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마을은 톱머리항에서 ‘청운로’를 타고 북진하다 ‘운해로’와의 교차 지점 못미처 왼쪽에 있는 마을로, 도로 오른쪽은 무안국제공항이다. 현재 이 마을의 위치는 무안국제공항 활주로와 비교해 4.5m~10m 정도로 지면이 높다. 원래 무안국제공항 일대도 이와 같은 지면의 높이였는데, 공항 활주로를 조성하면서 언덕을 깎고 그 흙은 ‘창포호’를 메워 지금처럼 지면의 높낮이가 다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피난민들이 정착(定着)한 마을이다. 그래서 망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마을표지석>(1985)과 옆의 <통일염원석>(세로 길이 1m가량의 자연석에는 ‘우리의 염원’이라는 표제와 더불어 ‘모든 것이 넉넉해도 한 가지 우리의 부족함은 화합의 장, 바로 남북통일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통합기준점 표지석> 등이 있다. 현재 마을 입구는 공항로 4차선 도로 공사 등으로 매우 어수선하다.
지명유래
이 마을은 원래 「당산끝머리」(당시 토착민 세 가구가 있었는데, 지금 그들은 남아있지 않다)로 불렸는데, 정착민들이 들어오면서 「정착(定着)」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한때 마을 주민들은 정착이라는 이름이 싫어 「정착농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6.25 한국전쟁 후 주로 북쪽 서해안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무안을 비롯해 목포, 진도 등 전남 각지로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6년 보사부의 피난민 입주 정책에 따라 이 지역이 피난민 입주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57년에 망운면 피서리 산 69번지에 98정보의 땅을 마련하여 100세대 497명이 정착하면서 이 마을이 건설되었다. 당시 이곳은 일본인 야마다 만키치로(山田万吉郞, 1902~1992) 소유의 땅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해방되면서 황무지로 버려진 곳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른바 ‘말집’이라 부르는 집을 지어 세 가구가 기거하는 주택을 분양했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정착」마을은 무안반도의 내해인 서해바다 맨 안쪽 끝에 자리한 마을로 옆으로는 무안국제공항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고 예전의 마을이름은 ‘당산끝머리’였다. 이러한 지형과 지명을 감안하여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당산끝머리’라는 이야기는 마을의 중심인 당산에서 멀리 떨어진 끝부분을 지칭하며 이는 마을의 경계나 주변부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당산끝머리’, ‘웃당산’, ‘벌당산’ 같은 이름으로 마을 구역을 구분해서 불렀다. 따라서 ‘당산끝머리’라는 이름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이 위치한 언덕 끝자락을 뜻하며, 마을이 서해 내해의 안쪽 끝에 있는다는 것은 물길이 모여드는 종점에 자리한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모이는 곳을 재물과 복이 쌓이는 자리로 해석하기 때문에 마을은 재물 집적지(財聚地)로 간주된다. 또한 ‘끝머리’라는 지명은 마을이 내해와 육지의 경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풍수에서 경계는 기운이 모이고 변하는 곳으로 마을이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고 번영할 수 있는 터전으로 해석되는데, 무안국제공항을 비롯하여 광주-목포 간 고속도로와 호남선KTX 등이 건설되고 있는 현상과 맞물린다고 하겠다.
마을성씨
이씨, 김씨, 박씨, 정씨, 송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은 원래 「당산끝머리」로 불렸으나, 정착민이 들어 오면서 「정착」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은 피서리의 일부를 떼어 내 새롭게 조성한 마을이다. 피서리는 조선시대 영광군 망운면 「피서촌(皮西村)」에 속했으며, 1910년에 목포부 관할로 되었다가, 1914년에 무안군 관할로 행정구역이 변천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의 주민들은 정착 초기에 척박한 환경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분배받은 토지는 풀도 자라지 않은 박토(薄土)로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밀, 유채, 고구마 등을 심다가 차츰 땅을 기름지게 일궈가며 다른 밭작물을 심었다. 특히 주민들은 갯벌의 펄을 실어다 밭에 뿌려 농사짓던 고단하고 아팠던 기억이 있다. 현재 마을의 주요 작물은 마늘, 양파, 고구마 등이다.
마을형성 초기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망운면 소재지에 나가면 주민들이 수군거리며 ‘사람하고 피난민하고 다닌다’라고 할 정도로 이들을 배척했다. 또한 굶주림에 시달리며 곤란을 겪었는데 다행히 미국경제원조사절단인 유솜(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에서 원조받아 근근이 생활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이 같은 가난으로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한 점이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고생의 결과로 지금은 경제적으로 한층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마을 주민들은 여느 마을보다 강한 결집력을 지녔다고 한다. 이같은 주민성격의 배경은 1970년대~1980년대 ‘이석호 땅 사기 사건’에서 비롯된다. 당시 국세청공무원 이석호가 서류를 조작해 「정착」촌 일대를 자신의 친인척 소유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땅을 되찾기 위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 주민이 투쟁에 동참하여 극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착할 때, 정부가 제공한 98정의 땅을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씁쓸해하였다.
주요시설
무안국제공항, 호남선KTX 무안공항역
마을변화
오래전에 밭농사가 아닌 논농사를 짓기 위하여 실향민 24명이 힘을 모아서 지게와 망태를 이용하여 간척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이른바 ‘용호지선’(당시 옆에 있던 마을로써 피서4리 「용호」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무안공항 건설과 행정구역 개편으로 피서2리 「피동」, 「피서」과 함께 사라졌다)이라는 지역의 만(灣)을 막아서 20여 정보의 농토를 마련한 것이다. 현재는 거의 묵답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 주민들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현재의 「정착」마을은 마을 형성 당시에 비해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마을 일부가 무안국제공항 부지로 편입되기도 하였고, 또 주민들이 연고지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공항이 들어선 「정착」마을 일부에도 10여 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세대를 찾을 수 없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980년대에는 동계(1973 창립), 부녀회(1980 창립), 동갑계(1978 창립) 등이 조직되어 있있다. 요즘에는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정착마을회관, 마을누정, 재활용품수집장 등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명칭으로는 마을회관 뒤에 있는 뜰을 일컫는 ‘화골’, 그리고 한때 이 마을 인구가 망운면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그리하여 이 마을의 학생들이 망운면 소재지에 나가서 몰려다니면 ‘와글와글하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떼까우’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설날에는 북녘에서 하던 ‘배뱅이굿’을 하며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도 하였고, 고향의 맛을 내는 두부나 엿을 해서 나눠 먹기도 했다. 그리하여 ‘망향단’을 이 마을에 있는 당산 끝머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무안군에서 현재의 물맞이공원에 부지를 마련해줘 그나마 아픔을 달래고 있다.
이처럼 이 마을에는 실향민들이 많아 북한식의 장례절차나 놀이문화 그리고 음식문화에 대한 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콘텐츠화한다면 마을의 소득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문화 특성화에도 훌륭한 자원이 될 것이다.
유물, 유적
무안국제공항을 건설 하면서 지금은 공항의 활주로가 된 예전의 「정착」마을의 일부 지역에서 대형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박물관이 1999년 실시한 지표조사와 2000년도에 실시한 시굴조사에서는 철기시대 수혈과 고려시대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백자가마 2기와 공방 4기 등 전통도자의 공방구조와 도자 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발견했다. 주민들은 80년대 초까지 문화재 전문 도굴꾼들이 마을 주위를 많이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말집’은 초기 정착민들에게 정부에서 분양한 주택으로 집 1채에 3가구가 들어가 살도록 하였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딸린 구조로 1958년부터 주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현재도 그때 지었던 당시의 집들이 남아 있는데 기존의 구조를 개조해 창고 등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이 중에 폐가 상태이지만 내부구조는 아직 형태가 남아 있는 ‘말집’이 한 채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황해도 신천 ‘반공의거사건’(1950년 10월 13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발생한 반공 무장봉기와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연이어 벌어진 사건)을 몸소 겪은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전임 이북5도민 무안군 연합회장과 마을노인회장을 겸했던 이범영 옹(翁)이다. 그는 ‘매년 5월 8일이면 지역의 실향민들과 함께 임진각의 망향단에 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제사를 지내고 온다’라고 했다. 정착마을 실향민들은 10여 년 전에도 이 마을에는 40세대 이상의 실향민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1세대 실향민을 모두 세상을 떠나고 2세대 실향민들이 이곳을 고향 삼아 생활하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무안국제공항 4차선 확장 및 호남선KTX신선 공사 등을 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주민들은 무안국제공항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이 많다. 마을이 공항 뒤편에 위치해 비행기 이착륙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행장 설계부터 건설까지 과정에서 창포호 간척사업권을 지닌 유당농원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다. 공항건설이 유당농원을 위한 건설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주민들은 무안국제공황 건설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현재 무안국제공항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피서2리 「피동」, 「피서」마을과 피서4리 「용호」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원래 ‘조선시대 중엽에 국정이 혼란하고 민심이 소란하여 풍류객이 방방곡곡을 답사하던 끝에, 이 지역의 피세(避世)의 적지라고 하여 정착하면서 마을명을 「피서(避西)」라고 하였다.’라고 《마을유래지》에 전한다. 피서(避西), 곧 서쪽의 다른 세상이라는 뜻처럼 그렇게 이후 많은 피난민이 정착하고 아울러 현재는 무안국제공항을 비롯하여 철도와 고속도로 등 서남권의 교통 허브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피서라는 원래의 뜻과 함께 이를 통해 변천해온 마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타사항
야마다 만키치로(山田万吉郞, 1902~1992)는 일제강점기 무안과 함평에 대농장을 소유했던 지주이자, 무안의 도자연구에 기여한 학자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기록(1915)에 무안 송현리와 함평 대덕리 등지에 토지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조선의 도자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조선도자기의 변천(朝鮮陶磁器の變遷)』(1939), 『삼도쇄모목(三島刷毛目)』(1943)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100여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무안의 분청사기에 관해 깊이 연구하여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