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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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서2리 망운면 내덕 작성
  • 내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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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5세대, 인구 55명(남25, 여30)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내덕」마을은 목서2리에 속한 마을로 「외덕」마을 바로 옆 마을이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km가량 가면 나오는데, 마을 앞으로 운남-현경 간 외곽도로인 ‘서목장길’이 지난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망운 읍내를 비롯한 주변 풍경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좋은 전망이었으나, 길이 나면서 시야를 가려 답답함을 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까이 무안국제공항이 개항되면서 소음 피해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지명유래
원래 목서2리 「내덕」은 목서4리 「외덕」과 한 마을로 「덕림(德林)」마을로 불렸다. 그러던 1800년대 말에 이 마을의 주민 일부가 「덕림」마을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분동한 후에 「덕림」의 안쪽이라 하여 「내덕(內德)」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덕림」마을도 이름을 바꾸어 「외덕(外德)」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표지석의 <마을유래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km가량 떨어진 목서2리에 속한 마을로 외덕마을과 같이 붙어있다. 원래 내덕과 외덕은 한 마을로 德林이라 불렀으며 덕운산 아래의 마을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덕은 덕림의 안쪽 마을로 와우형의 지형을 갖고 있다. 1800년대 말 김해김씨가 청계면 도대리에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송주홍씨와 청주한씨가 윗마을인 외덕에서 이주해왔다. 마을 주변에는 토기와 고분 등 고대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요강섬과 대섬이 있다. 해안가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근대에는 외곽도로 개설로 없어지고,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지만, 주민들의 협조와 양보로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근면과 검소로 모범 마을을 이루고 있다.(글: 백창석. 2009년 11월 ’김해김문의 김정웅이 비를 세우다)’
마을형성(입향조)
덕림마을의 입향조는 홍주송씨 송필하(宋弼夏, 1691~1756, 자-여보, 호-덕운암(德雲庵))이다. 그는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에서 살았으나 뜻을 펴기가 여의찮아 좀 더 좋은 환경을 찾다 1700년대 초기 이 마을을 발견하고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에 터를 잡자, 바로 조그만 초가를 짓고 서당을 운영하였다. 이 연유로 처음엔 이 마을을 ‘서당골’이라 불렀다 한다. 이어 1700년대 중반에는 광암리에서 함께 살던 청주한씨 한종길(韓宗吉: 1715~1754, 자-명보, 호-죽계)도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제보자 한삼용) 점차 마을의 가솔이 늘어나자, 1800년대 말에 가족 일부가 마을 아래쪽인 현재의 내덕으로 분가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김해김씨가 터를 잡고 있었다.(주민 김정웅씨의 조부가 처음 들어온 것으로 김해김씨 《대동보》에서 확인되었다) 이 김해김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홍주송씨보다 몇 해 앞섰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덕운산 아래 자리한 내덕마을은 주산이 보호하는 배산지세에, 소가 편안히 누워 있는 형상인 ‘와우형(臥牛形)’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안정과 풍요의 기운이 모이는 명당으로, 마을에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길한 터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덕운산 아래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덕림」이라고 했으나, 원래는 자연마을 지명인 「서당골」이라고 불렀다. 이후 마을이 커져 분리하면서 「내덕」이라고 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망운면은 조선시대 인조년간(1623~1649) 감목관이 설치되면서 영광군 목장면으로 편성되었다가 이후에는 영광군 망운면으로 편재되었다. 1910년에 영광군 망운면은 목포부 관할로 옮겨졌다가 1914년에 무안군 관할로 변경되었다. 마을형성이 오래되지 않은 「내덕」마을은 《호구총수》(1789)에 등장하지 않으며,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현리동명칭일람》(1917)에서 망운면 목서리 「내덕리」로 「덕림리」와 나란히 기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작물은 양파, 마늘, 고구마 등이며, 어업은 낙지가 주 소득원이다. 주민들의 노령화로 석화양식장 등은 거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포패조합(탄도만을 관리하고 석화양식 등 어패류를 주민공동으로 채취하는 단체였다)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노령화로 운영되지 못해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아직 기력이 남은 어르신들은 낙지잡이로 소득을 올리지만 예전만 못하다고 하소연한다. 다만 무안국제공항이 활성화되고 주변 농토의 지가(地價)가 올랐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내덕마을 역시 무안을 비롯한 전통적인 농촌 마을이 맞닥뜨리고 있는 여러 현안을 마주하는 와중에 있다. 그리하여 지난 2005년 ‘친환경농업 시범마을’로 지정되면서 우선, 그동안의 단순한 농업 방식에 대한 성찰과 함께 마을 전체가 건강한 토양, 안전한 먹거리, 지속가능한 환경의 추구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재편하는 계기로 삼았다. 주민들은 친환경농법 교육을 함께 받고, 자재를 공동 구매하며, 농산물 판로를 협력적으로 개척하는 등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협력과 신뢰를 강화하였다. 현재 주민들은 작지만 강한 마을로 나아가고자 마음을 모으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에는 동계(1962 창립), 한씨(韓氏)종친계(1950 창립), 부녀회(1975 창립)가 있었으며, 지금은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예전에는 마을 어촌계 50여 명이 넘는 계원들이 굴양식을 했으나 이제는 일할 수 있는 연령대 사람이 거의 없으며, 양식장도 사라져 운영하지 않는다)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정자, 체육시설 등
전통식품/특산품
마을, 양파, 고추, 참깨 등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옆 서해바다에는 요강섬과 죽도(竹島)라고 부르는 대섬 그리고 엄섬이 보인다. ‘요강섬’은 작은 크기의 섬으로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서 대나무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섬은 마치 요강처럼 보인다 해서(옹기처럼 생겨 옹기섬으로 부르다가 요강으로 바뀜) 붙은 이름이다. ‘대섬’은 요강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때 주민들이 거주했으나 지금은 외지인 소유이다. 해안가의 많은 바위 가운데 ‘유암포(油岩浦)’가 있었다. 속칭 ‘기름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바위에 고여 있던 물이 바위의 철성분과 결합해 흘러내리는데, 마치 기름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유암포는 크고 넓어 주변 학교의 아이들이 소풍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기에 한자명을 차용하여 ‘유암포(遊岩浦)’로 부르기도 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예전 지역 명칭들이 전해온다. ‘가골’, ‘구수동’, ‘쑥대기(쑥당)’ 등이 있다. 이중 ‘가골(각골)’은 현재 외곽도로로 편입되어 없어졌으며, ‘구수동’은 마을 앞에 있던 지명고, ‘쑥대기(쑥당)’은 소재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를 부르던 지명이다. 이곳에서 예전 토기와 돌이 광범위하게 출토되었다. 주민들은 감목관(監牧官)이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 어떤 관(官)과 관련된 건물이나 절터가 있었지 않았는가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현리동명칭일람》(1917)에 망운면 목서리 「애당리(艾堂里)」라는 지명이 이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외에 ‘장수바위’(사람 발자국이 크게 나 있던 곳으로 해안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모래추(모래사장)’, ‘독샘’, ‘놋깡샘’(2개의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효열부금성나씨의적비(孝烈婦金城羅氏懿蹟碑)>(2000): 마을회관 앞에 있는 효열각으로 나씨는 25살에 남편을 잃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던 열부이다. 딸만 둘 두었는데, 딸들이 그런 어머니의 일생을 장하게 여겨 1995년에 세웠다. 2000년에는 효열각 안에 비문을 세웠다. 외덕마을의 덕운산 너머 노을길 한켠에는 지역발전을 위해 공을 세운 송춘성의 <어촌계장송춘성공적비(漁村契長宋春成功績碑)>(2010, 송덕비 내용은 《서해죽도기》(목서어촌조합, 1958)에 나온 내용을 기록했다)와 부자마을을 만든 다섯 노인, 강여오 · 한진호 · 송창숙 · 한명묵 · 송단석 5인의 공적을 기린 <죽도오호송덕비(竹島五皓頌德碑)>(2003) 등 2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외에 해안도로가 나기 전 마을주변 해안가에 촘촘히 말뚝이 박혀 있었다. 말뚝의 용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민들은 쑥당의 기왓장과 연결시켜 커다란 포구의 흔적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곳 해안가의 지형상 큰 개웅이 없고, 수심이 깊지 않아 큰 배가 드나들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말뚝은 토사 방지를 위한 목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자료에 마을 북쪽 구릉 정상부에서 시작해 내덕 앞골로 불리는 곳까지 유물이 넓게 분포한다고 되어 있다. 유적의 서쪽은 서해바다에 접해 있는데, 현재 이곳은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 지표면은 계단식 밭으로 인하여 훼손되었다. 조사된 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편이다.
설화
「내덕」과 「외덕」 사이에는 ‘잔등’이 있다. 주민들은 이 잔등이 두 마을 사이에 저울추 역할을 하며 균형을 맞춘다고 믿었다. 즉 한쪽이 차면 한쪽이 기울고, 또 다른 한쪽이 기울면 다른 쪽이 차는 그런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장수발자국’은 큰 바위 위에 사람 발자국이 있어 그처럼 부른 것인데, 그 바위에는 장수가 살았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서해죽도기》(목서어촌조합, 1958)에는 지역발전을 위해 공을 세운 송춘성의 <어촌계장송춘성공적비(漁村契長宋春成功績碑)>(2010)와 부자마을을 만든 다섯 노인, 강여오 · 한진호 · 송창숙 · 한명묵 · 송단석 5인의 공적을 기린 <죽도오호송덕비(竹島五皓頌德碑)>(2003)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전한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한명남(韓明男, 중앙대학교 부학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에서도 한국전쟁 때 운남 · 운북의 갈등으로 세 사람이 사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특정 사상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상황에 휩쓸려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당시 마을 옆 해변가 모래사장(모래추라고도 함)은 좌익과 우익의 싸움터가 되기도 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영흥 농산물유통센터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내덕마을 옆의 해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수송부대를 포함하여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했었다. 더불어 일본군이 만든 방공호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덕분에 이 마을은 망운에서 제일 먼저 전기불 혜택을 받았었다.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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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03.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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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03.12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