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피서2리 망운면 조산 작성
  • 조산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77세대, 인구 209명(남105, 여104)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피서리에 속한 마을은 「용교」, 「조산」, 「정착」, 「톱머리」 등인데, 이중 「조산」마을은 「율리」(밤골)와 함께 피서2리에 해당한다. 「조산」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1km 남짓 남동방향으로 광주-무안 간 고속도로의 끝 무렵에 있다. 무안항공특화산업단지 맞은 편에 있는 마을은 논과 밭이 주위를 둘러싼 구릉으로 무안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담에 벽화 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정겹고 단정해 보이는 농촌마을로,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마을 뒤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지명유래
「조산(造山)」이란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유래지》(1987)에 의하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가운데 산이 있고 그 산속에 절이 있는 경관이므로 「조산(造山)」 또는 「율리(栗里)」로 불렀다.’라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시작은 「하율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율리」는 무안국제공항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밭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3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주민들이 살았는데, 터가 척박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등 궂은일이 자주 생겨서 현재의 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때 이주해 온 대표적인 성씨가 김해김씨이다. 또 조선시대에 전주이씨, 경주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지만 그 유래와 시기 등이 확실하지 않다. 그리하여 마을 형성의 다른 이유도 있다. 200여 년 전에 돗재 안의 부자인 하동정씨 정한기 씨가 많은 농토를 가지고 살았는데, 그 농장에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일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란 것이다. 그리하여 대표적인 성씨가 없고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서 살다가 1980년대 무렵에야 천안김씨, 김해김씨, 나주정씨, 장흥고씨, 남평문씨 등이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조산(造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숲을 형성해 산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다.’라는 속설에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목내의 ‘통샘’이 여성의 성기(性器)를 닮아 비보(裨補)하지 않으면 목내의 남자들이 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통샘에서 마주 보이는 이 마을에 우뚝 솟은 산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풍수적 의미로 살펴보면, 조산(造山)이라는 말 자체가 “산을 만들어 부족한 기운을 보완한다.”라는 의미이듯이, 마을 앞에 산을 조성해 부족한 기운을 보완하여 음양의 균형을 맞추려 한 것이다. 즉 목내의 ‘통샘’이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는 속설은 풍수에서 흔히 쓰이는 형국론(形局論)의 일종으로, 음(陰)의 형상을 마주한 마을은 양(陽)의 기운이 약해져 남성에게 해가 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마을 앞에 산을 세워 양(陽)의 기운을 보강함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 했음은 물론, 풍수에서 산림은 곧 생기(生氣)와 보호막을 의미하기 때문에 조산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의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은 원래 ‘밤골’을 뜻하는 「율리」로 불리다가 이후 지금의 「조산」으로 바뀌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망운면의 행정구역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피서리(皮西里)에 속했다. 이후 1910년에 잠시 목포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에 무안군에 편재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 무안군 망운면 피서리에 속한 「조산리(造山里)」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톱머리 간척으로 창포만이 막히기 전까지는 주민들은 마을 앞 갯벌에서 낙지 등 각종 수산물을 채취함은 물론 석화 양식장 등을 운영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둑이 막히면서 갯벌이 사라지고, 생계를 돕던 양식장도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광양 등 외지의 사람들이 양식장 운영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미리 등록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생업 현장을 잃은 주민들이 나름대로 대책위를 조직해 대응했으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로 마늘, 앙파, 고구마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이 무안국제공항의 지척에 있어 주민들은 앞으로의 개발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24년 12월 29일에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공항은 1년 넘게 운항이 중단된 상태이며, 이에 인접한 「조산」마을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공항 셧다운의 직격탄을 맞아 관광·교통·지역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 이에 주민들은 생활 불편과 경제적 피해 속에서도 마을 환경 정비와 공동체 활동을 이어가며 버티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까지 부녀회(1975 창립), 동계(1962 창립), 청년회(1980 창립)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나, 요즘은 부녀회, 노인회, 어촌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조산마을회관, 마을누정, 공동창고, 재활용품수집장 등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무주봉’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함평시장에서도 이 봉우리를 볼 수 있을 만큼 높다. 이곳에 서면 주변의 탁트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잘 다듬어진 망운비행장과 현경 「동산리」의 황토밭, 그리고 서해안의 모습들이 한눈에 보인다. 지금은 창고가 들어선 이 무주봉은 6.25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활약하던 빨치산들이 서로 연락하기 위해 봉화불을 피웠던 곳이다. 무주봉의 봉화는 한국전쟁 당시, 운남과 망운은 유독 좌우 사상대립이 심했는데, 무주봉은 청계 · 운남 · 현경 · 해제 등지에서 활동했던 빨치산들의 연락수단이었다. 무주봉을 포함한 도대봉과 대박산 · 옹산 그리고 감방산에 걸쳐서 올려졌던 봉화는 6.25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더이상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동/식물
지금은 무안국제공항에 포함되었지만 ‘솔개가 날아드는 고개’란 의미의 ‘솔개재’가 있었다. 그만큼 무안반도 서쪽의 ‘무안강’이라고 부르는 서해의 안쪽바다와 창포만의 갯벌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이 많았다. 요즘도 계절마다 수많은 철새가 찾아오는 도래지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주민들은 구름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솔개재’나 ‘망운(望雲)’ 같은 지명이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곳임을 암시한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발동기머리’(발동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불리는 지명이다)와 ‘무르들’(마을 앞 들), ‘버드실’, ‘솔개재’(현재는 비행장에 속한다), ‘큰 돌’, ‘수문통’ 등이 있다. 또한 망운시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수랑골’(망운시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다)이 있으며, ‘종실골’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1986년 · 2001년 · 2002년 · 2006년에 걸쳐 이 지역의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로 마을 뒤편에 있는 3곳의 구릉에서 여러 기의 옹관묘가 확인되었으며, 적갈색연질토기편과 회청색경질토기편 등 옹관이나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이외에 마을 주변에 여러 기의 고분이 분포하였으나 민가와 밭 등을 조성하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특히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며, 현재도 하율리 터에서 농작물을 경작하기 위해 밭을 갈 때면 당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자기’들이 많이 출토한다고 한다. 무안국제공항 방향의 마을길 한 켠에는 공항부지로 들어간 「피동」마을의 <효자남파한양조공정려비(孝子南坡漢陽趙公旌閭碑)>(2001)와 비각과 <학생조공재형효행실적비(學生趙公載炯孝行實蹟碑>(1943)을 이 마을로 옮겨왔고, 근래 조성된 <면장한양조공재형공적비(面長漢陽趙公載炯功績碑)>(2025) 등이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이었던 고동렬 씨가 선진 농법을 구사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다. 특히 고구마 농사에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여 신품종인 ‘수원42호’를 개발하였다. 정읍 출신으로 처가살이했던 그는 재배 기술뿐 아니라, 저장 기술도 좋아 주변 농가에 비해 많은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6.25 한국전쟁 때 피해를 보아 목숨을 잃었다.
거처/생가/묘소
광산김씨 세장산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의 사상대립이 치열했던 때 이른바 ‘피서마을 21명의 비극’으로 이 마을 주민들도 대거 희생될 뻔했었다. 이념에 따른 동족상쟁이 다반사였던 당시 피서리 일대의 주민들도 분주소 습격을 계획하고 서로 결의를 다지며 연판장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피동, 피서, 용호동마을의 주민들은 이름을 썼으나, 이 마을 주민들은 사정이 있어 다음에 써넣기로 하고 시기를 미루었다. 그리하여 거사 날짜를 기다리던 중에 일행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그 배신자는 연판장을 가져가 분주소에 신고했다. 그날 저녁에 연판장의 서명자는 모두 죽창에 찔리거나 생매장당했다. 하지만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은 이 마을 주민들은 다행히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에는 비행장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 마을 주민들은 망운비행장 건설 현장으로 일하러 온 전국의 노무자들을 상대로 밥도 해주고 하숙도 했다고 한다. 당시 방이 두 개 이상이면 반드시 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노무자들에게 내줘야 했다. 또한 비행장 부지가 황토밭이어서 노무자들이 아침에 들어갈 때는 하얀 옷을 입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붉은 옷이 되어서 나왔다. 그리하여 비가 올 때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이 벌건 진흙탕이 되었다고 한다.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

  • 이전
    작성일 2026.03.12 16:03
  • 다음
    작성일 2026.03.12 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