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목동4리 망운면 상주교 작성
  • 상주교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5세대, 인구 81명(남31, 여50)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상주교」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와 현경면 소재지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809번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위에는 「상주교」와 아래에는 「신촌」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원래는 「주교」 마을로 불려졌는데 인구가 늘면서 윗배다리, 가운데배다리, 아랫배다리로 나누어졌다.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 「상주교」와 「하주교」로 분리되었으며 「상주교」는 목동4리에 속한다.
지명유래
원래 「주교(舟橋)」는 과거에 하천(河川)에서 배를 엮어 다리로 이용하면서 불렸던 명칭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 후기 정조의 화성(華城: 水原) 행차(行次)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 경우이다. 이 이후부터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국에서 쓰이게 되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육지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들어왔던 곳이나 배를 이용해 물을 건너는 곳에서 배다리라는 지명이 보인다. 무안의 《마을유래지》에는 ‘망운 동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마을 앞이 바다여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하여 「배달이」, 「주교(舟橋)」라 칭하였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농경지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창령성씨(昌寧成氏)가 거주하였다 하나 확실치 않고 그 후 성유수가 나주 기만동에 살다가 나송대의 역적모의에 연좌되어 화를 당할까 하여 함평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망운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 중에 성씨(成氏)가 살고 있어서 이를 족보 등을 통해 조사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마을에는 성씨를 비롯하여 김, 최, 오, 신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는데, 이중 김해김씨(金海金氏)는 1840년대에 신안 자은도에서 옮겨왔으며, 강화최씨(江華崔氏)는 경기 강화에서 1870년대에 옮겨왔다고 했다. 또한 광산김씨는 1890년대에 함평 나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이에 이 마을의 입향조는 1800년대 중반에 자리 잡은 김해김씨로 추정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주교」마을의 형국은 여느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분지형이나 와우형의 형국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꼴처럼 드문드문 넓게 퍼져 있다. 이처럼 부채꼴로 퍼지는 지형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기가 흩어지기 쉬운 형세인 산산발수형(散散發水形)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는 기가 모여야 길지로 보기 때문에 기운이 흩어지는 지세는 재물이나 사람의 운이 모이기 어려운 곳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관점으로 보면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기운을 지닌 마을로 풀이된다. 특히 「주교(舟橋)」라는 마을 이름에 나타나듯이 배(舟)와 다리(橋)를 통해 외부와의 소통, 교류, 무역, 교통, 확산적인 사업 등에 유리한 곳으로 해석된다. 특히 인접한 갯벌과 바다를 향해 열린 형세이며 이는 바닷길을 통한 교역, 또는 어업, 염전, 해양 활동과 관련한 기운이 강한 마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일본인 반전(飯田, 이다)이란 사람이 운영하였는데 주민들은 지금도 당시 목장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반전이 살았던 목조 2층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배다리, 배달이, 주교(舟橋)등으로 불리다가 「주교」마을이 되었으나 인구가 늘면서 윗배다리, 가운데배다리, 아랫배다리가 되었다가 1980년대에 「상주교」와 「하주교」로 나누어졌다. 「상주교」는 목동4리에 속한다.
행정구역 변경
「상주교」마을이 속한 망운면 목동리는 조선시대 설치된 망운목관의 동편에 위치한다고 해서 목동(牧東)이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까지는 영광군에 속하여 인조 때 감목관 설치로 영광군 목장면에 속했다. 1914년의 군면폐합에 따라 무안군으로 편입되어 1971년에 운남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3년에 운남면에서 분면되어 망운면 목동리에 속한 목동4리 「상주교」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상주교」는 현경면과 경계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모두 세 번의 간척을 거쳐서 농경지가 되었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 교본정정이 갈머리에서 맞은편 버듭살까지 막은 것이 1차 간척이고, 두 번째는 대정8년(1919)에 압창포에서 동산리까지 이어진 간척이며, 세 번째는 1980년대 남화토건이 막은 창포만으로 이루어진 농토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벼농사를 비롯하여 마늘, 양파, 고구마, 참깨 등 밭작물을 경작하며 특히 무안의 특산물인 마늘, 양파 등이 주 소득원이다.
주요시설
마을정자, 재활용품 보관소
마을변화
예전에 주민들은 마을에 도로가 없어서 좁은 농로를 이용하면서도 검소하게 생활하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또한 마을 주민들 간에 공동체를 위하여 합심을 하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 신촌저수지(현경저수지 또는 망운저수지로도 불림)가 있다. 1943년에 막았는데 저수지를 막을 때 일본인으로부터 콩깻묵 배급을 받기 위해 너도나도 공사에 참여해서 완성시킨 저수지다. 그런데 저수지의 대부분이 현경쪽 땅이어서 6.25 한국전쟁 때는 운남과 운북의 갈등으로 몸을 피신하려는 주민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피난처 구실을 하기도 했다.
동/식물
일제강점기에 현경에서 망운으로 가는 길 가에서는 누에고치 공판장이 열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예전에 압창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뽕나무를 경작해 누에치기를 하였다. 갈머리 뒤 평산신씨 가족묘원 부근에 잠실(蠶室)이라는 지명이 있다. 지금은 뽕나무 두 그루가 남아 그때를 미루어 짐작케 하고 있지만 예전엔 이 일대에서 잠업이 크게 성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누에머리(‘니머리’라고도 함)’라고 불리는 곳도 이곳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에 펼쳐있는 들을 ‘주굣들’이라고 하며, 「상주교」마을 뒤에는 ‘장뒤에’ 라는 지명도 있다. 아마 목장 뒤라는 뜻으로 보이며, 마을에 ‘용신암’이란 조그만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 앞에는 ‘포구등’이란 지명이 있다.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포구로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앞에 펼쳐 있는 들판을 잘 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 때는 망운의 게릴라로 불렸던 운남사람들이 평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망운사람들을 잡아내기 위해서 이 포구등에서 보초를 서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주민은 포구등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운남사람들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얼마나 이들 사이에 지역 개념이 분명했던지 망운사람을 잡으러 운남사람들이 들어오면 재빨리 현경 쪽으로 피신해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현경고등학교 앞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커다란 돌이 예닐곱 개가 있었다. 이 돌들은 현경 평산리 팔바윗등의 고인돌과 화촌의 고인돌 그리고 망운의 인바윗등과 연결되는 고인돌 라인에 속한 고인돌이다. 하지만 현재는 없다.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 작물을 재배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없애버린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1960~1970년대 이 마을을 포함한 망운면 일대는 노란꽃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때가 되면 전국의 양봉가들이 대거 망운으로 몰려와, 이들이 모여 있으면 마치 팔도 사투리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유채(일본말 나가네)밭 때문이다. 망운을 비롯한 현경, 해제, 운남 일대에서는 당시에 봄에는 고구마 가을엔 유채를 심어 소득을 올렸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 이 지역 대부분의 야산이 개발되어 고구마와 유채밭이 되었다. 드넓은 황토밭에 노란 물결이 출렁거리면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되었다. 현재 제주도의 노랑물결은 당시 이곳의 1/10도 안 된다. 이 당시에는 소득이 얼마나 좋았던지 현재는 하나도 없는 방석집이 목내에 네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보리와 고구마 그리고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였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