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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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동5리 망운면 해동 작성
  • 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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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5세대, 인구 68명(남31, 여37)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해동」마을은 망운면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진입로는 현경-해제 연결하는 현해로 고가도로의 왼쪽방향과 현경으로 이어지는 망운로 두 곳으로, 양쪽에 모두 ‘마을표지석’이 서 있다. 이 마을은 독배기 · 가당골 · 아래데미 · 우데미로 구분했으나 지금은 「해동」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최근 현경-망운 간 외곽도로(공항로)가 마을 중간을 관통하면서, 이 마을은 둘로 나뉘었다. 현재 갈라진 마을의 두 구역을 연결하는 것은 두 곳의 굴다리이며, 갈라진 마을의 두 구역은 편의상 마을회관 쪽은 ‘웃마을’, 건너편 구역은 ‘아랫마을’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지명유래
「해동」마을은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밤알’ 형국이어서 ‘밤까시’(율촌(栗村), 율동(栗洞)) 또는 ‘빵까시’로 불렸는데, 마을이름을 된소리로 발음할 때는 어감이 좋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마을 군데군데 밤송이를 뜻하는 흙무더기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해동」이란 마을이름은 100여 년 전 당시 주민 대부분이었던 남씨(南氏)들이 바다를 생업의 터로 삼았으므로 「해동(海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해동(海東)」으로 한자어 표기가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에 대해서는 기존 조사자료가 각각 다르다. 《마을유래지》(1987)에 따르면,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한 사람은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남이(南怡) 장군의 후손이다. 전하는 말로는 역모에 몰린 남이 장군 가족들이 전남 진도로 귀양을 가는데, 장군의 조모(祖母) 하씨가 충남 서천에서 장군 가족을 찾아 영광을 거쳐 진도로 가는 도중, 도둑을 만나 무안군 망운면 원송현(元松峴)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후 「해동」마을에 남씨가 들어온 것은 조모 하씨의 손인 남윤길(南允吉)이라고 한다. 한편 《마을역사자료조사》(2017)에 따르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남주채(南柱采, 1659~미상)로 공은 조선 초기의 풍운아였던 남이(南怡, 1441~1468) 장국의 후손이다. 남이 장군은 26세에 공조판서, 27세에 병조판서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으나, 역모 사건에 휘말려 품은 뜻을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의 후손 의령남씨들은 선대의 역모 사건에 연좌되어 대부분이 어렵게 살아야 했는데, 이 마을 입향조인 남주채 공도 충남 서천 비인에서 살다가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진도에 사는 친족을 찾아 서해안 뱃길을 따라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망운면 원송현 마을에 도착하게 되어 잠시 그곳에서 머문 다음 1708년에 현재의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두 자료에서 기술한 입향조의 성명이 각기 다르지만 남이 장군의 후손인 의령남씨가 해동마을에 정착하게 된 내력은 일치하고 있다. 그렇듯이 이 마을은 무안에서 유일하게 의령남씨가 입향조인 마을이다. 의령남씨가 정착한 후에는 현경면 외반리에서 평산신씨, 신안군 비금에서 전주최씨 그리고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해동」마을은 망운면의 가장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로 이전에는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밤알 형국이어서 ‘밤까시’ 또는 ‘율촌’이라고도 불렀으나, 마을 안쪽에는 가재 형국의 ‘가당골’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을의 풍수지리적 의미를 살펴보면, 우선 바다의 생기와 육지의 안정성을 함께 지닌 ‘보호와 풍요의 형국’으로 해석된다. 또한, 내부에 가재형의 마을을 품고 있어서, 자체적인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외부로부터는 단단히 보호받으면서도 바다를 통해 발전 가능성을 내포한 마을형국이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은 독배기 · 가당골 · 아래데미 · 우데미 등의 자연마을로 나누어서 불리다가 「해동」으로 통칭되었다. 다만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 <영광군조(靈光郡條)> 망운면의 마을은 「반룡동(盤龍同)」 · 「신촌(新村)」 · 「목동촌(牧東村)」 · 「목남촌(牧南村)」 · 「목서촌(牧西村)」 · 「목북촌(牧北村)」 · 「피동촌(皮東村)」 · 「피서촌(皮西村)」 · 「두모촌(豆毛村)」 · 「유종동(儒宗洞)」 · 「소락지(所落只)」 · 「두곡리(頭谷里)」 · 「하묘촌(荷苗村)」 · 「둔전촌(屯田村)」 · 「모시촌(毛時村)」 · 「연동리(蓮洞里)」 · 「원곶지(院串之)」 · 「월락촌(月落村)」 · 「다경진성내(多慶鎭城內)」 · 「다역진성외(多慶鎭城外)」 · 「울도(鬱島)」 · 「장동(場洞)」 · 「맹당(孟堂)」 등으로 이 「해동(海東)」이란 마을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과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의 자료에는 「해동(海洞)」으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에 「해동」이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해동」마을의 한자어는 원래 마을 이름이 ‘갯마을’ 또는 ‘바닷골’을 의미하는 해동(海洞)으로 표기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해동(海東)으로 바뀌었다. 이에 주민들이 해동(海洞)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행정명은 해동(海東)으로 표기되고 있어서 아쉬워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망운면의 행정구역변천사에 의해 조선시대 영광군에 속했다가 목포부(1910)에 잠시 예속되었고, 다시 무안군(1914)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다. 주요 작물은 마늘, 양파, 고구마 등이며, 어장에서 낙지를 잡는 주민도 있다. 현경-망운 간 외곽도로인 ‘공항로’가 놓이면서 마을을 관통하여 사실상 마을이 두 동강 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자동차운전학원, 미곡처리장, 냉동저온창고 등
마을변화
「해동」마을은 최근 농촌마을 개발사업, 복지시설 확충, 해안 정비사업을 통해 주민들의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어업 중심 마을에서 벗어나 복지·환경·공동체 문화가 강화된 현대적 농촌마을로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해안 자원을 활용한 농어촌 관광과 공동체 활성화가 주요 발전 방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까지 부녀회(1982 창립), 동계(1959 창립), 청년회(1978 창립) 등이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후에는 노인회, 어촌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재활용품 수거장 등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고구마 등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망운반도의 북쪽으로 함평만과 탄도만을 접하고 있는 이 마을은 ‘물안골’이라고 불리는 무안의 물길과 특유의 황토(黃土)가 어우러진 마을이다. 따라서 바다와 갯벌에서 나오는 각종 해산물은 물론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고 산출되는 생태환경을 갖춘 곳이다.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와 마늘은 물론 무안 밤고구마를 최초로 개발하여 재배한 곳이기도 하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독배기(바우백이)’, ‘가당골’, ‘아래데미’, ‘우데미’ 등의 옛 지명이 남아 있다. ‘독배기’는 현재 무안자동차학원이 있는 곳이다. ‘가당골(架堂谷)’은 현재 미곡처리장이 있는 자리를 말하는데, 가재형국의 지형인 그곳에 무덤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가당골은 무안 밤고구마의 최초 재배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살았던 스즈끼(鈴木)라는 일본인이 무안의 황토와 물길 등 지리에 맞는 고구마의 신품종을 개발하였다. 그리하여 시범포를 만들어 재배하고, 널리 보급하여 현재의 무안 밤고구마 명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밤고구마 생산 덕분에 이 마을은 한때 부유하게 살았다. 지금은 옆 마을인 「외덕」이 더 부유하지만, 당시에는 「외덕」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품을 팔아 생활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적도 있었다. 스즈끼(鈴木)가 살았던 집 아래에는 ‘가당 목샘’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독배기’에는 4기의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배기 주변의 땅 대부분을 일본인 하시모도(敎本)가 소유했는데, 이 하시모도(敎本)의 동의를 얻어 남씨들이 현경면 송정리 바닷골의 둑을 막고 수문을 만드는데 이 고인돌을 깨 써버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독배기는 ‘바우백이’로도 불리며, 감방산-무안읍 매곡리 도산-현경 평산리 팔바위-망운 인바위를 잇는 이른바, ‘고인돌 라인’의 중간에 있는 청동기 유적이다. 마을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지은 비행기 ‘격납고’가 2곳 있다. 미곡처리장 근처 경작지에 1기, 외덕마을과 해동마을 사이를 지나는 망운로 건너편에 1기가 있다. 전에는 격납고 안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기도 했는데, 현재까지도 그 생활 흔적이 남아 있다. 격납기는 원래 4곳이었는데, 도로공사 등으로 2기가 없어졌다. ‘아래데미’ 마을 중간에는 <효열부함평이씨기적비(孝烈婦咸平李氏紀蹟碑)>(1986)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홍주송씨 세장산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무안자동차운전학원
주민요구사항
현경-망운 간 외곽도로(공항로)가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마을이 두 동강이 나 있다. 처음 도로를 설계할 때는 ‘아래데미’와 ‘우데미’가 외곽도로 가림막에 막혀 아주 단절되다시피 했었다. 그나마 주민들의 노력으로 사람이나 차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굴다리)가 2곳 개설되어 위안 삼고 있다. 이처럼 지역발전으로 인한 마을의 피해에 어떠한 대안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주민들은 몹시 답답해하고 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남이 장군(南怡 將軍, 1441~1468)은 조선시대 세조 대 무신으로 이시애의 난과 건주, 여진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세조가 죽은 후, 유자광의 역모 고변으로 처형받았다. 그의 묘역이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천리에 있다.
기타사항
아래는 역모 고변의 빌미가 된 남이 장군의 시이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닳게 하고, 두만강수음마무(頭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도다. 남아이십미평국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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