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牧西)」(「원목서」)마을은 「목남(牧南)」과 더불어 망운면의 중심 마을이다. 분지형인 목서리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데, 이를 원래 토성(土城)인 망운목장성을 ‘목성(木城)’이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대체적으로 수령 300여 년이 이상의 고목(노거수)이다. 무안국제공항에서 비행기 이착륙시 내려다보이는 목내(牧內)는 아늑한 전원도시의 모습을 지녀서 아름답다.
지명유래
「목서」마을은 망운목장을 관리하던 감목관(監牧官) 서쪽에 있어서 불리게 된 지명으로, 《마을유래지》에서는 ‘일제시대 행정구역 편성과정에서 편의상 목내(牧內)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망운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마을유래지》(1987)에 의하면 ‘임진왜란을 피해 전주최씨와 강릉유씨(江陵劉氏), 진주강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라고 한다.(제보자 신덕숭(申德崇)) 「목서」마을 주민들은 여기에 해주오씨(海州吳氏)를 추가해 넣기도 한다. 즉, 이 마을의 형성시기는 목관성이 들어섰을 무렵으로 처음에는 성안에 마을이 조성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현재의 마을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목서리(목내) 전체를 둥글게 둘러 가며 나무를 심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내용이 전해온다. 그중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나무를 심어야 번창한다는 비보설(裨補說)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목내가 여성을 상징하는 모습이어서 숲으로 보호해야 집안이 편안할 수 있다는 풍수설에 영향을 받아 심은 것이며, 세 번째는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수목이 촘촘하게 배치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나무들 상당 수량이 말라 죽었고 베어져 나갔지만, 「목서」마을과 「목북」의 나무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주민들이 잘 관리해온 덕도 있겠지만, 팽나무가 있는 부지가 국유지인 덕분에 잘 관리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목동」이나 「목남」의 나무들은 개인소유지라 관리가 소홀해 울창하지 않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목서(牧西)」마을은 감목관(監牧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처음에는 「서촌(西村)」이라고 부르다, 나중에 「목서(牧西)」로 바뀌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인조(1523~1649) 대에 감목관이 설치되면서 영광군 목장면에 속했었다. 이후 《호구총수》(1789)에도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목서촌(牧西村)」으로 나오며, 1910년에 잠시 목포부에 편성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의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는 무안군 망운면에 속한 「목서리(牧西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목북」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재되었으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1992년에 행정구역이 「목서」와 「목북」으로 분동되어 「목북」마을은 목서5리, 「목서」마을 목서1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의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었다. 이곳의 지리적 잇점을 활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포구가 개발되었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 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목화, 쌀 등 곡물을 징집하는 조선흥업회사 사무소가 「압창」마을에 설치되었고,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말 망운비행장 건설과 일본전투기를 보관을 위한 격납고 설치 등은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증가하는 여건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무안군에서 맨 먼저 전기가 들어온 지역도 망운이었고, 일본인만을 위한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던 곳(망운초등학교 체육관 아래)도 이 지역이었다. 해서 4개면(해제 · 현경 · 망운 · 운남) 문화의 발상지가 이곳이라 할 만큼, 모든 면에서 선진적인 곳이었다. 망운극장터가 남아있어 당시의 이 지역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주요시설
망운파출소, 망운복지관, 전(前) 망운극장, 망운천주교회, 망운중앙교회 등
마을변화
현재 주민들은 상업과 농업에 종사한다. 여러 업종의 가게와 상가들이 거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농사를 짓는 주요 작물은 양파, 마늘, 고구마 등이다. 최근에는 무안국제공항이 개설되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고 있으나, 작년에 일어난 제주항공 참사로 인하여 마을에 활기가 주춤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여타의 시골 마을처럼 전통적인 농업마을에서 농촌 생활환경 개선, 주민 복지 강화, 농업 기반시설 확충은 물론 문화와 관광인프라의 구축 등 현대적인 농촌마을로 변화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에는 부녀회(1978 창립), 동계(1970 창립)가 조직되어 있었다. 요즘은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 어촌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목서마을회관, 마을누정, 체육시설, 재활용품 수집장 등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고구마 등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목관을 둘러싼 네 개의 마을에는 각각 샘이 있었다. 북촌 샘, 동촌샘, 서촌샘 등으로 불렀는데, 이중 서촌샘은 ‘통샘’이라 부르며 목내에서도 유명했다. 이 샘은 수량이 많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주민들에게 이로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벙어리가 3년만 이 물을 먹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약효가 뛰어났다고 한다. 새마을운동 사업으로 지하수가 개발되어 물길이 끊기고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주민들 의식 속에는 그 샘이 아직 남아있다. 특히 통샘은 주변의 지리적인 위치와 풍수적인 이유로 「조산」마을과 대칭을 이루었다. 즉 ‘통샘’은 여자, ‘조산’은 남성을 각각 상징하며 서로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동/식물
이 마을을 둘러싼 팽나무와 느티나무는 대체적으로 수령이 300여 년이 넘는다. 이 중 일부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보호정책의 실행은 물론 다양한 자연생태와 역사문화에 기반한 문화콘텐츠로의 활용이 시급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목관성지(牧官城址)’가 있었다. 본래 목관이 있었던 자리에 일본인들을 위한 ‘남소학교’를 새로 지으면서 기존 목관의 집채를 뜯어 마을 ‘공회당’을 세우는 데 사용하였다. 또 목관의 자취인 아름드리 나무들이 공회당에서 ‘망운성당(1993)’으로 바뀌면서 관리 소홀로 사라져 버려 아쉬움이 크다.
특히 공회당 자리는 망운중등교육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1950년 3월 「목북」마을의 이상호 씨가 이 자리에 동양대학교 부속 ‘망운중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고, 1951년 3월 ‘경문중학교’로 다시 개교해 무안 관내 망운 · 현경 · 해제지역 200여 학생들이 수업받았다. 그러나 1952년 공회당 자리에 신축하고 있던 학교가 태풍으로 무너져 복구하지 못하였고, 이어 ‘고공중학교’→‘성신중학교’로 이어졌으나, 모두 인가받지 못해 문을 닫았다. 현재 이처럼 지역의 교육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이상호 교장의 공덕비>가 망운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鎖錄)』(지도군수 오횡묵(吳宖默, 1834~1906), 1896)에 ‘길가에 토성이 있으니 사복시 망운목장이요 영광계이다. 망운면이 말을 기를 때, 쌓은 것으로 중년부터 목장을 자은도, 장산도, 압해도 등 섬으로 이설한 후, 성 담장이 무너져, 개간하여 곡식을 뿌렸다 한다. 수장점(守掌店) 멀리 바라보니 남쪽 5리쯤에 큰 소나무가 푸르게 우뚝 솟아있는데 망운목장이라 한다...... 길을 재촉하여 토성객점(土城客店)에 다다라 숙소를 정하였다. 이날 60리를 왔다. 서쪽이 망운목장이요. 10리를 가면 장터이고, 1일 6일에 장이 서는데 여러 섬에서 모두 모인다. 객점 앞에 반룡동, 또 그 아래 토성이 있고 무안, 나주계로 통한다.’(국역본 『지도군총쇄록』 신안문화원, 2008, 159~160쪽)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때는 마을에 인민군의 파출소인 ‘분주소’가 이 마을에 있어서 운남과 운북 갈등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이 마을에는 부자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가난한 운남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했는데, 초등학교에서 열린 인민재판으로 즉결 처분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