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덕」마을은 위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농어촌마을이다. 망운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볕이 잘 드는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에는 ‘소녀포’와 ‘유암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포구라기보다는 마을 배 몇 척 매어두는 작은 항구이다. 하지만 얼마 전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있는 소나무숲과 갯벌 사이로 ‘노을길’이 생기면서 많은 외지인이 찾아드는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지명유래
「외덕」과 「내덕」은 본래 「덕림」이라고 불리는 한 마을이었으며, 「덕림」이라는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덕운산(德雲山)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마을이 형성될 때 입향조가 덕운산 아래에서 마을의 터를 닦았기 때문이다. 덕운산은 비교적 작은 산이지만 홍주송씨 문중 산으로 김해김씨와 양성이씨 묘가 모셔져 있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같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덕운산의 덕(德)과 소나무숲의 임(林)이 만나서 ‘덕림’이 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유씨와 남씨가 먼저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 이 성씨들은 마을에 살지 않는다. 공식적인 이 마을의 입향조는 홍주송씨(洪州宋氏) 송필하(宋弼夏, 1691~1756, 자-여보, 호-덕운암(德雲庵))이다. 송필하는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에서 살았으나 뜻을 펴기엔 광암리가 여의찮아서 좀 더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1700년대 초기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소쿠리 형국의 이곳을 발견하였고,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한편 《마을유래지》(1987)에서는 이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이 실려있다. 그 내용은 ‘홍주송(洪州宋)씨 송필하(宋弼夏)가 전남(全南) 나주(羅州)에서 외롭게 학문에 몰두하다가 어려운 생계를 타개하기 위하여 1689년경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한다. 한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몇 호 안 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내덕(內德)에 입향한 한종길(韓宗吉)의 후손들이 이곳에서도 살고 있다. 현재 7호가량 살고있는 강(姜)씨의 입향시조는 강문수(姜文洙)로 진주인(晉州人)이며 1680년경 영광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망운면 북쪽의 바닷가를 끼고서 평탄하고 볕이 잘 드는 지형에 자리한 이 마을은 전형적인 농어촌마을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소쿠리 형국이다. 이는 바닷가와 맞닿은 입지와 숲의 포용적 구조가 조화를 이루어 풍수지리적으로 포용·보호·풍요를 상징하는 길지로써, 주민들에게 안정된 삶과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터전으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은 「덕림」이란 명칭으로 시작하였으나 원래 터를 잡은 입향조 이후 서당(書堂)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유명세를 얻어 ‘서당골’이라 불렸으며, 마을의 세가 커져서 「내덕」마을이 분동한 이후인 1936년부터는 「외덕」마을로 고쳐서 부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인조 대 감목관이 설치되면서 영광군 목장면이었으나 《호구총수》(1789)에서는 영광군 망운면으로 지명을 바꾸어서 편재되었다. 다만 여기에 「외덕」마을의 옛 이름인 「덕림」이란 지명은 나타나지 않으며, 「덕림」이 기록에 등장한 것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과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으로 무안군 망운면에 속한 「덕림리(德林里)」와 「내덕리(內德里)」가 나란히 표기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요즈음 시골지역의 마을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마을 곳곳에 축사가 있어 주거하는데 쾌적한 환경은 아니지만 대체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보인다. 마늘과 양파, 고구마와 같은 농작물이 재배되는 농경지는 물론 마을 외곽 해변의 넓은 갯벌에서는 낙지와 바지락 등 다양한 해산물이 잡히고 있다. 이와 같은 생업을 통해서 주민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지금으로부터 오래전인 1920년 무렵부터 마을에서 시작했던 포패조합(지금의 어촌계)에서는 한때 마을 주민들로 결성된 조합원들 약 100여 명이 양식장에 나가 굴 채취를 했었다. 이를 통해서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었는데, 현재는 조합원의 노령화로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노동력만 있으면 굴 양식장 등에 나가서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 마을조직은 동계(1680 창립), 송씨종중계(宋氏宗中契, 1680 창립), 청년계(1977 창립) 등이 있었다. 지금은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어촌계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누정, 체육시설, 공동창고. 재활용품수집장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고구마, 낙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덕운산 아래 해안가에는 바위가 많은데, 이 중 이름과 사연이 있는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이중 가장 큰 바위는 ‘유암포(油岩浦)’였다. 일명 ‘기름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바위에 고여 있던 물이 바위에 있는 철(鐵) 성분과 만나 흘러내리면서 마치 기름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바위에 석양 노을이 비치면 기름처럼 반짝거리 모습을 보고 ‘기름바위’라고도 했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는 크고 넓어 주민들뿐 아니라 주변 학교 아이들의 소풍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한자로 ‘유암포(遊岩浦)’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화장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아이가 죽으면 이 바위 위에서 화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바위’는 통샘 밑 100여 m 되는 곳의 바다에 약 4톤 정도 크기의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의 모양이 승려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중바위’라 불렀던 것이다. 예전에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이 이 바위에 공을 들이고 아이를 낳은 적이 있어 주변에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중바우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녀포(少女浦)’가 있었는데, 유암포 옆 서쪽 개어덕 아래 바닷가에 돌을 깎아 갯벌에 박아 놓은 듯한 돌기둥들이 여러 개가 20세기 초까지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나라에서 세금을 곡물로 받아들였던 배의 정박지로써 닻줄을 묶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곡물을 하역하여 육로를 통해 영광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다른 지명을 근거로 또 다른 사연을 유추해 본다. 오래전에 중국으로 소녀들을 공출해주었던 우리의 슬픈 역사를 생각해보면, 혹시 이곳에서 소녀들을 배에 태워 중국으로 가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속다른 사연들이 많은 소녀포 바위들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망운비행장을 조성하면서 비행장 기반 조성공사에 쪼개서 모두 써버렸다. 주민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또한 분노하는 지점이다.
이외에 목내에 있었던 통샘과 같은 동명의 ‘통샘’이 이곳에도 있었다. 수량이 많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주민들로부터 사랑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망운비행장 건설로 주둔하고 있는 일본인 병사들 대부분이 먹었던 식수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뽕남거리’(마을 중간에 뽕나무가 심어져 있던 길), ‘번덕기’(소나무가 자라던 마을 앞을 지칭했다), ‘동네샘’, ‘벌내간’, ‘안산’, ‘수렁골’, ‘계비산’, ‘원논’과 ‘수문’, ‘빵가시’, ‘목너메’, ‘원개’ ‘활방구’(목화를 따면서 불렀던 노래), ‘둥당에타령’(옴박지 곧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아주 작은 질그릇인 ‘옹자박지’에 물을 가득 담고 갈 때 물이 출렁거리지 않게 바가지를 엎어 놓는데, 그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 ‘봉남개비’(소나무를 얇게 깎아 여러 개를 묶어 말려놨다 밤에 외출할 때 등불로 사용했다), ‘메까고지’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덕운산 뒤에 ‘장수집’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밑에 공간이 있어 주민들이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유물, 유적
‘홍주송씨사당터’: 1756년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마을 입향조 송필하와 부인인 해주오씨를 비롯한 선대조를 배향했다. 때문에 이 마을로 시집오는 송씨가(宋氏家) 며느리들은 시가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사당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문중에서 조그만 의견충돌이 있어 철거해버렸다.
「외덕」마을에는 마을 안과 마을 외곽에 여러 기의 공적비와 행적비가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 <삼성홍주송공광기효행비(三省洪州宋公光奇孝行碑)>(2006)와 <송광연송덕비(宋光連頌德碑)>(2006)가 놓여있고 <홍주송씨효절비(洪州宋氏孝節碑)>(2003)는 마을 왼쪽 ‘메까고지’라 부르는 곳에 있는 효열각이다. 홍주송씨 13대인 홍명인(1834~1891)의 효도와 그의 부인 행주기씨(1831~1909)가 어린 조카를 길러 종손의 대를 잇게 하였으며, 효자였던 남편의 뜻을 이어 시부모 공양 뿐 아니라 집안을 일으켜 세운 공덕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 마을외곽의 <송효열부광산김씨실적비(宋孝烈婦光山金氏實蹟碑)>(무술년 건립)는 광산김씨는 송명해의 부인이다. 그녀가 시집오기 전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그녀가 오면서부터는 살림이 늘어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갑자기 목병에 걸려 말을 못 하고, 음식도 못 먹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낫지 못했다. 갑자기 임종을 당하자, 부인이 세 차례나 단지(斷指)해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남편이 죽자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며 두 아이를 훌륭한 선비로 키웠다. 그리하여 부모에는 효부이고, 남편에는 열부이며, 자식에는 현모였던 한 여인의 인생을 기리기 위해 그 손자가 열부비를 세운 것이다. <송효열부의령남씨실적비(宋孝烈婦宜寧南氏實蹟碑)>(1994)는 송광철(1887~1918)의 처, 의령남씨가 27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잘 길렀으며, 집안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데 몸소 실천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이 외에 <묵헌처사송명순경모비(黙軒處士公明洵景慕碑)>와 <국파처사송공영식강학비(菊坡處士宋公永植講學碑)>가 있다. 외덕마을 뒤의 덕운산의 노을길변에는 지역발전을 위해 공을 세운 송춘성의 <어촌계장송춘성공적비(漁村契長宋春成功績碑)>(2010, 송덕비 내용은 《서해죽도기》(목서어촌조합, 1958)에 나온 내용을 기록했다)와 부자마을을 만든 다섯 노인, 강여오 · 한진호 · 송창숙 · 한명묵 · 송단석 5인의 공적을 기린 <죽도오호송덕비(竹島五皓頌德碑)>(2003) 등 2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 마을 근방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있다. 이 중 최씨 소유의 땅에 있던 격납고는 비행장으로 통하는 길이 나면서 없어졌다. 현존하는 격납고는 해동마을 ‘가당곡’(미곡처리장) 부근 경작지에 1기, 해동마을 도로 너머 현경 방면 바닷가에 1기의 격납고가 남아 있다. 예전에 이 격납고에는 집이 없는 외지인이 그 안에서 흙담집을 짓고 살았다는데, 지금도 사람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송석조(宋錫祚, 望雲都監), 송광연(宋光連, 망운면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때 두 사람이 희생되었다.(내덕마을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다). 이른바 배나무정 싸움 이후 마을에서 주민들이 무안읍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의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망운에서 살았던 사람이 그 주민 두 사람을 지목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