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방향(운해로)으로 1km가량 가다 우측의 마을표지석을 따라 우회해 들어가면 나오는 농촌마을이다. 마을을 지나가는 ‘운해로’ 맞은 편에는 「용교」마을이 있고 마을 뒤로는 압해도-현경을 잇는 ‘공항로’가 지나고 있다. 북계동으로 부르는 지둥개 · 남계동 · 중계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간척지의 농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해변에는 ‘장재항’을 비롯하여 넓은 갯벌과 노을길이 전개되어 있으며 ‘요강도’와 ‘대섬’이 앞에 있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명유래는 《마을유래지》(1987)에 ‘망운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있어 장자(長子)로 불리다가 후일 현재의 장재(壯才)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장재마을회관준공기념비>에는 위와 대동소이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운남면 서쪽에 위치한 장재마을은 운남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있어 장자(壯者)터로 불러오던 중 설씨(薛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았고 다음으로는 유씨(劉氏)가 들어왔다 하나 지금은 전주최씨(全州崔氏), 김해김씨(金海金氏), 홍주송씨(洪州宋氏), 광산김씨(光山金氏), 회덕국씨(懷德鞠氏)등이 살면서 「장재」라고 불러오고 있다(2003.12.30)’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장재」마을이 형성된 역사는 짧다. 주민들은 사람들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길어야 110여 년 전후라고 한다. 《마을유래지》(1987)에는 설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지만, 한 가구도 없으며, 다음으로 유(劉)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역시 지금은 살지 않는다. 현재의 전주최씨(全州崔氏), 김해김씨(金海金氏), 회덕국씨(會德鞠氏), 홍주송씨(洪州宋氏) 등은 확실한 연대를 모르지만 그 후대에 이주하여 왔다고 전한다(제보자 국봉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주민들과 함께 입향 연대를 추정해보니 전주최씨와 광산김씨가 110여 년을 전후해서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앞쪽 바다에 있는 ‘대섬’은 풍수적으로 뛰어난 지형을 갖고 있어, 일제감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러모로 수난을 겪었다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섬의 자라목 부분에 쇠말뚝을 세 개나 박았고, 「외덕」마을의 일본군 부대에서 대포를 쏴 이 자라목을 자르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대섬’이 마을의 명당(明堂) 또는 안산(案山)에 해당함은 물론 섬의 형상이 ‘자라목’ 곧 거북이(귀룡, 龜龍)로써 장수, 안정, 지혜를 상징하는 길한 지형이어서, 일본인이 쇠말뚝과 포격으로 이를 훼손하여 이러한 길한 기운(生氣)을 차단하고 파괴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이처럼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의 풍수적 명당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민족 정기를 끊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정기(精氣) 억압 정책은 문화적, 상징적 탄압으로써 제주도 용암(龍巖) 폭파, 개성 송악산 정기 끊기 등과 유사한 사례라고 하겠다. 현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자라목 부분에 관리가 잘 된 무덤 몇 기가 자리해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장자(長子, 壯者)」로 불리다 지금은 「장재(壯才)」로 고쳐서 부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호구총수》(1789)에 나타나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와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 망운면에 속한 「장재동(壯才洞)」으로 등장한다. 원래는 옆 마을인 「대곡」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1980년대에 분동(分洞)되어 「대곡」은 목서3리로 「장재」는 목서6리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병행한다. 주민들의 세대당 소유 농지가 적은 소농이 대부분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예전에는 작은 농지에서 오직 농사만 짓던 빈촌이었지만, 근래 들어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인근 탄도만 주변의 갯벌에서 낙지 등 어패류를 잡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하다. 얼마 전까지 낙지잡이가 잘될 때는 한 사람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70~80만 원은 거뜬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마을 주민 대부분은 배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거의 40여 척이나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가 많은 데도 이 배들을 정거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주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주요시설
망운면 새마을공부방(마을회관 앞에 있는 건물로 30여 년 전에 마을공부방으로 만든 것인데, 한때는 어촌계에서 사용하다, 최근에는 장재항 어촌뉴딜특화사업 시행사에서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낙지양식장, 장재항 커뮤니센터 등
마을변화
2022년 무안군에서 공모신청한 ‘어촌뉴딜300’에서 ‘장재항어촌뉴딜특화사업’이 선정되어 선착장 신설, 물양장 확충, 복합 어민쉼터 신축, 마을진입로 정비 등 어업기반시설 개선공사가 이루어져 지금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마을은 주민들의 어업 기반을 강화함은 물론 관광자원 개발을 통해 서해안 지역의 새로운 거점 마을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에는 동계(1947 창립), 동갑계(1980 창립)이 있었으나 지금은 부녀회, 노인회, 어촌계가 조직되어 있다. 예전에는 이 마을 청년회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마을의 애경사는 물론이고 모든 일에 나서 솔선수범하여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마을과 달리 젊은 사람들이 많다. 바다에서 나는 소득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부가 공동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으며,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탄도만 해역으로 나가 낙지 등 수산물을 잡아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쉴 틈이 없는 마을이다.
공동이용시설
정자, 체육시설, 재활용품수집방 등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고추, 참깨, 낙지 등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요강도’(오강섬)는 마을 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섬의 모양이 요강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오강섬은 마을 어촌계에서 육로길 곧 노둣길을 내어서 외지의 가족단위 소풍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대섬’(자라섬)은 요강도 옆에 있는 섬으로 시누대(해장죽, 海藏竹)가 많아서 대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지네도 많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기도 했었기 때문에 옹달샘 등이 남아있다. 요즘에는 멧돼지 등 큰 동물이 살고 있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현재 이 대섬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장재저수지’는 마을 입구에 있는 저수지로 일제강점기(1945)에 만들었고, 1967~1968년도 한해 때 밀가루 배급을 받아가며 보강했다. 이 저수지 아래의 농지에는 간척되기 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지둥개’ 들은 장재마을회관 뒤에 있는 들로 지금은 ‘장재들’로 부른다. ‘부자터’는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공터로 왜 집을 짓지 않느냐는 물음에 주민들은 예부터 그 자리에 집을 지으면 손(孫)이 없다 해서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의 조사로 마을 입구 나지막한 구릉지와 해안가 구릉지 등 두 곳에서 선사시대 등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숫돌, 회청색경질토기편, 적갈색연질토기편 등 선사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마을 입구인 광산김씨 문중 묘지 주변에 3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밭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깨어버려서 현재는 사라져 버렸다.
설화
무안군에서 제일가는 부자 장자방이 살고 있다고 해서 장재마을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최화수(崔華洙, 망운면장)
거처/생가/묘소
광산김씨세장묘, 망운김씨세장묘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무안군의 역점사업이었던 <노을길조성사업>에서 이 마을은 망운면 관내 노을길의 중심지였다. ‘노을길’은 망운면 조금나루에서 현경면 용정리 봉오제로 이어지는 10.1km의 바닷길이다. 탄도만으로 넘어가는 노을은 망운면 최고의 절경으로 이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마을 주변의 해역은 청정수역이다. 이곳에서 잡은 낙지 등 수산물은 수산물 검사소의 품질검사에서 최고등급을 받는다. 갯벌의 질이 좋고 오염원이 없으므로 차지고 맛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주민들은 30여 년 전에 전답 기반 사업으로 설치했던 물 저장고에 대해여 불만이 많다. 한 기당 수억 원씩 세금을 들여서 만들었던 저장고가 주민들에게 도움은커녕 비난을 받고 있다. 저장고 운영비가 현실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농지를 절대농지로 묶는 바람에 재산권 행사에도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서해안 바다를 따라서 수백 기가 설치되었지만 사용하는 저장고는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3기가 있었다. 현재 바닷가의 물 저장고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는 쉼터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