을을 ‘문헌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문명(文名)을 떨치게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돗재(무안읍 매곡리 도산마을에서 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감방산에 있음) 안에서 글을 제일 잘하는 마을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른바 지게 진 사람도 문장을 한다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마을은 학풍은 마을지인《내 고향 해제고을》(1988년 간행)을 보면 ‘300여 년 전부터 서당을 설치하여 마을의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서당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쳐 문맹자가 없었다. 글을 잘하는 학자들도 이 마을을 지나려면 의관을 단정히 하고 지나갔다. 또한 선조들은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계를 형성하여 뛰어난 후손들을 문중에서 도와주었다. 해방 이후 서당이 소실되고 장학계도 유명무실해졌으나 신사마을에 있었던 해제서초등학교가 마을로 이전되어 학암서당의 맥을 이었지만 이마저도 1999년 2월에 폐교되었다.
주요시설
학송보건진료소, 해제제일교회, 기독교개척교회.
마을변화
현재 이 마을은 100여 명의 주민 중 80세 이상 고령자가 많은 장수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되찾기 위해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노성회를 결성하여 장학제도를 부활했는데, 매년 정월에 모원재에서 주민들과 함께 일 년을 계획하고 열부, 효자를 천거하여 상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후손들이 합동으로 세배하여 세뱃돈 일부를 장학기금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사업들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처럼 좋은 전통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단합이 잘되고 있다. 마을에 현안이 생기면 주민들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힘을 합쳐 문제해결에 나선다. 수년 전에는 이러한 마을의 분위기로 윷놀이 등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마을축제를 개최해서 호평받기도 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동하므로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주민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공동체나눔센터.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에는 선두들(先頭野)이 있고 동아실, 마릉지, 저수지 위의 들판인 갱이들, 둔곡, 벌마당(보리마당 곧 보리타작을 했던 곳)과 방구동 너더리가 있다. 마을 뒤의 산을 한치산(寒峙山)이라고 했으나 대치산(大峙山)을 그렇게 부른 듯하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몆 년 전까지만 해도 모원제 옆 당산나무에서 한해의 풍년과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당산나무인 팽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이 넘어 보이며 두 개의 나무줄기로 뻗어있어 마치 두 그루의 나무처럼 보인다. 나무 둘레가 약 7m 정도가 되는 거목으로 각각 450cm와 250cm에 이르며 그 나뭇가지의 폭만도 30m가 훨씬 넘을 만큼 울창하다.
유물, 유적
마을의 유적으로는 입향조인 김예업과 후손인 김송, 김사수 등을 제향하고 있는 문중재각인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1946(병술)년에 후손 김형주가 건립한 모원재의 제향일은 음력 10월 15일이며, 현재 재실로만 사용하는 모습은 사실 예전에 담당했던 문헌방의 모습과는 규모나 관리 등에 있어서 거리가 있다. 이는 ‘학문을 엄숙하고 공손하게 멀리까지 추구한다’라는 모원재(慕遠齋)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학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새마을사업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이 있었으나, 개발사업 과정에서 사라져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광산김씨정열비>가 있다. 광산김씨는 16세에 이 마을의 김수운 선생에게 시집을 와서 17세에 홀로 되었다. 하지만 유복자를 잘 길렀고 가산을 일으켰으며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해서 주변의 칭송이 높았다. 이뿐만 아니라 아들에 대한 교육도 지극하여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킴과 아울러 가산(家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1933년에 건립된 김용철의 비석인 <화암김공강도유적비>, <춘사 김원표 학은비>가 있으며, 1971년 건립된 김형실의 비석인 <죽산거사금녕김공유적비>, 1978년 건립된 김용봉의 비석인 <석계처사김공유적비> 등 4개의 비가 있다. 이외에 <신사마을 입향조비>, 폐교된 해제서초등학교 입구에는 <송암김봉규선생공적비>가 있으며, 6.25한국전쟁 당시 전몰호국용사인 전사자 김기천, 김병오, 김병환 3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설화
문헌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명을 떨치던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한 나그네가 마을 앞을 지나다가 마침 지게를 지고 가는 농부를 만났다. 길손은 길을 물어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농사꾼의 학문이 도저함을 알고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이다. 필상(筆商)과의 고사도 있다.
기록물, 문헌
현재 재실로만 이용되고 있지만 예전에 학암서당을 겸한 재각이었던 <모원재(慕遠齋)>에서 학문연구와 학습교재 등으로 사용했던 통감, 명심보감 등 많은 한문고서들이 현재는 마을회관으로 옮겨서 주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마을의 역사와 학풍 그리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입향조의 아들인 김송과 손자인 김사수는 조선시대 의병활동으로 《호남절의록》과 《속수삼강록》등에 기록되어 있다.
김송(1570~?, 자-주보, 호-만화)은 임진왜란 때 전라방어사를 도와 석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임란 중 전사하여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선무원종공신으로 등록되었다. 부인인 숙인 진주정씨는 부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며칠 후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김사수(1586~1660, 호-한곡(寒谷))도 의병활동을 했는데, 공은 1607년(선조 40)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집안 종을 거느리고 전부대장 정충신(鄭忠信)을 도와 안현(鞍峴)에서 반란의 무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병자호란(1636년) 때에는 수어사 이서(李曙)를 도와 남한산성에서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진무원종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다.
김원표(1880∼1961, 호-춘사)는 구한말 어지러운 세태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대의와 정도를 고수하면서 학문과 도학에 힘쓰고 평생을 후진교육에 힘썼다. 춘사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화암 선생이 신동이라 부를 정도였으며 이른바 해제 4선생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학맥은 화암 김용철, 춘사 김원표, 죽산 김형실 등으로 이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