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감목관의 북쪽에 있어서 북촌이라고도 불렀던 「목북」마을은 목서리의 가장 북쪽이지만 망운 읍내에서는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거쳐가는 운해로를 따라가면 가장 먼저 무안국제공항에 닿는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뒤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송전(松田)이라고 부르는 둔덕이 있는데 이곳은 망운면에서 가장 높은 지역(해발 21m)이다. 이 마을은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부자들이 망운면에서 가장 많이 살았던 곳으로 일본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명유래
망운면은 감목관(監牧官: 조선시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의 무관 벼슬)이 있었던 곳이다. 목관 터는 현재 망운초등학교 체육관 자리이다. 목관은 병사용, 관청용 말을 사육한 전국 21개 목장 중 한 곳으로 목동 · 목남 · 주교 · 압창 · 해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된 목장이었다. 당시 망운의 목관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곳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한 자은목장 · 장산목장 · 압해목장이다.
그리하여 망운면 소재지의 지명은 예전부터 ‘목관(牧官)’ 또는 ‘목내(牧內)’를 4등분하여 방위에 따라 「목동」 · 「목남」 · 「목서」 · 「목북」으로 구분했다. 목북은 이와 같은 유래로 생긴 지명이다. 「목북」마을은 원래 「목서」마을과 동일한 행정구역이었으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1992년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분동(分洞)되었다. 그래서 현재 이 마을은 목서5리에 속한 「목북」마을이고 「목서」마을은 목서1리에 해당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목내의 4개 마을 형성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목관(牧官)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을의 형성시기는 목관이 설치된 조선시대 인조년간(仁祖年間, 1623~1649)대로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다. 마을의 입향조 역시 알려진 바가 없으며, 주민들은 광산김씨, 경주이씨, 전주이씨 정도로 짐작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목서리(목내) 전체를 둥글게 둘러 가며 나무를 심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전해온다. 그중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나무를 심어야 번창한다는 비보설(裨補說)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목내가 여성을 상징하는 모습이어서 숲으로 보호해야 집안이 편안할 수 있다는 풍수설에 영향을 받아 심은 것이며, 세 번째는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수목이 촘촘하게 배치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나무들 상당수가 수량이 말라 죽고 베어져 나갔지만 「목서」마을과 「목북」의 나무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주민들이 잘 관리해온 덕도 있겠지만, 숲의 부지가 국유지인 덕분에 잘 관리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목동」이나 「목남」의 나무들은 개인소유지인 관계로 관리가 소홀한 편이어서 울창하지 않다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문헌 기록에 따르면 이 마을은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에 영광군에 속한 망운면 「목북촌(牧北村)」으로 나온다. 이후 1910년에 망운면이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어 망운면 「목북리(牧北里)」가 되었다, 이때 「목북」마을은 목서리였으나 199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분리되어 목서5리 「목북」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내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포구가 개발되었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 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목화, 쌀 등 곡물을 수집하는 조선흥업회사 사무소가 압창 마을에 설치되었으며,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말기의 망운비행장 건설과 일본전투기를 보관하기 위한 격납고 설치 등은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증가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목북」마을은 조선 인조 시기 감목관 설치와 함께 형성된 역사 깊은 마을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흔적이 많이 남았던 곳이지만 전통적인 농업 중심의 농촌마을이면서 망운 읍내의 일원으로 기능하였다.
주요시설
망운성당, 대운사, 망운초등학교
마을변화
오늘날의 「목북」마을은 「목동」 · 「목서」 · 「목남」과 더불어 망운면 소재지로 대부분의 주민들은 반농반상(半農半商)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상업은 예전에 비해 주춤한 편이다. 이에 무안공항이 들어오면서 개발 바람이 불어 외지인들이 매입한 빈집이 많이 생겨났고, 집터가 농경지로 변한 곳도 여러 곳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무안국제공항이 활성화되고 고속철도역이 생기면 다시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체육시설, 정자, 재활용품수집장 등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안에는 ‘북촌샘’으로 부르는 우물이 있었다. 목내 4곳의 통샘 중 가장 물이 좋았다고 한다. 목내의 4개 통샘을 여자, 조산등을 남자의 형국으로 해석했다. 「목북」 마을 뒤에 소나무가 우거진 ‘송전(松田)’이라 부르는 숲을 배산으로 앞에는 1920년에 개교한 망운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망운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등이 인근에 위치해 있어서 생활 기반이 안정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지형 및 생태환경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 현재 일본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안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 2곳 중 한 곳인 남소학교(현재 망운초등학교)가 있었으며, 학교 옆에 망운비행장을 관리하는 연대본부가 있었다. 또한 일본인 재향군인회 분회도 있었다.
동/식물
목관성 둘레에 심었던 고목(노거수)가 띠숲을 이루고 있다. 목내의 4개 마을 둘레에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는 띠숲을 목성(木城)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무의 대략적인 수령은 300여 년이 넘는다. 고목(노거수)가 군락을 이루며 둘러싼 이곳은 오목한 분지의 형태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송전(松田)에서 정성스럽게 기우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상여 등이 이 둔덕을 넘어가려고 하면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할 정도로 신성시 했던 곳이다.
유물, 유적
마을 둘레에 목관 성터가 남아있다. 또한 지난 마을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소학교 정문 앞에 있었던 일본인 육군대장 이치노헤 효에(一戶兵衛)가 세운 ‘충혼비(忠魂碑)’를 발견하였다. 당시 학교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이 충혼비에다가 인사를 하며 지나가야 했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다릿돌로 사용되었던 비석을 이 마을 주민인 남승용 씨가 찾아다가 식민시대 유물로 보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남승용 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비석의 자취는 묘연하여 안타까운 상황이다. 당시 ‘송전’에는 일본인 신사(神社)가 있었으며, 사당 옆에는 3층 높이의 관측소가 있었다. 이 관측소는 망운비행장을 살피는 역할을 했으며 관측소 뒤에는 비행기를 보관하는 격납고도 있었다. 송전은 6.25 한국전쟁 때에는 조산마을과 함께 봉홧불이 올랐던 지역이기도 하며 또한 좌우익 인사들의 처형장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 마을에 있는 ‘대운사(大雲寺)’는 천석꾼 이상호의 집터에 1995년에 창건한 불교 사찰로, 종루와 극락보전, 산신각 등의 전각을 갖추고 있으며 별도의 종파(宗派)에는 속하지 않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전망이 트이고 쾌적한 ‘송전’에는 누정과 체육시설 등으로 이루어진 <목서공원>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