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절리」는 무안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져 있는 보평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다. 「본고절」, 「상고절」, 「오리정」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절1리에 속한 「본고절」은 병산을 합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지명유래
「고절리(高節里)」란 높은 절개를 지닌 마을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상고절」마을의 입향조인 무안박씨 박익경(朴益慶)의 충절과 관련된 유래이고, 다른 하나는 「본고절」마을의 입향성씨인 여산송씨 문중의 열부(烈婦)로부터 비롯된 유래이다.
하지만 「고절리」는 백제시대에는 물아혜현의 치소가 고려시대에는 면성의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원래 ‘고라실(古羅室)’ 또는 ‘고라촌(古羅村)’ 등으로 불렸으며, 또한 이후에는 ‘고려물’, ‘고려말’ 등으로 불려서 고려시대와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정유재란 당시 이 마을 출신 송씨 부인의 절개와 지조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旌閭)와 함께 마을 이름도 내려줘 「고절(高節)」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고절의 아래쪽에 있어서 「하고절(下高節)」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본고절(本高節)」로 개칭했다고 주장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여산송씨 송천종(宋千鐘, 1519~1584, 자-인유, 호-절암)이다. 그는 전라북도 고부군 향제에서 살았으나 정미사화(乙巳士禍,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사화로 윤원형 일파가 대윤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의 여파로 많은 선비가 화를 입자,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화를 피해 1547년 이 마을에 들어와 은둔하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공의 부친인 송당에게는 송당에게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중 아들이 이 마을의 입향조이며 막내딸이 무안박씨 박제에게 출가하였다. 또한 입향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두 아들인 송박(宋珀, 호-애송(愛松)), 송욱(宋旭, 호-애균(愛筠)) 등 두 형제와 박제에게 출가한 송씨 부인이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막내아들인 송현(宋現)은 두 형이 순국함에 부모를 모시고 세 가정을 부양한 효자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무안의 여산송씨 문중은 호국정신뿐만이 아니라 열부행의 표상이었다. 적과 항쟁하다 죽음은 충(忠)이며, 적에게 잡힌 치욕을 씻을 길 없어서 유방을 베고 순절한 죽음은 열(㤠)이며, 적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짖다가 분사한 죽음은 절(節)이며, 의려를 모아 세가 궁함에 의롭게 죽은 것은 의(義)이다. 이처럼 일문(一門)의 안에서 충, 절, 의, 열이 나옴은 드물다 할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형국의 보평산을 주산으로 앞산인 면산(또는 역마산)을 안산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의 짜임새가 훌륭해 마을이 안정되고 아늑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마을조사에서 만난 송기와 노인회장은 마을의 지형이 말(馬)모양을 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안으로는 아늑하고 평안하며 밖으로는 뜻을 펼칠 힘을 지닌 이상적인 마을 형국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여산송씨, 무안박씨, 광산김씨 등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고절리」로만 불렸으나 1912년의 자료에는 「고절리」와 「상고절」로 분리되었고, 다시 「상고절」, 「하고절」로 나뉘었다가, 현재는 「하고절」을 「본고절」로 고쳐 「본고절」, 「상고절」로 부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외읍면 지역으로서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고절리」, 「오리정리」, 「병암리」, 「평촌리」, 「유동」을 병합하여 고절리가 되어 다시 무안읍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본고절」, 「상고절」, 「오리정」 등 3개 마을을 고절리가 관할하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이 마을은 ‘무안의 낙향(樂鄕)은 고절’이라 할 정도로 살기 좋았다. 주산인 보평산과 안산인 면산(또는 역마산)을 두고 좌청룡 우백호의 형국을 지닌 마을은 안정되고 아늑한 분위기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남 임(南 林), 북 송(北 宋)’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쪽에는 배뫼 임씨가 살고, 북쪽에는 고절리 송씨가 사는 양반촌(班村)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각종 개발로 산림이 파헤쳐져 예전의 아늑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써 쌀, 양파, 마늘, 고추를 주요 생산물로 하고 있으며, 축산업도 11세대에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북부교회, 창고, 비닐공장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더위쉼터), 정자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뒷산인 ‘보평산’과 앞산인 ‘면산’ 그리고 ‘고구래들’과 ‘고절들’ 등이 자연 생태환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보평산은 예전에 매년 추석 이튿날이 되면 꽃산이 되기도 하고 만남과 이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추석이 되면 인근 마을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날을 전후하여 많은 아낙네가 음식을 가지고 이 산에 올라와 송씨 부인의 높은 충절과 곧은 절개를 기리고 가곤 하였다. 또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헤어지는 만남의 장소가 되어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평산에 오르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마치 산에 피어있는 꽃처럼 보인다고 하여 ‘꽃산’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보평산 군데군데 일본인의 흔적으로 포대를 운영하던 굴들이 있다. 보평산에는 용바위가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군병 만 명이 물을 먹었다는 ‘만수샘’이 구 삼호축산 아래에 있다. 그 주변에 ‘서구래’라는 들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궁개들’이 있다. 마을에서 용월리 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앞골바지’라 하며 그 외에 마을 가운데 ‘큰샘’, 마을 뒤쪽에 ‘도치밧등’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입구 길목에 ‘당산독’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으며, 크기는 비록 약 1m 안팎에 지나지 않으나, 마을의 우환을 막고 주민의 안녕을 기원할 뿐 아니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정월 14일에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냈던 당산독이다. 그런데 이 당산독이 바로 서지 않고 비스듬히 세워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길 건너 맞은 편에 복룡리의 용산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이 당산독을 보면 마치 성기가 우뚝 서 있는 남근석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용산마을 여자들이 이 독을 바라보면 바람이 난다고 하여, 그 마을주민들이 몰래 밀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당산독을 중심으로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의 병산에 고인돌공원이 있다. 1995년 서해안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성동리 안골에 있던 고인돌 9기를 이곳으로 옮겨서 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무안박씨들의 상징인 ‘경기묘’와 ‘병산사’ 그리고 무안파 시조인 애한정을 모시는 ‘영모재’가 있다. 또한, 마을에는 1590년경에 지은 여산송씨 종가가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정읍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입향조의 재실인 ‘영언재’가 무안읍 용월리 약곡 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파평윤씨(윤대순, 1910~1992)의 효열을 기린 효열각과 입향조인 어모장군 송천종의 유허비가 있으며, 효자인 송차섭의 기행비가 들어있는 효자각이 있다. 병산에 1996년에 세운 ‘효열부죽산안씨기적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영조 임금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선비인 여은군 송상후(1700~1776, 자-기중, 호-죽헌)가 있었다. 여은군은 정숙하고 후덕하며 마음이 너그러워 종친은 물론 향당의 추앙을 받았던 선비이다. 제자 중 셋이나 문과에 급제하자 영조가 직접 그를 불러 1768년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1770년에는 여은군에 봉하였다. 이외에 역사인물로는 송계주(1680~1748), 송유렴(1640~1689), 송지원(1731~1805), 송현(1557~미상), 송상후(1700~1776)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무안에서 최초로 국가에서 내린 이름을 갖고 있다. 마을에 어린 충, 절, 의, 열에서 특히 나라에서 내린 정려(旌閭)가 처음 들어선 마을이다. 원래 정려가 들어선 곳은 청계면 청천리였으나, 문중의 뜻을 모아 고절리로 옮겼다. 현재의 길 아래 냉동창고의 자리에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충절의 주인공인 여산송씨는 진위장군 박제의 부인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박익경의 손자인 박제는 수백의 의병을 모아 부사인 최경회 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남원과 무주 등에서 적을 소탕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곳 보평산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때 부인 송씨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씨 부인은 왜군에게 붙잡혀 추행당하자 분함을 못 이겨 자결하였다. 이러한 송씨 부인의 순절은 의병의 분노를 자극하였으며,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왜구를 막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보평산전투는 왜구로부터 전남지방을 방어하는 큰 격전장이 되었다. 이듬해 왜병이 물러나고 박제의 처 송씨의 절의가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1598년(선조 31년)에 정려를 내렸다. 아울러 마을 이름도 송씨의 높은 절개를 길이 잊지 않도록 ‘고절리’라 명명하도록 한 것이다.