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6리에 속하는 「목남」마을은 망운면의 중심지 마을이다. 현경면과 운남면을 이으며 망운면을 관통하는 77번 국도를 중심으로 아래쪽에 해당되는데, 마을의 범위는 대략 현재의 농협 자재창고에서 면사무소 앞의 어린이집까지이다. 망운면의 각종 주요기관이 이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면사무소, 농협, 보건소, 의용소방서, 노인회관(노성원), 5일시장 등이 몰려있는 중심 마을이다. 5일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현경면 평산리 구장터에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망운목장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목남(牧南)」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여, 망운면이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던 지역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망운면의 소재지 역시 예전에 목관 또는 목내라고 부르는 곳을 사등분하여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목동, 목남, 목서, 목북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목남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 이 마을은 인접한 목동마을과 같이 임진왜란(1592)을 피해 전주최씨(全州崔氏)와 강릉유씨(江陵劉氏), 진주강씨(晉州姜氏)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외에도 평강채씨(平康蔡氏) 그리고 평산신씨(平山申氏) 등도 마을로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신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증언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을 보면 분지형이다. 목내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목성(木城)이라 불렀으며, 대체적으로 수령이 300여 년이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지관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지기(地氣)가 허하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야 마을이 번창하게 된다’는 지적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마을이 분지형(盆地形)으로 사방이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그릇 모양의 지형이라는 것은 풍수적으로 ‘포곡형(抱谷形)’ 또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좋은 예로 해석된다. 하지만 중심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허한 지기를 막기 위하여 조성한 나무숲을 통해 풍수를 보완하는 목(木)의 기운으로 마을을 안정화시키고 보호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해 마을 명칭의 변경상황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목남촌」으로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망운면 목동리의 「목남」으로 나와서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목남촌」이었다가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어 망운면으로 개칭된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으로 편입된다. 이후 1917년에 운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운남면과 분면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과 같이 망운면에 속한 목동6리 「목남」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 때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내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다. 또한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포구가 개발되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 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목화, 쌀 등 곡물을 수집하는 ‘조선흥업회사’ 사무소가 압창에 설치되고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망운을 포함하여 해제, 현경면을 관할하는 금융조합이 현재 망운농협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이처럼 망운지역의 중심지가 된 목남마을은 현재까지도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겸업하면서 각종 상업을 비롯한 직장생활 등 도시민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주요시설
망운면사무소, 농협, 보건소, 의용소방서, 노인회관(노성원), 5일시장, 망운교회 등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고구마 주산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목관성을 중심으로 성벽을 따라 심었던 나무들이 수령 300여 년을 넘겨 가고 있으며, 여기에 마치 소쿠리처럼 담겨있는 목남마을은 안온한 느낌을 준다.
동/식물
성벽을 따라 심었던 느티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느릅나무와 엄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또한 목동공원에는 40여 그루의 나무들이 있는데, 족히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수령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오래된 나무의 둘레가 4m 20cm가 훨씬 넘기도 하였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배다리에서 목내로 들어오는 고개를 ‘망제(望祭)’라고 하는 곳에 ‘진구렁’이라고 부르는 구렁이 있었다. 길이 지금처럼 나기 전에는 양 옆에 소나무가 심어진 진구렁이 통행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어둡거나 한적할 때는 이 길을 지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실지로 신행길에 봉변을 당한 「목외」마을과 운남 출신의 신랑, 신부들이 많았다. 이 길은 용교의 진구렁으로 연결되어 운남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6.25 한국전쟁으로 사회가 어수선할 때 이 진구렁은 한풀이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구렁에는 굴이 있었다. 망운비행장 때문에 미군 폭격기가 자주 나타나 주민들이 이 굴속으로 피하기도 하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는 배다리에서 목내로 들어오는 고개인 ‘망제(望祭)’에서 매월 보름이면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예전에 망운목장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목남이라고 부른 이 마을은 하지만 실은 말 목장이 아니라 목장을 관할하던 관청인 감목관(監牧官)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목관 터는 예전 조사에서 망운초등학교 자리라고 밝히고 있으나 추후 조사를 통하여 현재 망운천주교회 자리로 추정된다.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로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데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이다. 현재 망운면사무소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목동공원은 이 지역이 감목관이 있었던 곳임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공원 내에는 15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중 7개가 망운목장감목관선정비(望雲牧場監牧官善政碑)이다. 이 중 연대가 빠른 것은 1743년의 감목관 공적비이고 나머지는 19세기의 것들이다. 대부분이 호패형이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것은 1기뿐이다. 그 외 8개는 국회의원 숭모비나 면장 등의 공적비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망운면노인회관에 1996년에 세운 ‘망운노성회유적비’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1892년 나주감목관으로 부임한 이두황이 신의, 자은, 압해 등지의 말 숫자 중 부족분을 탕감받아서 이후로는 영광감목관으로 변경되는 경과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현재는 망운면에 중학교가 없지만 해방 이후 이 지역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중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세 차례나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1950년 3월 이상호 씨가 공회당이 있었던 자리에 동양대학교 부속 망운중학교를 세웠다. 이어서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1951년 3월 경문중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이 학교에서 무안, 망운, 현경, 해제 지역 200여 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공회당 자리에 신축하고 있던 학교가 1952년 사라호 태풍으로 무너지자 복구하지 못하고 폐교했다. 그때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이상호 교장의 공덕비가 제자들에 의해서 망운면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이어 고공중학교가 세워졌다. 경문중학교가 폐교되자 남소학교(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 위에는 북소학교로 망운초등학교가 있다) 자리에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초등학교에 병설로 세웠던 고등과 과정과 비슷하다. 2년이 안 되어 폐교되었다. 운남면에도 고공중학교가 있었으나 망운면처럼 폐교되지 않고 현재의 망운중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재건중학교라 불렀다가 후에 성신중학교로 개명된 학교를 현재의 면사무소 앞에 세웠다. 경운중, 고공중이 폐교되자 신안군 지도읍과 임자면 사람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나서 세운 학교이다. 당시 고구마를 팔아 그 돈으로 면사무소 앞의 부지를 사서 세웠으나 이 학교도 얼마 가지 못해서 폐교되었다. 세 학교 모두 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