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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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송2리 해제면 송전 작성
  • 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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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3세대, 인구수 85명(남 43명, 여 42명)
자연마을 구성
학송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학송2리에 속하는 송전마을은 북서쪽으로 1km 지점을 더 진행하여 학암마을을 지나 봉대산 기슭에서 칠산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마을로 남안골, 송전, 외시래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유래
송전(松田)이라는 지명은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마을의 주요 성씨인 능성구씨, 신안주씨, 대구서씨 등의 족보를 보면 호(號)에 소나무 송(松)자가 많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능성(능주)구씨 구인(具仁(1596~1664, 자-군직) 선생으로 원래 현경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에 능성구씨 사당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고 하며, 무안에서 능성구씨들은 이 마을에서만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다음으로 마을에 입향한 신안주씨 주윤옥(朱允沃(1690~1751, 자-옥중, 호-용재) 선생은 용학리 장성마을에 들어온 주철(朱喆)과 형제이다. 자료에 의하면 나주에서 살던 주철이 먼저 번잡한 세상을 떠나 장성마을에 들어오고, 그 후에 주윤옥 선생이 송전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한다.《마을유래지》와 《내고장해제고을》에는 입향조인 주윤옥 선생 등이 임진왜란을 피해 나주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마을 조사에서 각 성씨들의 족보를 비교해 본 결과 사실과 달랐는데, 이는 추후 연구를 통해 보완할 사항이다. 장군대좌의 혈처라고 하는 용흥마을 뒤 용동골에 입향조의 묘가 있다. 무덤 밑에는 2m 정도의 큰 바위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 바위를 장군바위라 한다. 특이한 것은 묘 터에 주윤옥과 주길선의 묘가 있고 그사이에 남양홍씨 홍종휴의 묘가 끼어 있는 연유를 당사자인 주씨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맨 나중에 입향한 대구서씨 서명상(徐命相, 1724~1793, 호-송은(松隱)) 공은 정3품 장악원정을 역임한 대학자 서거정의 후예로 원래 함평 기산에서 세거하였다. 일찍 벼슬에 진출하였으나 시국이 혼란하여 뜻을 접고 자연을 찾아 이 마을에 은거하여 정착하였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주경야독하며 후학을 길렀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소쿠리형으로 봉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측으로 만들산과 촉길산이 있고 우측으로 봉대산의 뒤 잔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촉길산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주민들은 조리형인 송전에 시루형인 외시래를 얹는다고 한다. 남안골, 송전, 외시래 등 3곳으로 이루어진 송전마을은 ‘산으로 보호받고 물로 풍요로워지는’ 전형적인 길지로, 소쿠리 형국과 조리·시루의 결합을 통해 풍부한 생산력과 번영이 이루어지는 형국이다. 주변 산세의 청룡·백호 구도도 안정적이며, 과거 바닷물의 영향으로 재물의 기운도 충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성씨
능성구씨, 신안주씨, 대구서씨 등 혼합성씨 마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송전(松田)이라는 지명이 언급된 최초 문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송전으로 나온다. 이후 1917년 자료에 해제면 학송리 송전마을로 나온다. 자료를 보면 ‘松田은 조선시대 해안지역의 도서와 곶(串)에 소나무 재배지를 선정하고 관의 관리를 받은 곳’이라고 나오는데, 이 마을이 이에 해당되는 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함평현 해제지역인 이 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 송전으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학암동과 송전리를 병합하여 학송리가 되어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7년 무렵에 무안군 해제면 학송2리에 속한 송전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안정적인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마을의 지리와 풍수 형국처럼 토지가 기름져서 주민들이 식량 걱정하지 않고 형편이 넉넉하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자랑거리도 많다. 우선 이 마을의 첫 번째 자랑거리로는 ‘이 마을에 돗재 안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있었다.’라고 한다. 얼마나 큰 부자였냐 하면 “송아지를 가져다가 키워서 어미가 된 후에 가져온 소들 이른바 ‘하릿소’들이 마을에 꽉 찰 정도로 많았으며, 특히 소고삐들만도 한 짐이 될 정도로 많았다.’라고 한다. 주민들은 이에 대하여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러한 하릿소(하례소)는 전통적인 한국의 농경사회에서 소를 키우는 독특한 관습이었다. 하릿소가 새끼를 낳으면 무당을 불러 가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하례굿을 지내기도 하고, 하릿소를 얻은 농가는 마을 잔치인 하례연(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는 소가 개인의 재산만이 아닌 가족과 마을 공동의 자원이었음을 반영한다. 두 번째 자랑거리는 마을이 넉넉해서 그런지 과부들이 재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살림이 넉넉한 데다가 주민들이 서로 도와주고 격려해주어 혼자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에는 열부비(烈婦碑)가 다섯 개가 있다. 끝으로 이 마을의 세 번째 자랑거리는 토지가 비옥해서 다른 마을은 식량으로 어려움을 겪어도 이 마을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덕분인지 현재 이 마을에는 주민 수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최고령자인 박매남(101세)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시며, 김봉녀(99세) 할머니는 홀로 거주하며 아직도 농약통을 지고 농사하며 남의 집으로 품앗이하러 다니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지형적으로 풍요로운 마을의 자연환경과 부지런한 주민들의 생활 태도로 비교적 안정적인 이 마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을의 세대수가 변하지 않고 일정한 주민 수를 유지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송전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중앙부에 ‘동네 큰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이 너무 깊은 안전관리 문제로 5년 전 뚜껑을 덮고 폐쇄하였다. 또한, 마을에는 배를 매었던 계선주의 돌이 현재 하나 남아 있지만, 원래는 세 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예전 간척사업 전에 바닷물이 동네 안까지 들어왔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서 이 마을이 비교적 천혜의 자연 생태환경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식물
약 80여 년 전에는 마을 앞에 세 아름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고사했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나무 둘레가 3m 정도가 되는 구슬나무가 새 당산목으로 자라고 있다. 큰 당산나무가 있을 때는 당산제를 지내다가 당산목이 고사한 이후 한동안 중단하여 마을에 흉사가 자주 일어나 다시 지내고 있다. 마을 어른들은 지금도 예전 당산나무의 신비함을 말한다. 여름철 당산나무 아래서 주민들이 잠을 자거나 쉬면서 여가를 즐길 때도 개미들이 전혀 달라붙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자연생태 환경이 풍부한 마을 이어서인지 남아있는 지명도 많다. 여우가 살았던 굴이라 해서 여새, 세구지, 소나무 군락지인 황장밭, 농바위, 고래, 용흥마을의 장군대좌와 관련된 둔전치(구씨 족보에는 두음치로 기재), 기름진 논을 말하는 금자배미, 바닷물이 들어온 자리인 안지리, 장군대좌의 전설을 안고 있는 똑다리, 성적골, 외남, 구렁막, 수령들, 등잔거리 명당 등의 여러 지명이 남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마을에 있던 큰 당산나무를 모시고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에 당산목이 고사한 후 한동안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에 흉사가 자주 발생하여 십여 년 전부터 다시 지내는데, 이 마을의 당산제는 드물게도 정월이 아니라 매년 8월 14일 낮에 지낸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서는 고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마을 두 곳에 있었던 석실분에서는 각종 생활도구가 발견되었으나 현재 확인할 수 없다. 마을 남서쪽 야산의 구릉에 반파된 지석묘 1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확인할 수 없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몇 기의 지석묘가 더 있었으나 밭으로 경작하기 위해 파묻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이외에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의하면 마을 두 곳에서 유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곳은 촉길산 동쪽 산사면 말단부와 마을 북서쪽인데 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대구서씨의 재각으로 추정되는 청송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마을 입구에 유인 신안주씨 효열비, 효부광산김씨기적비, 효열부경주이씨 기행비가 있으며, 1996에 세운 열부김해김씨기적비와 효열부진주강씨 기적비가 있다.
설화
이 마을에는 ‘말무덤’이 두 군데가 있다. 혹은 ‘몰무덤’이라고도 부르는 말무덤은 옛날에 전염병이나 전쟁 등으로 사망자가 집단으로 발생했을 때 개별적인 봉분을 만들지 못하고 함께 한곳에 매장한 공동묘를 말한다. 이처럼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우리 지역에는 많이 있다. 이 마을에서도 두 개의 말무덤 중 한 군데는 밭으로 만들었다가 집안에 우환이 자주 생겨서 다시 봉분을 복원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두 곳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기록물, 문헌
마을에는 많은 문헌과 기록물이 남아있는데, 특히 화순오씨 집안에 여러 문집과 잡다한 자료들이 많았다. 대구서씨 집안에는 호구단자와 축문 그리고 집안의 열부에게 정려를 내려달라며 호남의 유림들이 추천한 천장이 세 개나 있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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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5.07.02 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