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교」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용교교차로에서 운남 방향 초입의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무안국제공항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톱머리해수욕장의 해안에 연접해 있기도 하다. 이 마을은 새터 · 방아다리 · 확골 등 세 곳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방아다리와 새터는 무안국제공항 부지로 흡수되었으며, 기존의 ‘용교’와 조금 떨어져 있던 ‘확골’이 합하여 현재의 「용교」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
이 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한 《마을유래지》(1987)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곳이 다리 부근이었는데, 근처에 방앗간이 있으므로 ‘찧을 용(舂)’자를 써, 「용교」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마을역사자료조사》(2017)에서는 이 마을의 형국이 ‘방아다리’ 모양인데서 유래한 것으로 역시 ‘찧다’, ‘절구질하다’라는 의미의 용(舂)자를 붙여 「용교(舂橋)」라 하였으며, 일부 행정문건에서 이 마을을 「춘교(春橋)」로 기재하는 것은 한자의 ‘찧을 용(舂)’자가 ‘봄 춘(春)’자와 비슷해 잘못 옮겨 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이 마을의 일부인 ‘확골’도 ‘학동’ 또는 ‘학골’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춘교’처럼 잘못된 지명이다. 확골(‘확’은 확돌 또는 돌확이라고 하며, 돌로 만든 절구이다. 예전에 곡식을 갈거나 고추 등을 빻을 때 사용하던 용구로 둥그런 돌을 우물처럼 파내어 만들었다)이 현재의 학골로 변한 것은 발음 편의에 따른 것으로 추정되며, 때때로 ‘절구 구(臼)’자를 써서 ‘구곡(臼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새터’는 ‘방아다리’ 옆에 있는 마을로 새로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강릉유씨와 경주정씨다. 《마을유래지》(1987)에서는 ‘마을의 형성은 조선조 중엽인 1540년경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경주정씨(慶州鄭氏)가 살게 되면서이다. 그 후에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주민들 말로는 300여 년 전에 한두 가구로 시작하여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 말엽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입향조는 강릉유씨 유일철(1807~미상)로 그는 운남면 하묘리에서 1800년대 중반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마을이름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부터 등장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형국은 방아다리(디딜방아라고도 하며,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였다. 지금은 주변 개발로 흔적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으나, 이러한 디딜방아 곧 방아다리 형상은 풍수적으로 풍요·재물·인재 배출·공동체 화합을 상징하는 길지로 본다. 이는 곡식을 찧어 양식을 마련하는 도구인 방아가 마을이 곡식과 재물이 풍성해지는 상징이며, 디딜방아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작동하는 도구이므로 주민들이 협력하여 살아가는 공동체적 기운을 의미한다. 그렇듯이 방아다리 형국은 재물을 찧어내듯 끊임없이 인재와 재물을 배출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새터 · 방아다리 · 확골 등의 세 개의 지명이 병합되어 지금의 「용교」가 되었다. 한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와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현리동명칭일람》(1917)에는 마을이름이 「춘교리(春橋里)」로 표기되었고, 1987년의 행정구역일람에도 「춘교」로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이 마을의 명칭이 예전에 ‘방아다리’로 불리다가 지금은 「용교(舂橋)」로 부르는데, 「춘교」는 잘 모르는 마을지명이었다고 한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망운면의 행정구역 변천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영광군에 속했으며, 1910년 목포부 관할로 편재되었다가 1914년 무안군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호구총수》(1789)에 이 마을지명은 등장하지 않으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춘교리(春橋里)」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지만 일부 낙지잡이 등의 어업도 겹하고 있다. 한편 주변이 개발되면서 지가(地價) 상승 등의 호재도 기대하고 있다. 주요 작물은 쌀, 고구마, 마늘, 참깨이다.
주요시설
마을에 무안국제공항에서 기상현상을 탐지하는 시설인 기상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으며, 용교저수지가 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근래 들어 망운-광주 간 고속도로와 무안국제공항의 활주로가 놓이고, 마을 뒤로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면서 주민들 말처럼 마을이 교통망에 갇힌 형국이다. 여기에 이 마을의 농경지 일부가 무안국제공항으로 편입되어 경작지가 줄어들고, 마을도 규모도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마을이 나뉘고 역사가 길지 않지만 주민들의 단합이 잘되고 있다. 여러 성받이가 살고 있어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집성촌보다도 화합과 양보가 잘 이루어져 마을 발전이 기대된다고 한다. 특히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화목함을 이루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까지 동계(1960 창립), 상포계(喪布契, 1975 창립) 부녀회(1978 창립)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요즘은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용교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있던 ‘청죽샘’은 수량이 많이 나오고 물맛도 좋았다. 일제강점기에 비행장 공사를 하면서 인부들이 길러 마시기도 했는데, 현재는 곳곳의 지하수 개발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마을 앞으로 망운에서 운남으로 가는 도로 옆길을 따라 약 150m 정도 길이의 ‘진구렁’이라고 부르는 긴 계곡이 있었다. 지금은 메워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원래는 깊고 긴 계곡으로 소나무를 비롯하여 아카시아나무 등의 숲이 우거져 주민들은 한낮에도 지나다니기 꺼림칙할 정도로 섬뜩했던 곳이라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의 옛 지명으로 ‘새터’, ‘방아다리’, ‘확골’, ‘숯골’, ‘종실고랑’, ‘싯돌방죽’ 등이 있다. 또 ‘댓병에 물이 가득 차야 모를 심을 수 있다’는 속담이 전하는데, 지하수가 개발하기 전에 농지가 적고 물길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던 예전에 생긴 말이다. 특히 마을 입구 한 길가의 논을 가리키며 나온 말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가뭄이 들면 마당바위 주변의 무덤을 파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유물, 유적
‘인바윗등’: 확골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이다. 광산김씨 문중산으로 오랫동안 ‘큰바위’라고 불렀으나, 왕망의 전설을 거치면서 현재는 인(印)바위로 불린다. 오래 전에 이 인바윗등 주변에서 밭을 경작하던 주민이 경운기로 밭을 갈다, 원형이 잘 다듬어진 돌도끼와 화살촉 등을 발견했다고 한다. 원래는 마당바위로 부를 만한 두 개의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어렸을 때, 이 바위 위에서 뛰어놀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로공사 등으로 깨지고, 쪼개져 현재는 세 개의 바위와 굄돌 1개가 있다. 남아있는 바위 중, 큰 바위는 단면 길이가 3.10m이고, 두께 80cm의 규모이다.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지석묘 주위에 고총(古塚)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2004년에 무안국제공항을 건설할 때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어 ‘용교유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있다. 마을 주변 해발 30m 상의 완만한 구릉 위에 있는 ‘용교유적’은 석기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유적이 발견되어, 무안지역의 구석기-청동기-삼국시대-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시기의 생활 흔적이 한 지역에서 확인되어 무안지역의 장구한 인류 활동을 보여주었다. 구석기 유적으로는 후기 구석기 시대 석기류인 안산암제 격지, 소형 찌르개 등이 출토되었으며, 청동기 유적으로는 인근 지석묘군과 연계된 생활 흔적 확인되었다. 그리고 총 6기가 확인된 삼국시대 집자리에서 나온 대표 유물로는 장란형 토기(몸통이 긴 항아리), 사발형 토기 등이며, 조선시대 집자리는 1기가 확인되어서 당시 생활 흔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자 가마터가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제사용으로 추정되는 백자 출토되었고 가마터 바닥시설 일부가 확인되었다. 이처럼 복합시대 유적지로써 구석기 석기부터 삼국시대 토기, 조선시대 집자리까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된 용교유적지는, 무안지역이 선사시대부터 근세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하며 문화를 이어온 공간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유적공간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안타까운 상황이다.
설화
확골의 ‘인바윗등’은 왕망의 전설을 거쳐 지금의 명칭으로 불린다. 유래는 후삼국 혼란기에 서남해 배후세력을 평정하고 왕건의 득세에 공을 세운 왕망이 고려건국 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자 왕건에게 역심을 품고, 역모를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는 압해읍 고이도로 달아나 왕산성(고이도성)을 쌓고 재기를 꿈꾸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왕건이 보낸 관군에 쫓겨 도망치게 되었는데, 왕망은 도망치면서 그가 사용했던 도장을 망운 두무치의 큰바위 밑에 숨겼다고 한다. 그것이 현재의 인(印)바위인 것이다. 이 인바윗등 옆에 전주이씨 묘가 있는데, 묘의 상석에는 ‘구암(臼岩)’이란 표기가 나온다. 구암(臼岩)은 ‘확골의 바위’란 뜻으로, 인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에서도 망운면의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6.25 한국전쟁 당시, 지역 간 갈등으로 2명이 희생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진구렁’ 계곡에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진구렁에서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고 죽창에 찔려 진구렁에 버려지기도 했다. 이 계곡이 메워지기 전까지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뼈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구렁은 면사무소 뒤 ‘망제’라 부르는 곳에도 있었다.
이처럼 진구렁에 얽힌 한 악당의 일화가 전한다. 일제강점기 망운에 김또칠(金又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세며 도깨비 같은 모습을 지니고서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김또칠은 주로 목내 진구렁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는데, 특히 망운장을 보러오는 현경 사람이나 산행길에 나선 고이도나 운남 사람들이 주된 봉변대상이었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시시때때로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던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업보였는지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큰아들은 권투하다 맞아죽고, 둘째 아들은 6.25 한국전쟁 때 죽창에 찔려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복싱 동양챔피언으로 성장했으나 일본에서 비명횡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악행은 6.25 한국전쟁 당시 운남 · 운북의 주민갈등을 부추기는 데도 ‘한몫’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호남KTX신선 개통과 함께 서남권의 관문 역할을 할 무안국제공항이 빨리 활성화 되었으면 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형국이 디딜방아라고 하는 ‘방아다리’마을과 돌절구인 확돌에서 비롯된 ‘학돌’마을로 이루어진 이 마을에는 이러한 지명을 이용한 마을노래가 전해온다. ‘장재의 큰 부자가 확돌에 나락을 넣고, 방아다리에서 힘을 주어 찧는데, 쌀은 남고 왕겨만, 두모의 지잿등(지앙등)에 쌓이더라’는 내용인데, 인근의 장재마을(목서3리)과 두모마을(송현1리)까지 서로 연결되는 흥미로운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